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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 속아서 분한 날

억울하여 화가 나고 원통하다

by 미레티아 Feb 26. 2025

분하다 | 형용사

(1)【…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화나고 원통하다.

    그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이 무엇보다 분했다.  

(출처: 우리말샘)


냉장고가 고장났다. 냉동실은 멀쩡한데, 냉장실이 문제였다. 우리집에 디지털 온습도계 하나와 아날로그 온습도계가 하나 있는데, 두 온도계를 냉장고에 넣어둔 결과 17도에서 더 내려가질 않았다. 혹시 온도계가 고장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냉동실에도 넣어보았는데 온도계는 문제가 없었다. 냉장고를 들어내고 뒤판을 청소하고, 전원을 껐다 켜고 별 짓을 다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수리를 불렀다. 그리고 이후 세 가지의 열받는 사건이 생겼다.


첫째,

수리기사는 친절했다. 원인이 뭐뭐가 있을 수 있는데~ 뭐는 아니고 메인보드에서 내려오는 선이 단선이 되었는데 그게 케이스 안에 있어서 고칠 수 없다나 뭐라나... 랜선처럼 움직이는 선아닌데 단선이 되었다는 것이 좀 희한하긴 했는데 톱으로 잘라봅시다 할 수도 없고 아주 친절해서 믿었다. 아 뭐 불량인가보지? 그렇지만 아빠는 믿지 않았고, 새 냉장고가 들어온 이후 공장으로 고장난 냉장고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라인더로 케이스를 뜯기 전에 다른 수리기사로부터 단선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들었고, 심지어 고쳤다. 2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그리고 당일에 또 고장났고, 열받은 아빠가 뜯어보다가 조립불량인 부품을 재조립하니 정상작동하였다.

참고로 두 수리기사님 모두 공식 서비스센터 소속이셨다.


개인은 수리기사를 믿고 전자제품 수리 및 설치를 맡긴다. 이는 개인과 전문가 간 정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믿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단선도 아닌데 단선으로 고장났다고 주장했고, 어쩌면 고칠 수도 있는데 못 고친다고 주장했고, 이러면 수리기사보다는 영업사원이 아닌가? 아빠는 여자밖에 없어서 잘 모른다고 가정하고 대충 속여서 말한 것 같다고 한다. 아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따져물었어야 했는데... 아니 그리고 조립불량은 곰손이어도 좀만 신경쓰면 되는 부분인데 고치다가 또 고장을 내면 어찌하나 싶다.


둘째, 

퇴근하고 아빠가 오니 새 냉장고가 수평이 안 맞는 것 같다고 그랬다.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추를 매단 실로 확인해보니 어이없을 정도로 확연히 뒤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론 좌우는 수평이 맞기는 했고 세탁기처럼 움직이는 가전이 아니니까 별 상관은 없을 수 있지만 설치기사가 수평을 못 맞추다니, 그럼 그냥 배송사원과 다른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비싸더라도 공식 홈페이지에서 샀는데 억울했다. 하는 수 없이 아빠가 렌치로 열심히 수평을 맞춰주었다.


셋째,

새로운 냉장고는 기존의 냉장고보다 사이즈가 작다. 12년 전에 사이즈를 잘못 보고 샀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작은 걸 샀다. 집에 엄마만 있을 때 설치기사님이 오셨는데, 기존 냉장고가 방충망이 설치된 우리의 문보다 커서 방충망을 뜯었다가 냉장고를 내보낸 뒤에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끼릭 삑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까 도어클로저가 수평이 안 맞고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 엄마가 '어제 냉장고 다 설치하고 보니까 나사못이 하나 남았어'라고 말을 했다. 어쩌겠냐, 내가 드라이버를 들고 도어클로저를 다시 설치해주었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12년 전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분명히 도어클로저를 뜯은 기억은 아무도 없었다. 기울여서 들어왔던 것 같은데... 아니 뭐 젊은 기사분들이었다 그래서 초보자는 뜯고 나갈 수도 있지, 라고 다들 이야기했지만 대체 왜 도어클로저 나사못을 하나 빠뜨리고 이실직고를 안 했는가에 대해 화가 났다. 하마터면 문도 바꿔야 하나 고민했을 뻔했다.


분하다, 억울하여 화가 나고 원통한 감정을 뜻한다고 한다. 정--말 분하다. 난 수리기사를 믿고, 설치기사를 믿은 죄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앞으로 계속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내 추측이다. 절대적 근거 없어) 예전에 정보선생님이 했던 말인데,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처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오래 만지고 경험이 많아야 잘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기술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하드웨어는 계속 새로워지고 다양해져서 절대적 경험의 양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잘 고치는 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또한, 경력직보단 신규가 싸고 체력이 좋으니 아무래도 현장직에 신규가 더 늘어날 것이고?


p.s. 제발 고장나지 마렴 나의 전자제품들아~ 고장나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고장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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