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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Jul 19. 2023

이것은 실습인가 잡무인가 멍 때리기 대회인가

수술실 실습 썰

본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각색되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옷을 갈아입는다. 깨끗한 수술복에 공용 크록스로 갈아신고 마스크와 수술용 모자까지 하면 들어갈 준비가 완료된다. 아, 명찰도 꼭 달고 다녀야한다. 사실 없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기는 하지만 명찰은 직종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간호사, 의사, 학생 상관없이 (가끔 커스텀 옷을 갖고 계신 분을 제외하면) 모두 똑같은 수술복과 똑같은 모자,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생은 수술실에 들어가면 수술을 참관한다. 교수님이 '손 씻고 들어와~'라고 하면 손 씻고 수술용 가운과 장갑을 끼고 수술보조를 서며 가까이에서 참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멀리서 봐야 한다. 복강경 수술은 모니터가 있어서 그냥 그거 보면 되는데, 모니터가 없는 개복 수술의 경우는 환자가 수술받는 곳이 오염되지 않도록 멀리서 발판을 밟고 올라가서 볼 수 있거나, 혹은 나는 키가 작아서 그냥 안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날은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건가... 언제 끝나지... 5 cm만 더 컸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멍하니 서 있는다. 


수술방의 여러 과들은 과마다 수술방 실습 스타일이 다르다. 

A과는 학생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이게 좋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냥 학생에게 관심을 안 가지는 것이다. 알아서 보고, 알아서 배우고, 알아서 보고서 쓰고... 학생이 수술이 안 보이는 위치에 서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A과 실습은 멍 때리는 날이 제일 많다.

B과는 교수님의 질문 공세에 대답하는 것이 메인 업무이다. "이 환자 왜 수술하지? 과거 질환은 뭐가 있지? 이 수술에서 어떤 구조물을 조심해야 하는가? 암의 병기는 어떻게 나누나?"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감사한데 학생의 입장에서는 구술시험을 보는 느낌이라서 조금 힘들긴 하다.

C과는 학생이 배워야 하는 술기를 시켜준다. 혈관에 링거 맞추기, 동맥혈 채혈, 소변줄 넣기, 기관삽관 등등. 그래서 C과를 돌기 전에는 미리 모형에다 연습을 많이 한다. 물론 모형에 그렇게 여러 번 했어도 실제로 하게 되면 정말 무섭다. 환자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되기도 하고, 뒤에서 교수님이 감시하고 있어서 무서운 것도 좀 있다.

D과는 학생이 잡무를 한다. 무영등 켜, 가스 켜라, CT 띄워라, 가끔은 환자 옮기기... D과를 돌기 전 준비할 점은 빠른 눈치, 잘 들리는 귀, 튼튼한 몸. 나는 눈치가 없고 귀도 밝은 편이 아니라서 에? 예?를 반복하다가 교수님께 귀 파고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D과 실습을 먼저 돌았다. 그러다 A과를 갔는데 가끔 점심시간과 수술시간이 겹친 경우, 코로나로 인해 수술방 인력이 대거 자가격리인 경우, 잡무를 할 인력이 부족하여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D과에서 잡무를 열심히 하면서 실습을 돌았으니까 수술장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봐 잡무가 밀리기 전에 눈치껏 내가 알아서 했다. 그러다가 수술 중 교수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교수님: 쌤 병리과 전화 좀 해줘요
나: (전화하기 업무는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교수님: 쌤 신규에요?
나: 저는 의과대학생입니다.
교수님: 아니 왜 학생에게 일을 시켜~

교수님 그 말을 D과에 가서 해주세요....


그 사건 이후로 그래, A과는 그냥 가만히 있자, 학생에게 일을 안 시키는 과이다, 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술하시던 교수님이 (아까 예시와 다른 교수님이다) 나에게 뭘 건네셨다. 

나: (뭐야 나 장갑 안 꼈는데) 예?!
교수님: 얼른 받아! (말하면서 돌아보시더니) 아, 학생이구나. 간호사인 줄 알았어!

...그래도 얼굴 보고 학생인 거 바로 알아채서 감사합니다...


가끔 간호사 선생님이 일을 시키면 '아, 나를 신규 간호사라고 오해를 했구나' 하고 이해한다. 그렇지만 의사인 인턴, 레지던트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이 일을 시키면 가끔 고민이 든다. 이게 학생 실습의 일환으로 시키는 일인가, 나를 간호사로 착각하고 시키는 일인가, 아니면 그냥 인력이 부족해서 시키는 것인가?


실습의 목적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실습이 이론을 실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졸업하기 전 배워야 하는 술기를 직접 학습하는 것들이 실습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사례로 들은 A과부터 D과까지, 제일 실습다운 실습을 하는 것은 아마도 B, C과가 아닐까 싶다. B과는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는 것을 배우고 C과는 술기 학습을 배운다. 나머지 과들은... 물론 병원은 학생 위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회사이지만, A, D과처럼 실습을 하게 되면 실습 나온 학생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A, D과에서 배우는 것도 많다.
A과는 어떤 교수님이 수술을 잘 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하고 중요한 정보이다.
D과는 각종 물품의 이름, 위치, 기계 사용법 등을 익힐 수 있고, 눈치를 키울 수 있다.


최근에 나를 담당하셨던 교수님이 나에게 그러셨다. 많이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외국은 연구 교수, 진료 교수, 교육담당 교수가 분류가 되어 있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 세 직무를 한 명이 올라운더로 하기를 바래서 너무 바쁘다고. 진료와 연구에 치여 교육에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셨다. (괜찮아요 A과보다는 훨씬 많이 챙겨줬...) 

인건비 때문에 우리나라가 교수를 교육, 연구, 진료 분야별로 뽑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좀 개선을 하려고 노력을 해서 학생이 '이것이 실습인가 잡무인가 멍 때리기 대회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안 벌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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