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37
#130 유로존으로
날이 밝았지만 여전히 기차는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다. 어젯밤 내게 침대 시트를 건네주기도 했던, 맞은편 침대의 남자는 세르비아인 스테판. 머리를 길게 기른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다.
"저기, 무슨 일 있어? 어젯밤에는 좀 안 좋아 보이던데."
그는 걱정스레 내게 말을 붙였다. 이내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고, 그는 몬테네그로는 처음이라는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 멋있지 않아? 내가 어렸을 때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한 나라였는데 지금은 두 나라가 되어버렸어. 그때는 여름이면 몬테네그로에 있는 바닷가를 갔었지.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세르비아는 바다가 없는 나라가 돼버렸지만. 그나저나 너 몬테네그로가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는 산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몬테(Monte)'와 검다는 뜻의 '네그로(Negro)'가 합해져 검은 산이라는 뜻이라고며 설명을 해줬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차창 밖으로는 거뭇한 바위산들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포드고리차에서는 어디로 갈 거야? 거기는 별로 볼 게 없거든. 나는 이 기차의 종점인 바르까지 가. 거기에 친구가 살아서."
"응, 나도 포드고리차에는 하루만 있고 코토르로 넘어갈 계획이야. 거기서는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로 갈까 생각 중이고."
"그래? 그럼 '스베티 스테판'이라는 마을에 꼭 가봐. 코토르에서 한 시간이면 갈 거야. 해변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는 모래사장을 따라서 그 섬에 들어가 놀기도 했는데 지금은 섬 전체가 리조트가 되는 바람에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섬에 안 들어가더라도 마을에서 보는 경치가 진짜 끝내주거든."
스테판이 추천하는 '스베티 스테판'. 메모장에 이름을 적어두었다.
포드고리차는 이 나라의 수도지만 관광지로서의 인기는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자세하기로 소문난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에도 포드고리차에 대한 설명은 짤막하게 마무리된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기차나 비행기를 갈아타러 오는 사람들. 나도 마찬가지로 하루를 이곳에서 쉬었다 아드리아해의 휴양지 코토르로 떠날 것이다.
"제가 아직 몬테네그로 돈이 없어서요. 유로를 환전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저희 유로 쓰는데요? 그냥 유로로 지불하시면 됩니다."
호스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몬테네그로는 발칸 반도 국가 중 그리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유로를 쓰는 곳. 심지어 유럽 연합도 아니면서 유로존에 속하는 신기한 곳이다. 어쨌든 유로를 짤짤이 바꿔 쓰던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이곳은 과거 한 나라였던 세르비아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동방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의 작은 동생 느낌이라면 여기는 군데군데 모스크가 보이는 등 이슬람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포드고리차의 시내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스타일의 계획도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반듯하게 구획된 건물들 사이로 난 보행자 전용 도로와 광장까지, 이제껏 지나왔던 구소련 도시들의 축소판 같다. 시내 중심이지만 식당을 찾기가 힘들었다. 겨우 발견한 길거리 음식점에서 조각피자와 핫케이크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르게리따 피자를 사 먹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포드고리차는 전반적으로 우중충한 인상이다. 공원의 벤치들은 부서져있고, 여기저기 낙서들이 그어져 있다. 연석이 다 뜯어진 인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마치 서바이벌 게임 속 맵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호스텔로 돌아오며 그런 기분에 몰입하다 보니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행인을 볼 때마다 움찔움찔했다.
#131 플예스카비짜의 본질
"아드리아 해를 끼고 난 해안도로가 진짜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야. 절벽을 따라가는 길이라 고개만 돌려도 바다가 아찔하게 보인다니까."
