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항문외과 수술방 참관 중이었다. 마취과가 왔다 갔다 거리면서 여기 다음 수술 있어요? 누가 수술 중이에요? 계속 물어보셨다. 아니 컴퓨터 켜면 바로 나오는데 왜 저러시지 의문이었다. 교수님은 여기 수술 오래 걸려~ 그러면서 쳐냈지만, 다른 과 교수님들이 들어오며 여기 몇 분 후에 끝나냐고 물어보고, 우리가 무슨 수술인데 누가 와서 예약 안 했냐고 물어보고 그러셨다.
그날 점심을 먹기 위해 나왔을 때 휴대폰을 보고 깨달았다.전산 마비되었다고...?그래서 다들 평소와 달랐구나!
1. 외래 실습하던 동기
외래는 무엇이냐? 환자가 입원이 필요하진 않고 그냥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치료를 받는 걸 의미한다. 병이 잘 조절되어 늘 비슷한 약을 받아가시는 분이 있고, 매번 피검사할 때마다 수치가 안 좋아 약을 바꿔가며 쓰는 분도 계시다. 때에 따라서는 수술 후 재발이 되었나 검사만 하시기도 하고, 요석과 같은 경우는 입원하지 않고 외래에서 깨부수고 가는 경우도 있다.
전산마비가 된 그날, 한 동기가 종양내과 외래방으로 갔다고 한다. 교수님보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교수님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어어 그래, 같이 들어가자. 외래 방의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전자기록 프로그램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컴퓨터가 고장난 줄 알고 간호사쌤을 나무랐다. 미리 확인을 했어야지, 방 바꿔줘! 하지만 바꾼 방도 프로그램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전산실에 전화를 했고, 전산이 에러가 났음을 인지했다.
금방 고치겠지, 하면서 기다리는데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밖의 환자들은 쌓여만 가고... 물론 운 좋게도 교수 및 의대생은 좀 편했다. 행정적으로 병원에 가면 간호사쌤과 원무과와 기타 여러 다른 직군을 먼저 거쳐 오기 때문이다. 그 직군들은 진짜 왜 예약시간인데 진료를 시작하지 않는지 열심히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 동기는 그냥 한참을 교수님과 대화하다 환자들이 그냥 약 며칠 치 더 남았으니 다음에 올게요, 하는 시점에서 퇴근했다. (와 조기퇴근 부럽다)
2. 수술방 상황
내가 그때 수술방이었는데, 전산이 에러났는지 전혀 몰랐다. 수술방은 약간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날로그를 고집하는데, 그중 하나는 수술방마다 수술일보를 뽑아서 붙이는 것이다. 수술일보는 해당 방에서 수술을 하는 환자 이름, 나이, 환자 입원 장소, 담당 교수 이름, 수술명, 특이사항, 예상 소요시간, 그리고 레지던트 전화번호, 인턴 전화번호 등등이 적혀있다. (교수님 번호는 중요하므로 코팅되어서 수술방 구석에 따로 붙어있다.) 과마다 수술일보 관리가 좀 다른데, 수술이 바뀌면 또 새로 뽑아서 붙이는 과가 있고 그냥 종이 위에 찍찍 긋고 대충 표시하는 과가 있고 다양하다. 그래서 전산을 보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긴 하지만 전산이 사라져도 전화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마취과는 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마취과는 약간 수술방의 지휘자(?)로 스케줄관리를 전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번 방에 A수술과 B수술을 이어서 하기로 했는데 A수술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2번 방이 모든 수술이 끝났다고 했다. 그러면 B수술을 2번 방으로 옮겨줘야 환자도 덜 기다리고 의료진도 빠른 퇴근이 가능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작정 시간만 맞다고 넣어주면 안 되고 수술 종류, 인력 현황, 수술 기구 현황, 응급 수술 추가 등 고려할 게 많다. 그걸 전산을 보면서 하면 편한데 못 하니 수술방마다 들어와서 여기 뭐 수술해요? 다음 뭐예요? 언제 끝나요? 그러고 계신 거였다. 하지만 방 뺏길까 봐 바로바로 대답 안 해주고 뭐야 응급 들어왔어? 왜? 나 다음 수술도 여기서 할 건데?
3. 병동 상황
...은 잘 모르겠다.나랑 친한 친구 중에는 그쪽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아마 병동도 난리 나지 않았을까? 입원수속도 안되고 퇴원수속도 안되고 환자 사라져도 전화번호는 전산에 있고...?
4. 과제하던 동기
병원 실습을 돌면 과별로 꼭 하나씩은 발표를 한다. '케이스 발표'라는 것인데 교수님께서 지정해 준 환자를 면담하고, 진찰도 하고, 의무기록도 보면서 발표하는 것이다. 나름 교수님이 호의적인 환자분을 지정해 주셔서 면담 및 진찰은 무난하게 끝나면 이제 의무기록과의 싸움이다. 영상 판독하고, 피검사 계산하고, 옛날 기록도 보고, 요약정리하고, ...
보통 케이스를 마지막주에 많이 하는데 1) 그거와 상관없이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2) 발표 전날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전산마비가 된 주는 해당 실습의 마지막 주였고, 2)에 해당하던 학생들이 초조해졌다. 어쩌겠니, 전산이 복구되길 기다린 후 밤을 새야지!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컴퓨터가 몇 대 없어 그날 서로 잘 양보하며 했나 궁금하다. 뭐, 망했다는 소문은 없었으니 다 잘한 거 아닐까?
요즘 많은 것들이 전산화되어 있다. 은행에서 종이통장을 안 주는 상품도 있고, 모바일 티켓이라고 종이 티켓도 안 준다. 결제도 휴대폰으로 하고, 심지어 문제집도 아이패드로 보세요~하며 실물을 안 주기도 한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은 어쩌나 싶을 정도로 전산화된 요즘, 걱정이 좀 된다. 언젠가 구글/네이버/다음이 전산마비가 오면, 나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p.s. 그전에 폰이 고장 나면, 서비스센터까지 갈 수 있을까? 지도도 못 보고 교통카드도 못 찍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