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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r 23. 2020

편 가르기의 비극과 그 흔적_모스타르, 보스니아

나의 비단길 이야기-39

#137 유림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녁 어스름 마저 사라지고 밤이 찾아올 무렵 나는 여전히 모스타르의 골목길을 헤매고 있었다. 구글 지도에 표시된 호스텔은 분명 이 근처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그때 모퉁이에서 쓰레기를 버리던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혹시 호스텔 찾고 있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기가 호스텔 주인이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웃었다.

 "저기 그런데 내가 지금은 바빠서 말이야. 체크인은 이따가 해줄게. 마침 오늘 숙소에 한국인이 한 명 더 있거든? 내가 아까 너가 곧 올 거라고 얘기해줬더니 너 기다리는 것 같더라. 얼른 들어가 봐. 모퉁이 돌아서 회색 대문이 우리 호스텔이야."

 삐걱대는 대문을 열고 들어간 호스텔은 아담했다. 좁은 안마당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역시 한국인 한 명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찾기가 좀 힘드네요 하하"
 유림 누나는 척 보기에도 장기 여행자의 느낌을 풍겼다. 목이 살짝 늘어난 티셔츠와 슬리퍼, 그리고 안마당에 주렁주렁 널려있는 그녀의 빨래까지.

 "오늘 여기 투숙객은 저희 둘인 거 알아요? 아까 주인아저씨가 한국인만 둘이라며 신기해하던데. 그러니까 짐은 아무 침대에나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따라 빈 침대에 짐을 풀고 다시 안마당에 나와 앉았다. 배가 고파서 가방에서 시리얼을 꺼냈다. 우유가 없어서 물에 시리얼을 잔뜩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설마 그거 저녁밥으로 먹는 거예요?"
 "네. 배는 고픈데 먹을게 이것밖에 없어서..."

 "사실 아저씨가 밤에 한국인 손님이 한 명 온다길래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저녁 제가 살 테니까 같이 나가서 먹을래요?"

 나는 당장 일어나 곤죽이 된 물에 만 시리얼을 변기에 쏟아부었다.


 "네? 2년째 여행 중이시라고요?"
 "네, 그렇지만 뭐 글 쓰는 사람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돌아다니는 거지. 여행 2년 차라고 하면 다들 그렇게 오해들을 하셔서."

 자리를 잡은 식당에서 비로소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2년이 다 되어간다는 그 여행 이야기는 들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혼자 여행하면 밥 제대로 못 먹고 다니죠? 저도 대학생 때 배낭여행할 때 그렇게 다녔는데, 이제는 그래도 밥은 잘 먹고 다녀야겠더라고요. 오늘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먹어요."

 유림 누나는 3인분을 시켜 2인분을 내 앞에 밀어주었다. 나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바베큐와 야채 볶음을 부지런히 먹어치웠다.  



 "밥도 먹었으니까 자리 옮겨서 술이나 한 잔 마실까?"

 "네 저는 좋죠."
 우리는 길가에 보이는 바에 들어가 앉았다. 야외테이블까지 손님들로 가득 찬 곳이었고, 바텐더는 우리에게 주문을 받았다.  '바텐더가 조금 쌀쌀맞네.'라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옆에서 유림 누나가 바텐더를 불러 세웠다.  

 "헤이, 혹시 오늘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아니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놀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에게 유림 누나는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저런 것도 일종의 인종차별일 수 있거든. 너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바로바로 따져야 자기들이 잘못한 줄 알아. 우리가 그냥 넘어가잖아? 그러면 그다음에 여기 올 동양인들한테도 똑같이 대할 거야. 쟤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 보다, 하면서. 그러면 상황은 바뀌는 게 없지. 쟤네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해."      

 나도 여행을 하며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해 불이익을 본 적은 아직 없지만 특히 이란이나 터키 동부 같이 동양인을 잘 보기 힘든 곳에서 기분 나쁜 시선을 받는다거나, '치니' 혹은 '치노'(중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 같은 말을 들은 적은 있다. 생각해보니 난 특별히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사자들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지 내가 돌아보면 숨어버리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며 말을 내게 슬쩍 들릴 정도로만 흘렸기 때문에 누구에게 따지기 조금 애매했던 것도 있지만.
    


 같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앉은자리에는 빈 잔이 쌓여만 갔다.

 "이제부터 더블로 달라고 해야겠다. 바텐더한테 진 두 잔 더 추가해줄래? 더블샷으로 그냥 큰 잔에 부어달라 해."
 밥을 얻어먹었으니 술은 내가 내겠다고 미리 말해뒀지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 잔에 얼마였더라,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런 내 마음이 읽혔는지 화장실을 다녀오자 유림 누나가 계산을 마치고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 누나 왜 먼저 계산하셨어요... 제가 낸다고 했는데..."