터키의 농장에서 만났던 일루아는 지프차를 타고 지났던 많은 길 중 몬테네그로의 해안도로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수차례 얘기했었다. 그가 아기 고양이 카흐벳을 만난 길이기도 하고, 나도 그의 말 때문에 코토르행 버스를 타며 기대를 해봤다.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포드고리차 시내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는 언제쯤 나올까' 나는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 이미 해안도로는 다 지나고 버스는 코토르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에서 예약한 숙소는 코리아 호스텔. 어젯밤 코토르의 숙소를 검색하던 중 '코리아 호스텔'이라는 곳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후기를 읽어봤더니 한국인 아저씨, 아주머니께서 운영을 하고 계신 곳 같았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묵었던 일본인 아저씨가 운영하던 '사쿠라 호스텔'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한인 민박과는 달리 정식 숙박 업소였고, 후기가 좋아서 기대가 됐다. 한국 사람을 만나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를 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이틀 뒤 코토르로 오기로 한 친구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현모, 여기 호스텔 괜찮은데 찾았거든. 너도 모레 오니까 미리 여기로 예약해.'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현모는 주말 동안 이곳으로 놀러 오기로 했고, 그러겠다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오늘 학생 말고도 한국 사람 손님이 한 명 더 있어요. 지금은 잠깐 어디 나간 것 같은데? 이따가 들어오면 만나겠네."
친절한 주인아저씨는 편히 지내다 가라며 지도를 펼쳐 이 도시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버스 터미널에서부터 나에게 풍경으로 깊은 인상을 준 곳은 오랜만이다. 좁은 만과 검은 산 사이에 끼어들 듯 도시가 들어서 있고, 그 도시를 감싼 성벽은 가파른 산 위까지 당당하게 이어져 있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 같이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주인아저씨께서 추천해준 맛집은 'Tanjga'라는 그릴 하우스. 정육점 같은 비주얼이지만 가게 뒷마당에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다. 식사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다. 메뉴판을 보다 세르비아에서 먹었던 플예스카비짜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주문을 했다. 그릴 전문점에서 먹는 플예스카비짜는 어떤 맛일까.
이곳에서 먹은 버거는 물론 길거리의 스낵바보다 가격이 비쌌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완성된 맛이다. 혀에서 보는 맛을 눈으로 읽는 글로 옮기기란 항상 힘들지만 만약 플예스카비짜의 이데아가 있다면 이 식당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 향이 밴 패티는 씹히는 맛이 있었고, 양파 절임과 오이 피클의 산미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바베큐 소스와 매콤한 재료를 섞은 듯한 소스가 인상적이었다. 고기에 뿌리는 이 소스가 자꾸 당겨 다음에는 다른 메뉴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는 동안 뿌리던 이슬비가 잦아들자 나는 호스텔로 곧장 뛰었다.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호스텔의 다른 손님들도 급하게 돌아온 것 같았다. 6인실 도미트리와 주인 부부의 방, 공용 거실 및 부엌 밖에 없는 아담한 이 호스텔은 마치 친척 집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늘의 투숙객은 나와 러시아인 디나라, 아까 아저씨가 얘기해준 금주 누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안 그래도 주인아저씨가 오늘 투숙하는 한국인이 있다 해서 엄청 기다렸거든요. 너무 반가운데요, 언제까지 여기 있으세요?"
금주 누나는 2주 일정으로 동유럽을 여행하고 있었고, 코토르에는 3일 정도 머물 예정이라며 이곳에서 할 일을 늘어놨다. 코토르에서는 친구를 만나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없던 나는 그녀의 계획을 따라가고 싶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다쳤다는 그녀는 무릎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모레면 제 친구도 여기로 오거든요, 그때 같이 놀아요!"
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맥주잔을 받았다.
#132 인디언 서머
"이제 일어났어? 바로 씻을 거지?"
한번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드는 게 습관이 되었지만 맞은편 침대에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는 금주 누나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네... 안 그래도 준비하려고요."
10월이지만 날은 여름처럼 더웠다. 며칠 전까지 세르비아에서는 코트에 목도리로 싸매고 다니던 게 무색할 만큼 다른 세계로 온 것 같았다. 한 달만에 다시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우리는 바닷가 마을인 피레스트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제가 저기 가서 시간 물어보고 올게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혹시 피레스트로 가는 버스는 몇 시에 와요?"
