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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r 29. 2020

이탈리아 대학생들이 노는 법_마체라타, 이탈리아

나의 비단길 이야기-40

#141 벽돌 마을 몬테코사로


 프란체스카와 카페에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레디치아, 시모나가 차례로 카페로 들어왔다.

 "챠오!!"

 이탈리아 친구들답게 호들갑스럽게 양 볼에 쪽 소리를 내며 인사를 했다. 이 세 친구는 이 근처 카메리노에 있는 대학의 같은 과에서 생물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카의 집이 항구에서 가까워 먼저 나와있었던 것.

 "그럼 레디, 시모 너네 집은 어딘데?"

 "난 파브리아노, 여기서 별로 안 멀어. 시모나는 나폴리 근처, 떼로니(Terroni)인 셈이지 하하"

 "떼로니? 그게 뭔데?"

 "약간 촌놈이라는 뜻고 있고, 은어 같은 건데 남부 지방 사람들을 농담처럼 그렇게 불러. 근데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말이 많은 친구들의 수다에 치이며 카푸치노를 마셨다. 중국에서 헤어진 이후 여기까지의 내 여정에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없었다. 손을 바삐 움직이며 각자 할 말만 하는 이 친구들 옆에서 나도 점점 손이 올라가며 리액션이 커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프란체스카의 부모님을 뵙고, 할머니 댁에서 하루 신세 지기로 했다. 그녀의 집이 있는 몬테코사로로 차를 몰고 갔다.

 "우리 집? 그냥 작은 마을에 있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도착한 곳은 여느 관광지에도 밀리지 않을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몬테코사로는 올록볼록한 구릉 지대 사이에 솟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넓적한 돌이 깔린 길이 오래된 집 사이로 나 있었다. 집들은 살짝 분홍빛을 띠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데다 창문에는 빨간 꽃까지 걸어놔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건물 같은 통일감이 느껴졌다.   


 프란체스카는 우리를 데리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슬픈 소식이 있었는데, 그녀의 할머니께서 약 2주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 중국에서 프란체스카를 만났을 때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기도 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깜짝 놀랐다.

 "괜찮아, 그전부터 편찮으셔서 다들 준비하고 있었어. 물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지만."

 "응...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편히 쉬시길 바랄게."

 그녀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괜히 집에서 신세를 지기가 미안했다.    


 

 할머니 집은 프란체스카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곳이었다. 마중 나오신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내가 쓰게 될 방은 어머니께서 결혼 전까지 쓰시던 방이었는데, 방에는 어머니의 어릴 적 장난감부터 가구까지 그대로 남아있어서 마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벽장 가득 놓인 옛날 인형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웠다. 특히 나무로 만든 삐에로 인형은 관절까지 움직이는 디테일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다른 커다란 인형들 뒤로 슬쩍 안 보이게 놔두었다. 내일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있으면 어떡하지? 공포 영화의 클리셰가 떠올라 자꾸만 벽장을 흘끔거렸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약국에서 사 온 베드버그 약을 발랐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가렵다. 내가 벗어둔 옷은 비닐에 싸 어머니께서 바로 세탁을 해주셨다. 베드버그가 옮으면 모든 짐을 세탁해야 한다지만 나는 일단 입고 있던 옷만 해보기로 했다. 나갈 채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왔더니 프란체스카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다 요리는 못하거든, 진짜 내 손으로 처음 파스타 만들어보는 거야. 그래도 니가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파스타 정도는 해줘야지 않을까 싶어서."

   


 뒷정리를 해두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마체라타로 나갔다.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 마체라타는 대학생들이 모이는 젊은 도시 느낌이 난다. 광장에서는 프란체스카의 친구 마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테오예요."

 한국어를 배운다는 그는 작년 여름 성균관 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 강좌를 들었다고 했다.

 "저한테 한국말로 말해도 괜찮아요."

 유튜버 올리버쌤을 닮은 마테오는 발음도 그와 비슷하게 했다. 한국어를 아는 외국인과 한국말로 대화하기가 오히려 더 어색하다. 음절 단위로 내 말이 버벅댔다.   