 "아니야. 나도 학생일 때 여행하면서 만난 분들한테 많이 얻어먹고 다녔어. 너도 나중에 입장이 바뀌면 또 그 친구들한테 사주고 그러면 되는 거지."

 멋있는 말이다. 나는 여행 선배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안 물어봤네. 넌 모스타르 다음에는 어디로 가?"
 "저는 여기 4일 있다가 스플리트에 들러서 배 타고 이탈리아로 넘어가요. 누나는요?"

 "난 어제 왔으니까 내일 두브로브니크로 가거든. 넌 거기서 왔지? 아쉽다. 거기서는 에어비앤비를 빌려놨는데 그때 만났으면 한국 요리도 많이 해줄 수 있을 텐데. 한국 음식 먹고 싶지?"

 "당연하죠. 한국 음식 말고도 아시아 요리면 요즘 다 안 가려요."

 "그럼 이거 좀 가져가. 너 보니까 왜 이렇게 안쓰럽냐."

 그녀는 배낭 깊숙이 까만 비닐봉지를 꺼내 양념장, 고춧가루, 라면 같은 것들을 주섬주섬 내게 건네줬다.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죄송했지만 붉은색의 라면 포장지를 봤더니 반사적으로 입에 침이 고였다.  



#138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


 모스타르는 어젯밤에도 잠깐 걸었지만 아기자기한 마을 정도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그쪽이 마음이 더 편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낯선 곳보다 익숙한 장소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식당을 갈 때도 이곳저곳 맛집 탐방을 하기보다는 한 가게의 단골이 되는 쪽이 좋다. 작은 공간을 빨리 익숙하게 만들고, 편하게 지내다 가고 싶다.

 유림 누나를 보내고 모스타르의 상징, 스타리 모스트를 보러 나갔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구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오래된 길에는 오돌토돌한 돌이 깔려있어 터지지 않는 뽁뽁이를 밟고 걷는 기분이었다. 길을 따라가면 보이는 커다란 아치를 그리는 다리는 역시 관광객들로 붐볐다. 다리 양쪽으로는 기념품과 케밥, 커피를 파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모여있다.



 이 다리는 16세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전설적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학생의 패기인지 다리는 꽤 높은 두 강둑을 아슬아슬하게 잇고 있다.

 다리 위에는 수영복만 입은 아저씨들이 관광객들에게 모금을 하고 있다. 목표 금액이 모이면 갑자기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다. 가을이라 물도 찰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돈을 내지는 않았지만 아저씨들의 점프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아찔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이 다리의 옛날 모습이 박힌 엽서를 팔고 있었다. 그중 다리가 부서진 사진도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졌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발한 내전 1993년 크로아티아군이 이곳에 포격을 가했고, 그때 이 다리 또한 무너져 내린 것. 끔찍한 비극이었다. 다행히 다리는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은 유네스코에 의해 2004년 복원됐다.  


 

 다리만 놓고 봐도 아름답지만 다리를 둘러싼 풍경이 더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대부분 기념품 가게가 돼버렸지만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 옛날 마을 같다. 이 도시는 헤르체고비나 지방의 비공식적 수도라고 한다. 흔히 보스니아라고 불리는 이 나라의 정식 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라는 두 나라가 합쳐진 연방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 공화국의 연방제 국가다. 세르비아 계열의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단일 국가수반도 없이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다.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독립한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 역시 보스니아로부터 분리독립 이야기가 여전히 나오고 있어 여전히 '유럽의 화약고'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139 편 가르기의 비극과 그 흔적


