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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r 21. 2020

관광지의 환상_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나의 비단길 이야기-38

#134 목마른 고양이


 두브로브니크행 버스는 오후 5시, 코토르 요새에 못 가본 현모를 위해 다시 한번 산에 올랐다. 산에는 오늘따라 고양이들이 많았다. 나는 줄 만한 게 물 밖에 없었다. 빈 캔을 뒤집어 오목한 부분에 물을 따라줬더니 꿀꺽꿀꺽 계속해서 마셨다. 고양이는 물을 계속해서 마시더니 마침내 만족한 듯 그늘을 찾아 누웠다. 만족스러운 그 표정에 나도 뿌듯해졌다.  



 우리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여태껏 쌓인 얘기를 털어냈다. 군생활 2년 동안 가족보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라 할 얘기도 많았다. 항상 느꼈던 점이지만 후방 교육 부대의 할 일 없는 나날들을 좋은 사람들과 지내며 그나마 재밌게 보냈던 것 같다.

 "넌 요즘 뭐 하는데?"

 "지금은 프랑스에서 내일 저녁 반찬 걱정이나 하지. 근데 연말에 한국 돌아가면 나도 취업 준비 시작해야 되니까... 사실 안 그래야지 하는데 전역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급해지긴 해. 벌써 여자친구는 졸업해서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고. 그때는 다들 가니까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2년은 군대에서 그냥 버린 기분이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그는 인턴과 스펙, 영어 시험, 학점 때문에 바빠 보였다. 나는 그가 부대 소식지에 연재하던 만화를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났다.


 호스텔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금주 누나가 우리를 배웅해줬다.

 "이거 내가 크로아티아에서 쓰고 남은 돈인데 가져가.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거야."

 누나는 떠나는 내게 지폐 뭉치를 쥐어주었다. 밥을 얻어먹는 것과 돈을 받는 것은 조금 다른 기분이라 사양했지만 그녀는 어차피 많은 액수가 아니니 받아 두라며 재차 돈을 내밀었다. 두 번의 사양 끝에 나는 돈을 받았고,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진짜 잘 쓸게요. 누나도 남은 여행 즐겁게 보내고, 다음에 한국에서 만나!"

 우리의 어깨를 한 번씩 툭툭 치고 그녀는 다시 호스텔로 돌아갔다.


내놔


 몬테네그로와 크로아티아의 국경에서 지체되는 바람에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한 것은 예상 도착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 9시. 호스텔 체크인을 하고 아직 영업을 하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지도를 한참 찾은 끝에 늦게까지 문을 여는 피자 가게를 찾아냈고, 배고프고 지친 우리를 구원해줄 피자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뚝뚝해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비장하게 주문을 받았고, 우리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맥주와 피자 한 판씩을 주문했다. 아저씨의 손에 날라져 나온 노란 기름기가 돌던 피자는 접시에 잠깐 얹혔다가 우리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135 중세 스타일 테마파크


 "이거 뭐지? 비행기가 이렇게 갑자기 바뀔 수도 있나?"

 현모는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내일 아침 비행기지만 갑자기 운항 일정이 하루가 앞당겨졌다는 것.

 "저가 항공이라 그런가, 근데 취소 옵션이 없어서 타야겠다 그냥."

 그는 급하게 여행 마지막 날을 보내게 됐다. 그래 놓고 둘 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시간에 쫓기며 호스텔을 나섰다. 여기까지 왔으니 구시가지는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관광객들은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식상한 멘트로 홍보되는 이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러 스르지 산 전망대를 많이 찾는다. 하지만 그곳은 케이블카를 포함, 꽤 비싼 입장료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전망대를 이고 있는 산을 걸어 올랐다. 좁은 산동네 사이를 걷다 보니 중턱쯤 탁 트인 곳이 나왔다. 동네 뒷산을 등산하다 이런 곳이 나오면 내 집이 어디쯤인지 찾아보곤 했다. 비록 여기서는 평소보다 작게 보이는 건물들에 놀라워할 일은 없지만, 얇은 띠처럼 보이는 성벽이 얼마나 높을지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다.  