"저기 지나가네요. 다음 버스는 1시간 뒤입니다."
뒤돌아본 버스 정류장에는 막 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하고 있었고, 금주 누나는 나를 찾아 뛰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관광안내소로 향할 때 뒷덜미가 서늘하더라니.
다음 버스를 기다릴 겸 먼저 올드타운을 둘러싼 성벽을 돌아봤다. 코토르는 '작은 두브로브니크'라고도 불린다는데, 이 성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은 입장료를 엄청 받는다는데 비해 이곳에는 입장료가 없다. 계단을 올라가 성벽 위를 걸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에도 꽤 관리를 안 하는 느낌이다. 부서진 곳도 많고, 난간도 제대로 붙어있질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너무 매끈하게 다듬어진 곳은 테마파크 같아서 재미가 없다. 성벽 안쪽으로는 전망 좋은 테라스가 딸린 집이 많다. 선선한 저녁에 저런 테라스에 앉아 항구로 배가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버스 시간에 맞춰 성벽을 내려왔다. 피레스트까지 버스비는 1유로. 다들 수영이라도 하러 가는지 타월과 튜브를 챙겨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아직 여름이구나, 기분이 좋아졌다. 에어컨이 안 나오는 작은 버스를 1시간가량 타고 도착한 피레스트. 마을 근처에는 모래사장이 있어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해수욕장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관광지라 가격이 비쌌다. 메뉴판을 한참 동안 유심히 보다 제일 싼 팬케이크를 시켰다.
"내 거 좀 먹어."
"아뇨 괜찮아요. 배가 안 고파서 일부러 저거 시킨 거예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금주 누나가 주문한 해산물 요리는 냄새부터 먹음직스러웠다.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녀가 건네는 접시를 건네받았다.
"조금만 주셔도 되는데..."
오랜만에 먹는 해산물이라 그런지 마늘로 양념된 새우와 가리비, 바지락 모두 맛있었다. 처음에는 안 먹는다 해놓고 바게뜨로 소스까지 싹싹 닦아먹었다.
식당을 나와 다음 마을인 리산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에서 레몬 소르베를 사 먹었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밀라노에서 처음 먹은 이후로 레몬 소르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선택지에 레몬맛이 있다면 다른 맛은 시도를 잘 안 하는 편이다.
도로의 가드레일 너머로는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햇빛에 석류가 터져 나와 새빨간 알맹이들이 보였다. 금주 누나가 까치발을 들어 하나를 따 나에게 건넸다. 껍질 사이로 들여다본 속살에는 애벌레가 득실댔다. 소리를 지르면서 던져버렸다.
"아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도착한 리산은 붉은 기와지붕을 인 집들이 모여있는, 지나온 마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초 계획은 더 떨어진 헤르체그노비라는 또 다른 마을까지 둘러보는 거였지만 이쯤 되니 둘 다 귀찮음이 밀려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죠. 만약에 제가 이기면 헤르체그노비까지 안 가고, 누나가 이기면 여기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거예요."
금주 누나가 가위바위보를 이겼다. 그래서 코토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목이 말라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셨다. 화창한 날에는 낮술이 더 잘 받는다.
"오늘은 둘이 같이 나갔다 왔구나, 어디 어디 갔다 왔어요?"
돌아온 호스텔에서는 주인아주머니께서 살갑게 말을 걸었다. 조금 쉬다가 5시쯤 성벽을 따라 뒷산에 올라가면 야경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원래 요새에 올라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거든요, 8유로나. 근데 이 길로 가면 산길이라 입장료를 안 내도 들어갈 수 있어요."
아주머니는 지도에 비밀스럽게 그 길을 표시해주셨다.