 우리는 길가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젤라또와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마테오와 프란체스카는 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지나다니는 친구들이 하나둘 합류하더니 야외테이블 전체를 우리가 차지하고 앉았다.

 "이따 집에 가면 엄마 아빠가 저녁 해주실 거야. 그때 많이 먹어야 되니까 여기서는 너무 많이 먹지 마."

 감자칩을 집어먹는 나에게 프란체스카가 귀띔을 해줬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친구들이 온다고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대서 우리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신다고 분주하셨다. 부엌에 있는 화덕에 불을 땠는지 집이 따뜻했다. 우리가 아페테리프를 마시고 있을 동안 아버지께서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를 꺼내 주셨다. 곧이어 어머니의 요리가 나오고 감자, 모짜렐라, 올리브, 햄, 아티초크 등 갖가지 재료들이 들어간 모둠 튀김을 먹느라 우리는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좀 걸을까?"

어머니께서 끊임없이 권하는 접시들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우리는 식탁을 일어날 수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라 이 시간까지 문을 연 가게도 없고, 길에 다니는 다른 사람도 없었다. 10월 말이지만 아직 추운 밤은 아니었고, 공기는 기분 좋게 선선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프란체스카가 앞장서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는 내가 어릴 때 그네 타던 곳이고... 여기는 엄마 아빠가 결혼한 교회고...'  

 우리는 그녀의 크고 작은 인생사를 담은 장소들을 함께 돌아보며 동네를 걸었다. 국적도, 성별도 다른 그녀의 이야기지만 사람 사는 건 커다란 무언가를 꿰뚫는 닮은 점이 있다. 우리 동네 생각이 났다.  



#142 심심한 대학생들 따라가기


 몬테코사로에서 하룻밤을 지낸 우리는 친구들의 대학교가 있는 카메리노로 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카메리노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차를 타고 조금 나가면 대학교 셔틀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프란체스카 아버지께서 태워주시는 차를 타고 셔틀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랐다. 나는 비록 이 대학교 학생은 아니지만 교환학생인 척 자연스럽게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니 모든 눈동자가 일제히 나에게 쏠린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프란체스카가 자리를 찾아줘 다행히 배낭을 내려놓고 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식 아침식사


 우리의 이탈리안들은 아직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셨다며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구내 카페로 향했다.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털어 넣고 나서야 이 친구들은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카메리노는 원래 보여줄 게 없지만, 지금은 더 없어. 2년 전 지진이 나서 도시가 무너져 내렸거든. 대학교는 어찌어찌 복구를 했는데 아직 시내에는 무너진 건물이 많아서 통제된 구역도 많아. 이따 한 번 같이 나가보자. 어떤 상태인지 보여줄게."

 친구들을 따라 시내로 나갔다. 레디치아의 말대로 어떤 길목은 경찰과 군인에 의해 접근 자체가 차단되어 있었다.

 "그럼 너네들 지진 당시에 학교에 있었겠네?"

 "말도 마, 진짜 인생에서 처음으로 지진이란 걸 느껴봤는데 하필 그렇게 큰 지진이라니. 책장에서 책이 다 떨어지고 컵이 깨지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지진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겪었던 지진이 생각났다. 2017년 11월 말년 병장이었던 나는 후임 병사들을 데리고 창고에 숨어 마피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혼비백산한 우리는 무작정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벌컥 사무실 문을 열자 간부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나 의자 아래에 엉거주춤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픽 나왔다. 그때의 해프닝을 떠올리며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줬다. 하지만 별로 재미는 없는 모양이다.

 


 "오늘 내 친구 생일인데, 괜찮으면 같이 안 갈래?"

 공원에 앉아 점심으로 파니니를 먹는 도중 레디치아가 우리에게 물어왔다. 우리까지 다 초대를 해줬다며 같이 가자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기숙사에서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이 모여있다는 피제리아로 향했다. 어색하게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버섯과 햄이 들어간 피자를 저녁으로 먹었다. 그들은 짙은 눈 화장에 가죽 재킷을 입은, 말수가 적은 친구들이었다. 수다스럽던 프란체스카도 낯을 가리는지 조용히 피자를 뜯어먹었다.