 크로아티아와 비교했을 때 이곳은 물가가 아주 인간적이다. 마트에서 장을 잔뜩 봐 호스텔 부엌의 공용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고 호스텔에서 먹고 마시며 며칠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면 동네 산책을 하며 저녁거리를 사 왔다. 시내 쪽에 맛있는 뵤렉 가게를 발견하고 자주 들렀다. 뵤렉은 발칸 지역에서 많이 먹는 음식으로,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 얇은 반죽 사이로 고기나 치즈, 감자 같은 속재료를 넣은 뒤 돌돌 말아 만든다. 이곳에서는 마치 김밥 천국처럼 뵤렉 가게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스타리 모스트 근처는 복원이 잘 돼서 티가 안 나지만, 시내 쪽으로 조금 나가면 아직 많은 건물들이 전쟁에 상한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벽에 총알 자국이 패인 것은 기본이고, 아예 폭격을 맞아 지붕이 무너져 내린 채 잡초가 무성히 덮여 있는 건물도 있었다.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은 90년대 초반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 이곳에는 그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일명 '스나이퍼의 빌딩'으로 불리는 이곳은 전쟁 당시 저격수들이 이 빌딩에 올라 총을 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높은 건물이 흔치 않은 이곳에 우뚝 솟은 커다란 이 건물은 현재 입구가 단단히 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낙서로 뒤덮인 담장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붙어있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던 시기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계, 무슬림인 보스니아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로 나뉜 이 나라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곧이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전쟁범죄로 꼽히는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보스니아계 주민대한 인종청소가 벌어졌고, 수만 명의 사람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학살당했다. 어제의 이웃이 갑자기 총칼을 차고 나타나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군홧발로 다른 이웃들을 짓밟았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가해자들의 이름이 뭔지, 가족이 누군지, 주말에는 무얼 하는지까지 알 정도였다니, 황순원의 소설 <학> 속에 나오는 두 친구 성삼이와 덕재가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는 성삼이가 붙잡힌 덕재를 풀어줬지만, 이곳에서는 그 이웃들을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생각하니 사람이 너무 잔인해 소름이 끼쳤다.



 어떤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국가와 민족, 종교 혹은 이념, 요즘에는 세대와 성별까지. 누군가의 허울 좋은 말에 휩쓸려 상대방을 미워하고, 개인이 집단이 되면서 개개인의 인격과 도덕은 집단의 광기 뒤로 숨어버린다. 이런 집단의 꼭대기에는 갈등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도대체 민족이 뭐고, 종교가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혐오의 물결에 휩쓸려버린다. 존중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총질을 해대던 각진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나는 20년 전의 총알 자국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무서웠다.    


#140 빈대와의 하룻밤


 모스타르를 출발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닿았다. 배의 출발 시간에 맞춰 승선 절차를 마치고 선실로 들어갔다. 스플리트를 출발해 이탈리아의 앙코나로 향하는 마르코폴로호. 12시간이 걸리는 항해지만 침대칸이 너무 비싸 비행기 좌석 같은 지정 좌석 티켓을 샀다. 하지만 가을이라 승객이 많이 없어 내 주변 자리들은 텅텅 비어있었다. 의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갈 수 있겠구나, 기지개를 쭉 폈다.    



 "학생, 혹시 여기 오기 전에 어디 있었어요? 오늘 청소하다가 학생 침대 시트 밑에서 베드 버그가 나와서요. 우리 호스텔에는 원래 베드 버그가 없는데 혹시 학생 짐에 묻어 나왔을 수 있으니까 조심해요."

 코토르의 코리아 호스텔에서 한 번 주인아저씨가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도 몸 구석구석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증상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는데, 갑자기 오늘 오후부터 팔다리가 모기에 물린 듯 가렵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심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가 옷을 벗고 몸을 확인했다. 빨갛게 벌레 물린 자국들이 줄지어 부풀어 올라 온몸으로 번져 있었다. 모기와 다른 베드 버그의 가장 큰 특징은 물린 자국이 줄지어 있다는 점, 빈대는 혈관을 잘 찾지 못해 피가 나올 때까지 기어가며 피부를 깨물기 때문이라는 말이 기억이 났다. 하필 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 내 옷 안에서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화장실에서 옷을 벗어 털어도 보고 벌레가 있나 뒤집어서 살펴도 봤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빈대 붙고 다니다가 진짜 빈대가 옮아버렸다.  


 최대한 가려운 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잠들 수도 없는 끔찍한 밤을 보냈다.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갑판으로 나가 찬 바닷바람을 맞았다. 모기의 가려움이 10이라면 빈대는 100 정도 되는 것 같다. 다른 여행자들에게서 베드 버그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항상 당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화장실과 갑판을 부지런히 오가는 와중에도 어쩌다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 배는 이탈리아에 도착해 항구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잊고 있던 가려움이 다시 도지기 시작해 차라리 다시 잠들고 싶었다.


 중국 시안에서 같은 호스텔에 묵으며 며칠간 동행했던 이탈리아 친구들 프란체스카와 레디치아, 시모나. 며칠 뒤 친구들은 교환학생을 하던 창춘으로, 나는 란저우로 떠나며 가을에 내가 유럽에 오면 이탈리아에서 꼭 보자며 약속을 했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페리 터미널로 프란체스카가 마중을 나왔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터미널에서 나는 그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달려왔다.

 "챠오, 프란체스카. 너 그대로네?"

 "당연하지! 여섯 달밖에 안 지난걸."

 그 여섯 달 동안 나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그 시간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재차 그녀에게 나는 변한 게 없냐며 물었다.

 "음, 조금 탄 것 같기도?"

 "그건 그렇겠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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