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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r 12. 2020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_베오그라드, 세르비아

나의 비단길 이야기-36

#125 브랜디와 열라면


 "많이 먹어."

 이바나는 어제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푸짐하게 차려줬다. 달걀물을 입혀 구운 야채와 햄, 으깬 감자가 파란색 체크무늬 테이블 매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럼 잘 먹을게."
 방금 눈을 떴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아침 밥상에 스르르 식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타 접시 옆에 놓아줬다. 이탈리아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그녀는 세르비아어, 러시아어, 영어는 할 줄 알지만 전공인 이탈리아어만 못한다며 웃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텔레비전 선반에 놓인 그녀의 옛날 사진을 유심히 훑었다. 금발로 염색한 지금의 머리색이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집을 정리해두고 나와 버스를 탔다. 부다페스트보다 남쪽으로 왔지만 공기는 오히려 더 차가웠다. 스웨터 위에 헝가리에서 산 코트를 입었다. 이바나도 카키색 야상 점퍼를 걸치고 따라나섰다.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큰 도시는 아니다. 자그마한 시내의 보행자 전용 거리를 중심으로 상점과 식당이 모여있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베오그라드의 역사인 칼레메그단(Kalemegdan) 요새가 나온다. 공원처럼 꾸며진 유적지에 입장료는 없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높은 지대에 건설된 망루에서는 도나우 강과 지류인 사바 강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가을볕에 데워진 벤치에 앉아 길거리에서 파는 귤과 팝콘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 저녁은 뭐 먹으면 좋을까?"

 관광객스러운 내 질문에 이바나는 '플예스카비짜(Pljeskavica)'라는 이름의 음식을 추천했다.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 같은 건데, 싸고 양도 많아. 토핑이나 소스도 니가 고를 수 있어."

 길거리에는 그녀가 말한 대로 플예스카비짜를 파는 간이식당이 많았다. 두툼한 패티가 든 손바닥 만한 버거 하나에 190 세르비아 디나르, 약 2000원이다. 하지만 혼자 하나를 다 먹기 힘들 만큼 양이 많다. 우리는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버거를 뜯어먹었다. 


 

 세르비아 버거를 먹었으니 한국 음식도 먹어봐야지 않겠냐는 내 말에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부다페스트의 한국 마트에서 준비한 열라면을 꺼낼 차례다. 

 "잠깐만, 마트에서 뭐 살 게 있어."

 그녀는 나를 세워두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더니 곧 술 한 병을 들고 나왔다. 

 "어제는 비냑을 마셔봤으니까 오늘은 다른 걸로 샀어. 이것도 전통술 같은 건데 자두로 만든 거야."

 그녀가 사 온 술은 라키야(Rakija). 브랜디 종류인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끝 맛에 향긋한 자두 향이 났다. 술을 마시며 나도 라면을 끓였다. 나는 독한 브랜디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고 이바나는 라면이 끓기 시작하자마자 매워서 기침을 해댔다. 그녀는 결국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해서 내가 다 먹었다. 

 "이렇게 매운 걸 브랜디랑 먹다니 이건 진짜 미친 짓이야. 식도가 불타는 거 같아."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26 오늘이 아니면


 "너 3일 동안 호스트 신청했잖아, 그런데 진짜 미안하게 됐어. 갑자기 언니가 집에 온다고 해서 오늘은 못 재워줄 것 같아. 언니가 분명 내일까지 안 온댔는데... 언니가 손님이 있으면 불편해해서. 미안해."

 "아 그래? 근데 진짜 괜찮아. 시내 쪽에 호스텔이 몇 군데 있던데 거기로 옮기면 돼."

 조금은 갑작스럽게 짐을 챙겼다. 이바나의 집을 나서 시내에 있는 호스텔의 6인실로 숙소를 옮겼다.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며 숙소 체크인을 도와줬다. 조금 어둑어둑한 분위기였지만 이 근처에서 제일 싼 곳이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쌀쌀하지만 화창한 전형적인 가을날이다. 목도리를 사야겠다는 내 말에 우리는 구제 가게를 찾아 나섰다. 이곳도 부다페스트처럼 구제 가게가 많았다. 구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물건이 진열되어 있어 고르기가 편했다. 마음에 드는 카키색 목도리를 발견하고 바로 목에 두르고 나왔다. 구제 옷 특유의 창고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한국이나 이곳이나 만국 공통인 것 같다. 