 구시가지에 다다라 공항버스 시간이 임박한 현모와 달리기를 하듯 길거리를 대충 훑어봤다. 그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주인공들의 얼굴이 박힌 기념품을 사고 싶어 했다.

 "몰랐어? 여기가 수도 킹스랜딩의 실제 촬영지래. 그래서 드라마 굿즈를 파는 가게들이 많은 거야. 시간만 있으면 천천히 구경하면서 하나 사고 싶은데 진짜 아쉽네..."

 공항버스를 타면서도 아쉬운 표정이 묻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닦달을 해서라도 아침부터 움직일 걸. 떠나는 현모에게 막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벽 한 편의 맥주 박스

 

 그렇게 현모와 헤어지고 나는 다시 성문을 통과해 올드타운으로 들어왔다. 입구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좁은 길을 따라 단체 관광객이 몇 팀이나 줄지어 지나갔다. 한국인 무리가 보여 가이드 아저씨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조금 떨어져서 주워 들었다. 하지만 이내 지루해졌다. 저런 설명은 구글에 치면 다 나온다. 오늘은 여름처럼 더워서 그늘을 찾아가 앉았다. 비록 꽃잎이 시들해지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협죽도가 아직 피어있어서 반가웠다. 이 꽃은 지중해 근방에서 많이 봤는데, 우리나라의 백일홍처럼 여름에만 피고 가을이 깊어갈 때쯤 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백일홍을 못 봤다. 학교 화단에 핀 것도 좋지만 몇 년째 선운사의 백일홍을 보러 가겠다고 벼르기만 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에 오면 다들 올라가는 도시를 감싼 거대한 성벽. 매표소에서 알아본 티켓은 20유로였다. 여행 초반 중국의 막고굴이나 진시황 병마용에서나 그 정도 금액을 썼지, 여행 후반인 지금 그 정도 출혈을 감당할 여유가 없다. 성벽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제학생증을 제시하면 7유로에 학생 티켓을 끊어준단다. 나는 안 보고 안 쓰기를 택했지만, 어쨌든 사람은 아는 게 많아야 돈을 덜 쓴다.

 성벽 투어를 포기한 대신 골목길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올드타운 내에 숙박업소가 얼마나 많은지, 거의 모든 건물이 '방 있음(Room for Rent)'을 써붙이고 있었다. 혹은 기념품 가게나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카페가 길을 차지하고 있거나. 도시 전체가 관광객을 위한 거대한 테마파크가 된 것 같다. 이 도시가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한때 크로아티아에서는 반 관광객 정서(Anti-Tourism)가 일기도 했다. 외부 자본이 들어오며 치솟은 물가와 임대료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은 점점 성문 밖으로 밀려나게 됐고, 그러한 정서가 퍼지게 된 것. 실제로 관광객이 비교적 적은 북부와 비교했을 때 많게는 50퍼센트 이상 물가가 차이 난다고 한다. 몬테네그로에서 막 넘어온 내게 크로아티아의 관광지 물가는 서유럽처럼 비쌌다. 성벽 바깥에 있는 호스텔을 향해 도로변을 걸으며 관광객들 때문에 성 밖으로 밀려나야 했던 사람들 생각을 했다.   


#136 두브로브니크에서 킹스랜딩으로


 현모가 쓰던 침대에 짐을 풀던 지오반니, 그는 에콰도르 출신이다. 아침부터 분주한 모습에 어딜 급하게 가는지 궁금해졌다.

 "오늘은 뭐 할 건데?"
 "난 어제 투어를 예약해놔서 거기 가려고. 너는?"

 "오 무슨 투언데? 난 오늘 보스니아로 넘어가는데 버스 시간이 오후 늦게라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어."