아주머니가 찍어주신 길을 따라 산을 탔다. 좁은 산길을 한참 걷다 보면 성벽의 끝자락이 보인다. 낮에 왔으면 등이 땀으로 다 젖었을 것 같다. 마침내 도착한 요새는 아슬아슬하게 산허리를 붙잡아 버티고 있는 모양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사람들이 모인 전망대로 향했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두 개의 성당을 중심으로 우리 호스텔이 어디쯤 있을까 가늠해봤다. 모인 사람들은 다들 도시의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도 스팟을 찾아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해가 지고, 불이 켜졌다. 불을 환하게 밝힌 크루즈들이 항구에 정박해있어 축제 분위기가 났다. 동해의 오징어잡이 배들만 몇 대 더 띄우면 만 전체를 환하게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내려갈 때는 티켓 검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산길로 가지 않아도 됐다. 대신 어두운 비탈길을 더듬거리며 내려왔다. 계속 내리막을 걸었더니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다리를 질질 끌며 호스텔에 돌아와 보니 오늘은 새로운 손님이 와 있었다. 프랑스인 넬슨은 왠지 우울해 보였다.
"오늘 오다가 두브로브니크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어..."
우리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술도 먹이고 말도 자꾸 걸었다. 그랬더니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다.
"야, 내일 내 친구가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내려서 여기로 오는데 분실물 센터에 가보라고 할까?"
"진짜? 부담 주는 건 싫은데 그냥 한 번 들러서 물어라도 봐줄 수 있을까?"
"물론. 여행자끼리는 도와야지."
#133 다 마시기 전까진 못 일어나지
"누나, 내가 기차에서 만난 사람이 스베티 스테판이라는 데를 꼭 가보라고 했거든. 오는 길에 부드바도 들렀다 오면 될 것 같은데 어때?"
"그래 오늘은 거기로 가보자."
스테판이 알려준 대로 우리는 스베티 스테판으로 향했다. 코토르에서 버스로 역시 1시간 거리. 오늘은 어제와는 반대로 도시의 남쪽으로 향했다.
스베티 스테판에는 스테판이 말했던 것처럼 작은 섬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대신 섬이 보이는 해변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다. 바닥에는 몽돌 해수욕장처럼 동글동글한 돌멩이들이 깔려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도로록 돌이 구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금주 누나에게 물수제비 뜨는 법을 가르쳐줬다.
"이게 돌을 잘 고르는 게 제일 중요하거든. 납작한 돌 빨리 몇 개 찾아봐."
돌을 고르다가 찹쌀떡같이 생긴 하얀 돌을 주웠다. 하지만 가방 무게가 늘어나는 건 원치 않기 때문에 도로 내려놨다.
"야, 잘 봐!"
그녀가 던진 돌은 두 칸을 못 튀기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에서 나와 해변에 앉아서 젖은 발을 말렸다. 볕은 따갑지만 가을이라 물은 꽤 찬데도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추운 데서 온 사람들인가 보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앉아 있다 보니 번뜩 '선크림 발라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났다. 여름이 지나며 선크림은 버렸다. 사실 여름이었다고 딱히 성실하게 바르고 다니지도 않았다. 피부를 생각하면 항상 발라야 하는데, 걱정은 하지만 귀찮은 게 먼저다. 그 덕에 내 얼굴에는 주근깨가 늘어가기만 한다.
스베티 스테판에서 부드바로 가는 길은 외길이다. 정류장의 버스도 언제 올 지 요원하다. 다시 말해 히치하이킹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
"에이 누나, 내가 진짜 차 잡을 수 있다니까."
길가에서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앞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다. 번쩍 치켜든 엄지손가락이 멋쩍었다. 한참을 길가에 서 있는데 부드바로 가는 버스가 왔다.
"너는 차 잡아서 타고 와라. 나는 배고파서 먼저 버스 타고 갈 테니까."
"아 왜... 같이 가요..."
허겁지겁 정류장으로 뛰어와 버스에 같이 올랐다.