 할 일 없던 우리가 향한 곳은 다시 칼레메그단 요새. 오늘은 요새의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어제는 지나쳤던 박물관이나 카페, 옛날 성당 같이 볼 만한 건물들이 많았다. 정교회 성당에 들러 내부의 성화들을 구경했다. 이바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성화 앞에서 정교회 식 성호를 그었다. 

 "우리 전통에 대한 존중의 표시인 셈이지. 습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법당 앞에서 손을 모아 합장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일몰 시간에 맞춰 성벽 위로 다시 올랐다. 이 도시에는 고층 빌딩이 많이 없다. 때문에 평탄한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해넘이가 잘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여행하며 일몰을 기다려서 본 적이 몇 번 없는 것 같다. 일출과 일몰 중에 굳이 고르라면 나는 일출을 선호하는 편이다.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해가 뜨고 나면 온전한 하루가 내 앞에 놓여있으니. 일몰은 반대로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지만 또 무언가 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에서 씁쓸한 맛이 난다. 성벽에 걸터앉은 우리는 지는 해를 보며 서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녀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일몰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언덕을 내려가 호스텔 근처에 봐 뒀던 중국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미리 만들어 둔 요리를 뷔페식으로 덜어서 파는, 대중적인 느낌의 중국 요릿집이었다. 카페테리아처럼 커다란 쟁반을 들고 줄을 따라가며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켜 주문을 했다. 아시아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이바나에게 몇 가지 추천을 해줬다. 간장을 넣은 볶음국수와 조금 매콤한 사천식 돼지고기 볶음, 새콤달콤한 소스를 바른 닭튀김이 우리 접시에 얹혔다. 계산대 옆에 놓인 냅킨과 나무젓가락은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어서 여러 개를 챙겼다. 여행을 하며 나무젓가락이 요긴할 때가 많았다.  


 

 식당을 나와 공원에서 마실 보드카를 사러 마트에 가는 길. 나는 그녀와 보낸 며칠 간의 시간이 행복했다. 그녀는 웃을 때 항상 코를 찡긋하며 웃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그게 좋다고 말할까?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슈퍼마켓 진열대를 빙빙 돌다 우리는 중간 크기의 보드카 병과 레몬맛 슈웹스, 비스켓과 귤을 골랐다. 

 "니가 좋아하니까."

 귤을 집어 들며 그녀는 또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고, 그 사실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말도 못 꺼내는 내가 바보 같아서 독한 술만 계속 털어 넣었다. 

 "나 이제 버스 막차 시간이라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술도 다 마셨고."

 "응,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괜히 뒷머리를 만지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아니면 이 말은 절대 못 꺼내겠지. 결심이 섰다. 

   

 "이바, 갑자기 뜬금없겠지만 들어줘. 나는 너랑 보낸 사흘이 너무 즐거웠고, 너를 만나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지금 당장 너를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내가 계속 여기 있는다면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꺼내기 힘들었지만 입 밖에 꺼내니 말은 신기하게 술술 나왔다. 말로는 태연한 척을 했지만 긴장한 탓에 다리가 떨렸다. 이바나는 말을 마친 나를 쳐다보더니 웃었다. 

 "뭐?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조잡한 몇 마디를 덧붙여 황급히 화제를 얼버무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오히려 내가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고백을 던진 것 같아 모든 행동이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한 소리를 해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쩌지.' 후회가 목까지 차오를 즈음 우리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곧 그녀가 탈 27번 버스가 오고 이바나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너 내일모레 간다 했나? 조금 더 오래 있으면 안 될까?" 

 버스에 타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127 알찬 하루를 보내는 방법


 "원래 오늘 체크아웃하기로 했는데, 일주일 더 연장할 수 있을까요?"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은 호스텔을 연장한 것. 다행히 인기가 없는 호스텔이라 추가 투숙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곧이어 이바나가 나를 데리러 호스텔로 왔다. 오늘은 그녀의 대학 도서관에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대학 도서관과 다르게 좌석 예약 시스템이 없다. 열람실에 들어가 빈자리에 앉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칸막이가 낮아 허리를 펴고 앉으면 앞에 앉은 사람의 이마까지 보인다. 하지만 발을 쭉 뻗으면 말랑한 앞사람의 발을 밟게 되는 건 한국과 똑같았다. 