 "너 왕좌의 게임 봤어? 여기가 촬영지인 건 알지. 그래서 그 드라마 현장 스태프였던 사람이 주요 촬영지를 가이드해주는 투어야."

 야간기차에서 밤을 새우며 보던 왕좌의 게임, 심지어 주요 무대인 킹스랜딩을 둘러보는 투어라니.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혹시 이거 미리 신청하는 거야? 나도 가고 싶은데 너 따라가도 될까?"

 "상관없을걸? 어차피 무료 투어라서 신경도 안 쓸 거야. 같이 준비해서 나가자!"



 도착한 미팅 포인트에는 이미 열댓 명가량의 투어 참가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석을 다 부르고 나는 가이드님께 쭈뼛쭈뼛 다가가 참여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물론이죠. 지오반니 친구라구요? 그럼 여기 표시만 해 둘게요."

 나는 아직 보는 중인데, 다른 투어 참가자들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드라마를 본 열렬한 팬들인 것 같았다. 드라마 속 장소가 나올 때마다 스토리를 줄줄 외우고, 장면 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그 덕에 아직 보지 못한 시즌의 스포일러를 살짝 당해버렸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여기가 바로 그 블랙 워터 베이(Black water bay)에요."

 "그럼 여기가 스타니스의 침공 때 지옥의 불이 타올랐던 곳인가요?"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왕좌의 게임을 좋아하지만 광팬은 아니었던 나와 지오반니는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드라마 캐릭터와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점점 두브로브니크를 킹스랜딩으로 치환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가이드님이 보여주시는 사진 속 드라마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을 덧씌웠기 때문에 그 속에서 지금의 두브로브니크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촬영 시즌에는 현장 스태프로 일했다는 그녀의 설명에 우리는 더 몰입해서 들었다. 특히 촬영지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 가령 어떤 배우가 인성이 좋은지, 누가 실제 성격이 더러운지 같은 뒷담화를 맛깔나게 풀었다.


 2시간 정도 구시가지 속 촬영지를 둘러보고 팁박스에 팁을 넣는 절차를 거쳐 투어가 마무리되었다. 아침도 안 먹고 나온 나와 지오반니는 배가 고팠다. 하지만 성 안에 있는 식당들은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억 소리 나게 비쌌다. 메뉴판을 쓱 훑어보고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성 밖으로 향했다. 옛날 한양에서도 사대문 안에는 부자들만 살 수 있었다지. 성문에서 멀어질수록 물가는 조금씩 떨어진다. 우리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찾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남자애들 둘이 친해지기 쉬운 이야기는 분명 축구 얘기다. 그도 축구팬이었는데, 우리는 지나간 월드컵 이야기부터 에콰도르의 스타 안토니오 발렌시아, 한국의 손흥민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비행기가

싸 충동적으로 4일 일정으로 왔다는 그는 혼자 여행은 처음이라 많이 어색하다며 웃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혼자 여행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혼자보다는 둘이 다니는 게 더 좋거든."



 지오반니를 보내고 버스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갔다. 크로아티아의 월경지인 두브로브니크 특성상 보스니아로 가려면 국경을 두 번 넘어야 했다.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제복을 입은 검문소 직원들이 버스에 올라 여권을 걷어가고, 얼마 뒤 다시 나눠주는 방식으로 검사를 했다. 버스에서 내릴 필요도 없을 만큼 간단한 심사였지만 두 번을 반복했더니 꽤 번거롭게 느껴졌다.

 내가 향하는 모스타르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발칸 지역을 여행한 친구가 꼭 가야 한다며 추천을 해줘서 오게 됐다. 저녁쯤 도착한 모스타르는 두브로브니크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모스크와 뾰족이 솟은 미나렛이 보이고, 한동안 못 보던 케밥 가게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국민의 반 이상이 무슬림이라는 보스니아는 동유럽보다는 터키 느낌이 물씬 났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모두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나라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다른데 유고슬라비아라는 한 나라로 퉁 쳐서 몇십 년을 살아왔다니,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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