부드바에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식당. 나는 빠르게 메뉴판을 훑는다. 비싸다.
"야, 내가 사줄 테니까 아무거나 시켜.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아까 물수제비 가르쳐준 값이야."
예의상 거절하는 척을 했지만 재차 권하는 그녀의 제안을 듣기로 했다.
"진짜 아무거나?"
우리가 주문한 요리가 나오고, 길을 가던 고양이 한 마리도 우리 테이블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식을 쳐다보는 모습이 '한입만' 하던 내 모습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문어와 감자튀김을 나눠줬더니 찹찹 맛있게도 먹었다.
부드바는 몬테네그로에서 코토르에 버금가는 인기 있는 관광지지만 나는 코토르가 더 좋았다. 코토르가 역사도시 느낌이라면 부드바는 휴양지 느낌이 더 짙다. 심지어 성벽을 올라가려면 돈도 내야 한다. 금주 누나를 성벽에 보내고 나는 광장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광장에서는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틀즈의 노래가 나오자 진심으로 돈을 내고 싶어 졌다. 펼쳐둔 기타 케이스에 1유로를 짤랑 소리가 나게 넣었다.
친구가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코토르로 돌아가 버스 터미널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의 학교가 있는 회기역 앞의 카페에서 헤어지고 난 뒤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현모는 4일 간 코토르와 두브로브니크를 나와 여행하기로 했다.
그가 탄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오고, 나는 현모를 보자마자 꽉 안았다.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갑네. 저녁부터 먹자, 배고프겠다."
그를 데리고 자신 있게 향한 곳은 그저께 갔던 그릴 하우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맛이다. 모둠 세트를 주문했더니 고기 요리가 계속 나와서 행복했다.
호스텔로 돌아가며 마트에 들러 맥주와 간식거리를 샀다. 맥주가 한 캔에 1유로였는데, 2리터짜리 페트병에 든 것은 1.7유로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냉큼 2리터짜리를 집어 들었다. 현모에게 맛을 보여준다고 이 지역의 전통주인 비냑과 라키야도 미니어처를 하나씩 샀더니 마음이 든든했다.
"어, 나도 맥주 사놨는데, 너희가 사 온 거랑 똑같네. 2리터짜리."
호스텔 거실에서 넬슨은 우리를 보자마자 자기가 사둔 맥주병을 꺼냈다.
"어제 얻어먹기만 해서 오늘은 내가 샀지. 뭐 잘됐네! 근데 다 마실 수 있겠지?"
우리는 거실에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던 금주 누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야, 나는 니가 친구까지 온다 해서 또 술 이만큼 사 왔잖아. 니가 어제 먹고 싶대서 블루문까지 사 왔는데? 오늘 이거 다 먹기 전까지 못 일어나는 거야."
같은 방을 쓰는 우리는 다 같은 생각이었다.
흥이 오른 우리는 방에서 책을 보던 디나라까지 거실로 불러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술을 앞에 놓고 모였으면 또 술 게임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술자리에 한국인이 세 명인 만큼 친구들에게 한국 게임을 이것저것 가르쳤다. 넬슨과 디나라는 프라이팬 놀이의 박자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저건 절대 안 될 것 같아."
대신 클래식 게임인 369게임은 모두 재밌게 했다. 몇 번을 도전했지만 우리는 결국 90을 넘기지 못했다. 자꾸 틀릴수록 술잔은 더 빨리 돌게 된다.
몇 시간 뒤 우리는 냉장고를 가득 채웠던 병들을 다 비웠다. 한국인들끼리 머리를 맞댔다.
"솔직히 좀 아쉽지 않냐?"
우리는 새벽 1시에 밤거리로 나갔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문을 연 가게가 있을까 술에 취한 채로 도시를 쏘다녔다. 불 꺼진 도시는 어두웠다. 마침 불이 켜진 호텔이 한 군데 보였다.
"혹시 지금 술 파는 데가 있을까요?"
호텔 리셉션의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