 

 이바나가 전공 공부를 할 동안 나는 옆에서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오랜만에 조용한 대학 도서관 분위기를 느꼈더니 나도 복학해서 우리 학교 도서관에 가고 싶었다. 사실 도서관에 가는 건 좋은데 앉아서 공부하는 건 싫다. 대신 도서관 매점에서 먹는 컵라면과 참치김밥은 엄청 좋아하는 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옆 자리 친구를 툭 치고 '매점 고?'라고 묻는 건 항상 내 역할이었다.     


대학 구내 카페

 

 이바나의 대학교 역시 유럽의 다른 대학들처럼 하나의 캠퍼스 안에 모여있지 않고, 단과대학 건물이 시내에 흩어져 있다. 그래도 단대 건물 근처에는 값싼 식당이 몇 군데 있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기로스는 쫄깃한 빵에 고기와 야채, 감자튀김을 싸주는 그리스 음식이다. 소스를 줄줄 흘려가며 열심히 먹었다. 

 "나 밀린 빨래를 해야 되는데, 호스텔에 물어보니까 5유로나 달라더라. 하룻밤 숙박비가 9유론데 세탁비가 좀 비싼 거 같더라고."

 "5유로? 진짜 비싼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빨래 나한테 줘. 우리 집에서 빨아줄게. 내 방에서 말리면 괜찮을 거야."

 이바나의 집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집을 나와서 빨래를 맡기려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친절한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내일 밥이라도 사야겠다.



 돈이 없는 우리는 슈퍼에서 간식거리를 사 또다시 요새로 향했다. 베오그라드에 온 이후로 날은 계속 맑다. 이곳에는 길고양이보다 떠돌이 개가 많다.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우리가 앉은 벤치 앞에 누웠다. 개는 팝콘이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귤은 별로인지 바로 뱉어냈다. 내가 개를 볼 동안 이바나가 소시지를 사 와 먹였다. 그 개는 소시지를 다 먹고 행복한지 배를 보이며 누웠다. 



 해가 넘어가고, 개는 집으로 가는지 슬그머니 일어나 사라졌다공원에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다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차가운 가을밤이었다. 계속 벤치에 앉아있던 우리는 추워져 걷기 시작했다. 강변으로, 다시 성벽으로, 인적이 드문 밤거리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끝없이 걸었다. 


#128 보통기억


 예정보다 오래 있게 된 베오그라드. 일주일 간의 하루는 비슷했다. 이바나의 집으로 가 점심을 얻어먹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쉬었다. 우리가 틀어두던 음악방송에서는 여전히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일렉트로닉 밴드 데이스&데니스(Denis&Denis)의 노래도 좋았다. 통통거리는 사운드가 80년대 유명한 신스팝 밴드 아하(A-ha)를 떠올리게 했다. 



 "혹시 이 근처에 수선집이 있을까?"

 이스탄불에서 샀지만 아직 기장 수선을 못한 청바지가 떠올라 이바나에게 물었다. 그녀를 따라 집 근처의 수선집으로 향했다. 간단한 기장 수선이었는데 아주머니는 이틀 뒤에 오라며 내일은 문을 안 연다고 했다. 이틀 뒤 다시 받아 든 내 청바지 밑단에는 하얀 봉제선이 낙인처럼 박혀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밑단을 두 번 말아 올렸다. 어쨌든 새 청바지가 생겼으니 무릎이 다 늘어난 헌 청바지는 길거리의 커다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나는 물건에 정을 붙이고 의미부여를 하는 타입이라 여기까지 함께한 청바지를 매정하게 휙 버리기가 미안했지만 가방 무게를 생각해서 여기서 보내주기로 했다.  



 하루는 이바나의 친구인 올리베라가 우리를 초대했다. 올리베라의 집에는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이바나의 대학교 친구 알렉산드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사실 올리베라를 좋아하거든. 근데 아직까지 말도 못 하고 있잖아. 너도 둘이 같이 있는 거 보면 티가 팍팍 난다니까."