 초등학생 생일 파티처럼 둘러앉아 각자 접시에 놓인 피자를 먹었다. 배를 채우고 이제 본격적인 어른의 생일 파티를 하러 술집으로 향했다. 조그만 동네인 카메리노에 거의 유일한 술집이라는 곳. 클럽은 아니지만 12시가 지나면 테이블을 물리고 클럽처럼 변신한다며 벌써부터 음악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친구의 생일 케이크도 불어주고, 술도 나눠마시면서 앉아있었다. 눈치를 보니 다들 적당히 술을 마시며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피크 타임이 12시부터란 말이지... 나도 덩달아 손목시계를 흘끔거렸다.

 "야,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프란체스카가 나와 레디치아, 시모나를 불러 모았다. 우리는 잠시 무리에서 빠져 거리로 나갔다.

 "이거 너 오면 까려고 기다렸잖아, 저번 달에 로마에 갔을 때 아시아 마트에서 샀어. 소주병 까는 거 다시 보여줘."

 프란체스카는 씨익 웃으며 큰 비밀을 꺼내듯 핸드백에서 초록색 소주병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참이슬, 심지어 빨간 뚜껑이다. 이런 무서운 건 어디서 구해오는지. 그녀의 요청에 따라 소주병을 요리조리 돌리며 멋있게 병을 따는 퍼포먼스를 다시 보여주고 여섯 달 전 시안에서처럼 병을 서로에게 건네며 계단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한국 술, 조금은 그리운 맛이 있을까 싶었지만 첫 모금부터 소주는 그냥 소주 맛이었다. 인상을 찡그렸다.

     


12시가 가까워질수록 술집은 사람들로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심심한 카메리노의 대학생들이 유일하게 모이는 장소야. 뭐, 다들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들이니까. 나는 이 동네 출신이 아니라서 모르는 사람이 많아. 레디치아나 프란체스카는 여기 출신이잖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하러 다니기 바쁜 그들을 대신해 시모나가 옆을 지켜줬다. 나만 빼다들 아는 사람인 같아 부담이 됐다. 침을 꿀꺽 삼켰다.

 "시모, 내 옆에 꼭 붙어있어줘 제발..."

 다시 들어간 술집은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음악이 빨라지고 사람들이 춤을 췄다.

 "챠오, 어디서 왔어? 차이나?"

 "아니, 얘는 한국인이고 우리 친구야."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많이 걸었고, 시모나는 그때마다 나서서 이탈리아어를 통역해줬다. 사진을 같이 찍자는 요청이 많아서 일일이 사진을 찍어줬다.

 "너 사진 내일 아침에 우리 대학교 페이스북 그룹에 엄청 올라오겠다. 나도 이 술집에서 아시아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다들 니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이런 촌구석에는 뭐 하러 온 건지."

 "에, 여기가 촌구석이라니, 떼로니인 니가 할 말은 아니잖아?"
 "... 나중에 니가 내 고향에 오면 마피아를 불러서 담가버릴 거야."


     

#143 앵그리 시모나


 2시간은 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페루자로 향하는 첫 차를 타기 위해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나왔다. 도로 위에는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었다. 차가운 가을 아침 저수지 위로 번지는 물안개처럼 진했다. 앞이 보이질 않아 숨까지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역시 안개 때문인지 이른 아침부터 페루자로 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두 자리씩을 차지하고 발을 뻗고 앉아 잠이 들었다.  



