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분배란?
고렝(이반 마사귀)는 수직으로 설계된 감옥 48층에서 깨어난다. 한 층에는 2명씩 수감되며, 가운데 플랫폼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음식이 배급된다. 고렝와 같은 층에 수감 중인 트리마가시(조리온 에귈레오르)는 과실치사죄로 1년형을 선고받고 시설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렝은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6개월간 시설에 들어가기로 자원한 것이었다. 트리마가시는 고렝에게 감옥의 규칙 등을 일러준다. 고렝은 위에서 내려온 음식을, 남이 먹다 남긴 것이라며 역겨워하지만 허기를 참지 못하고 허겁지겁 먹는다.
30일 뒤, 층이 재배치되고 고렝은 171층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이미 침대에 온몸이 묶인 채였다. 171층까지 음식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트리마가시가 고렝을 침대에 묶어버린 것. 조금이라도 내려온 음식을 혼자 독식하겠다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배고플 때 고렝의 살을 잘라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며칠 뒤 굶주린 트리마가시가 고렝의 살을 도려내려는 찰나 플랫폼을 타고 내려온 여자, 미하루(알렉산드라 마상카이)가 고렝을 구출해준다. 미하루는 딸을 찾아 매달 플랫폼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여자였다. 미하루는 트리마가시의 살을 잘라 고렝에게 나눠주고 또 아래로 내려간다.
또다시 30일 뒤, 고렝은 이모기리(안토니아 산 후앙)라는 여자와 33층에서 깨어난다. 이모기리는 고렝은 시설에 들어올 때 인터뷰한 행정부 직원이었다. 이모기리는 이 시설의 끔찍함을 몰랐고, 뒤늦게 알게 되어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한다. 시설에서도 음식 배분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먹히지 않는다. 고렝은 이모기리에게 미하루와 (미하루가 찾아다니는) 아이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모기리는, 이 시설에 어린아이는 들어오지 못하며 미하루는 혼자 들어왔다고 말해준다.
다음 날, 고렝은 202층에서 깨어난다. 이모기리는 이미 자살한 상태였고, 고렝은 이모기리의 살을 먹으며 버틴다. 또다시 층이 배정되고, 고렝은 그동안 배정된 층 중 가장 높은 층인 6층에서 깨어난다. 6층에 함께 배정된 바하랏(에밀리오 부알레)은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려 하지만 실패한다. 고렝은 바하랏을 설득해 음식을 51층부터 배분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향한다.
고랭과 바하랏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배급하며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 관리자에게 보여줄 상징으로 판나코타(디저트)를 지키기 위해 아래층 사람과 싸운다. 그 와중에 위험에 처한 미하루를 도와주지만 결국 미하루는 죽고 만다. 고렝이 예상한 층은 250층이었으나 아래층은 더 많았고, 결국 333층에서 플랫폼이 멈춘다. 고랭은 그곳에서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아이(미하루의 딸)를 발견한다. 고랭은 아이에게 판나코타를 먹인다. 이제 아이가 관리자에게 보여줄 상징이 되었다.
다음 날, 바하랏은 배급 과정에서 다친 부상으로 결국 죽고, 고렝은 아이를 테이블에 태운다. 아이 혼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더 플랫폼>는 분배에 관한 영화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읽기에는 경제학적 설정이 전무하다. <더 플랫폼>는 철저한 정치적인 영화이며, 다 보고 나면 모두에게 평등한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인간이 ‘토기’를 발명한 것은 음식을 저장하기 위해서다. <더 플랫폼>에서 수감자가 음식을 숨기면 인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방의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즉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다음으로 ‘플랫폼’은 30일마다 랜덤으로 레벨이 바뀌는 극한 생존의 수직 감옥이라는 점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수렵과 채집, 농경을 통해 얻은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더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각 층마다 2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음식은 맨 꼭대기에서 큰 테이블에 차려져 맨 위층 거주자부터 먼저 먹을 수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층 사람이 남긴 음식을 차례대로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수직 감옥은 원시 공산사회(소규모 자급자족 사회)의 배급 순서를 뜻한다.
문제는 아래층의 거주자들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를 먹거나 그마저도 먹지 못하게 되면서 같은 층 동거인을 잡아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인간사회가 아니다.
영화 속 고랭과 바하랏의 강제 배급 시도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잊을 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제 모습을 잊을 때,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것은 고렝이 들고 있는 <돈키호테>의 주제이기도 하다. 수감자는 원하는 물건을 들고 있는데 주인공은 왜 <돈키호테>를 선택했을까?
책을 고른 고렝과 칼을 고른 트리마가시는 문(文)과 무(武)의 대립이다. 감독은 왜 고렝에게 <돈키호테>를 줬을까? 돈키호테는 가난한 약자를 돕고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나갔는데, 결국 자기는 무너졌다. 하지만 자신이 변화시킨 산초에 의해 유토피아가 이뤄진다. 산초는 본래 욕심 많고 먹는 것만 알던 사람에 일자무식이었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면서 변한다. 나중에 바라타리아 섬의 통치자가 된다. 통치가 완벽했다. 사람들이 그를 우롱하려고 통치자를 시켰는데 그들이 오히려 우롱당한 격이다.
이 소설은 이상을 비웃는 사람에게 이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이로운가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키호테>은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감독은 많은 설정을 이 책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트리마가시가 환영처럼 등장하는 이유는 <돈키호테>의 화법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 300층짜리 수직 감옥의 관리자는 총 600인분의 음식을 매일 준비한다. 1인당 적당량만 먹는다면 누구나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30일마다 층수가 바뀌는 데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은 위층에 배속되면 필요 이상으로 과식하는 바람에 600인분은 51층까지도 전달되지 못해 그 아래층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된다.
주인공 고렝은 분배 시스템에 반기를 든다. 관리자에게 보여줄 상징으로 판나코타를 끝까지 사수한다. 판나코타는 디저트다. 이것은 생존과 무관한 식후에 먹는 잉여의 음식이다. 이것이 판타코타를 숨겨도 방의 온도가 변하지 않는 이유다. 백인인 고렝과 흑인인 바하랏은 힘을 모아 동양인 아이에게 먹인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혁명이건 개혁이건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4.0/5.0)
Good : 이상적인 분배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 실험
Caution : 계몽주의, 지나친 생략 화법
■자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인육 장면이 종종 나오니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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