 이바나가 슬쩍 귀띔을 해줬다. 올리베라의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베드가 놓여있었다.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큰 소파라니, 부러웠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다 지쳤다. 소파에 죽은 듯 널브러져 에바 그린 주연의 '몽상가들'을 봤다. 몽롱한 우리는 스스로 몽상가들이라고 생각했다. 



 세르비아를 떠나기 전날, 미리 기차역에 들러 몬테네그로의 포드고리차행(行) 표를 예매했다. '아드리안 익스프레스'라는 멋진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기차는 베오그라드 중앙 역이 아니라 시내에서 떨어진 토프치데르(Topcider)역에서 출발한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트램으로 갈아타야 한다. 괜찮다는 이바나를 따라 교통권도 없이 트램에 올랐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티켓을 안 사고 타는 것 같았다. 이곳에 계속 있다 보니 대중교통을 탈 때 돈을 안 내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공산주의 방식인가? 



 느긋하게 열리는 티켓 오피스에서 한참을 기다려 기차표를 손에 넣었다. 티켓에 찍힌 기차의 출발 시간은 다음날 저녁 8시.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30시간이나 남았네."

 이 서른 시간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꽉꽉 채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역사를 나오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의 유예. 그 짧은 시간마저도 뜨거운 입김이 닿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양 흩어져버렸다. 이제 앞에 남은 건 일 초씩 천천히 다가올 결말뿐이다. 차라리 지금 당장 기차가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라며 플랫폼으로 뛰어들어 온다면, 예기치 못하게 급히 기차에 올라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술 마시러 갈까?"

 "좋아."

 그녀의 제안에 또다시 블랙 터틀스 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딸기맛 맥주를 두고 마주 앉아 누구도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제, 그저께, 지난주. 우리는 자꾸 뒤로 가기만 했다.  

 


#129 토프치데르 역


 다시 찾은 토프치데르 역에는 내가 탈 기차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플랫폼의 의자에 앉아 서로의 수첩에 편지를 썼다. 수첩을 돌려주며 이바나는 내게 장미가 수 놓인 손수건을 같이 내밀었다. 

 "자 선물. 이거 내가 아끼는 손수건인 거 알지? 거기에다 내가 쓰는 향수도 뿌려놨거든. 니가 좋아하는 내 냄새야. 오래가라고 많이 뿌려놨으니까 지금은 맡지 마, 아마 아직 독할 거야."

 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냄새를 한 번 맡고 다시 접어 가방에 넣었다. 

 "고마워.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출발 시간이 다가오면서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차에 오를 때까지 플랫폼에 남아있었다. 마침내 출발 신호인 듯한 호각이 울렸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심장이 방망이 쳤다.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라 눈 앞이 뿌예졌다.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을 돌려 기차에 올랐다. 내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짐을 내려놓았다. 확인한 휴대폰에는 아직 그녀의 핫스팟 신호가 잡힌다.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바, 어디야? 아직 내 폰에 니 핫스팟이 잡히는데.'

 '아직 플랫폼이야. 기차가 떠나는 것까지 보려고 기다리고 있어.'

 답장을 받자마자 나는 객실을 뛰쳐나갔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이바나를 꽉 안았다. 뺨에 눈물이 닿아 미끄덩거렸다. 

 "기차역에서 이별은 너무 고전적인데, 또 너무 슬프네."

 우리는 울면서 웃었다. 두 번째 호각이 울리고 역무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바나는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귀고리를 빼 내게 쥐어주었다. 항상 하고 다니던 물방울 모양의 귀고리였다. 

 "이제 진짜 빨리 가, 이건 나를 잊지 말라고 주는 거야."

 기차의 문이 닫혔다. 덜거덕 거리며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그럼 잘 지내'라니, 그렇게 멍청한 말이 또 있을까. 나는 객실로 돌아와 2층인 내 침대에 얼굴을 묻고 누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하지만 아마 어깨가 들썩였을 것이다. 누군가 다리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내 옆 침대를 쓰는 남자가 서 있다. 

 "여기, 아까 승무원이 침대 시트를 주고 갔어. 이건 니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하고 나는 돌아누웠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한숨을 몇 번이나 깊게 쉬었다. 아래층의 할아버지는 주무시는지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눈이 아려 잠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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