 요즘 페루자는 초콜릿 축제가 한창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가 예약한 숙소까지 걸으며 가판대에서 초콜릿을 주섬주섬 주워 먹었다. 한국에서는 모르겠지만, 유럽에서는 꽤 유명한 축제인 것 같았다. 페레로 로쉐(Ferrero Rocher), 로아커(Loacker) 같은 이탈리아 브랜드뿐 아니라 , 토블론(Toblerone), 고디바(Godiva)와 같이 유럽 다른 지역에서 온 초콜릿 회사들도 부스를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원래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쁜 포장지에 싸인 다양한 맛의 초콜릿은 한 움큼씩 주워 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최악이었다. 페루자에 남자 친구가 있는 레디치아를 빼고 나와 시모나, 프란체스카 셋이서 쓸 방이었는데 사진과 너무나 다른 숙소의 모습에 우리는 잠깐 넋이 나갔다. 방 주인인 중국인 아저씨는 서둘러 열쇠를 쥐어주고 떠나버리고, 우리는 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갑자기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침대에는 시트도 끼워져 있지 않아 매트리스의 곰팡이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보였고, 이불에는 쥐오줌 같은 누런 얼룩이 져 있었다. 부엌은 씻지도 않은 그릇과 사용하고 남은 중국 식재료들이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지저분한 아파트에서 앉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방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한 게 아니라 어떻게 환불을 받을까 궁리를 했다.    


 "이건 사기야, 저 중국인은 우리한테 사기 친 거라니까. 당장 전화기 줘봐. 내가 전화해서 여기로 오라고 할게."

 시모나가 총대를 멨다. 어눌하게나마 이탈리아어를 하는 주인을 불러 세워두고 대뜸 그에게 단어들을 쏟아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만 봐도 시모나가 그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그녀의 기세에 눌린 듯 곧바로 지갑을 꺼내 현금으로 환불을 해줬다.

 "너 아까 그 아저씨한테 뭐라고 했어?"

 방을 나와 시모나에게 물었다.

 "별 말 안 했어. 그냥 방이 별로라고 환불 처리해달라고 물어봤는데?"

 "에이, 시모나! 거짓말하지 마. 얘 아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첫마디가 지금 엄청 너한테 욕하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다, 였어. 중간중간에 그래서 우리가 말렸잖아. 진짜 화나면 무섭다니까."

 평소에 나는 곱슬머리가 북슬북슬한 시모나가 영화 <주토피아>의 순한 양이지만 악당인 '벨 웨더'를 닮았다며 놀리곤 했는데 오늘 본 그녀의 모습은 총을 든 벨 웨더 같았다. 이런 친구가 같은 편인 것만큼 다행스러운 게 없다.


벨 웨더 _출처 Google image


 돈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우리는 잘 곳을 잃었다. 특히 요즘은 초콜릿 축제 시즌이라 이곳에 숙소를 잡기도 힘들다. 우리는 갈 곳이 없어 도로의 연석에 앉았다.

 "내 친구가 여기 사는데 한 번 물어나 볼까? 우리 다 재워줄 수 있는지."

 "그 방법밖에는 없겠는데? 아니면 지금 아예 빈 방이 없어."

 프란체스카의 전화를 받고 리카르도는 곧 차를 몰고 왔다.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리카르도를 보자마자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헬스 트레이너인 그는 탄탄한 몸이 공들여 깎은 얼굴을 받치고 있는, 로마 시대 조각상 같았다.  



 그는 네 명의 다른 친구들과 셰어하우스에 지내는데, 마침 두 명이 고향에 내려가 빈 방이 있다며 흔쾌히 우리를 받아줬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프란체스카의 친구를 한 명 소개받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럼 너희 짐은 지금 내 차에 미리 실어놔. 저녁에 내가 일 끝나고 다시 여기로 너희를 데리러 올게."

 그는 짐을 싣고 먼저 떠나고, 우리는 못다 한 페루자 관광을 마저 하기로 했다.   

 "그럼 초콜릿이나 좀 더 먹을까?"

 게으른 관광객인 우리는 어슬렁거리며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어 우리를 데리러 온 리카르도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옅게 쌉쌀한 대마초 냄새가 배어있었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다른 플랫 메이트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학생 알레시오와 세리에D에서 뛴다는 축구선수 다니엘레. 비록 영어는 잘 통하지 않았지만 내가 재워줘서 고맙다며 내민 라면에 '나루토!' 라며 젓가락으로 면을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남자애들끼리 모여 앉아 우리는 나루토, 원피스 같은 만화와 축구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로마의 전설 프란체스코 토티를 좋아한다는 다니엘레는 자신이 실린 스포츠 신문 기사 스크랩을 보여줬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단어인 'Goal'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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