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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 겸연쩍은 선물받기

쑥스럽고 미안하여 어색하다

by 미레티아 Mar 05. 2025

겸연쩍다 | 형용사

(1)【…이】【-기가】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

    그는 자기의 실수가 겸연쩍은지 씩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마을에서 방울이를 마주 대하기가 겸연쩍어 되도록이면 피하는 입장이 되었다.   

(출처: 우리말샘)


한국인에게는 심리적으로 3번의 설날이 있다고 한다. 신정, 구정, 그리고 3월의 첫 평일. 그렇지만 나에게는 4번의 설날이 있는 날도 있다. 왜냐하면 내 생일은 3월 첫째주이기 때문이다. 3월의 첫 평일이 지나도록 꾸물대다가도 생일파티를 하고 나면 '이제 일년의 시작이구나'하는 느낌이 확 들어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다. 


생일이 학기 초와 비슷했기 때문에 학창시절에는 친구들로부터 축하받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다. "너 생일 언제야?" "응 나 언제인데?" (그리고 다음 해에 반이 바뀌어 다들 까먹는다.) 그렇지만 고등학생 때에는 워낙에 여자가 없는 학교에 다녀서 서로 잘 챙겨주었고,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니 카카오톡에 뜨는 생일로 서로 축하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냈다. 사실 남에게 선물 준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지 관찰하고, 선물을 사고, 포장을 예쁘게 뒤에 하고 주었을 기뻐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간혹 대체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머리를 싸매는 경우도 있지만(특히 아빠 생일이 어렵다...) 과정 끝에 뭔가 하나를 정하면 뿌듯해서 그 문화가 막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그러지 않은 경우가 많았나보다. 대부분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스타벅스 커피 기프티콘, 핸드크림, 향수, 머그컵. 커피 기프티콘은 모임 있을 때 종종 쓰니까 괜찮은데 핸드크림은 잘 안 쓰거니와, 쓰게 되면 한 통으로도 몇 개월을 쓰는데 여러 통을 받으니 다음 생일에도 다 못 쓴 경우가 허다했다. 향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안 쓰고 묵혀두다가...묵혀두다가...묵혀두고 있다. 머그컵은 나중에 독립하면 들고나가길 기원하며 쌓아두고 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카오 선물하기에 '위시리스트'라는 기능이 생겼다.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담아두는 건데, 뭔가 생일 '선물'이라기 보다 엎드려 절받는 느낌이라 잘 안 썼었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들이 생일에 위시리스트를 담으라고 요구를 했다. "이왕 받는 김에 필요한 거 받는 게 좋지 않아?" 그지, 그렇긴 한데... 좀 그런데...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고 향수를 또 받기는 싫었기 때문에 요즘은 생일 즈음에 위시리스트를 열심히 담는다. 


- 소모품인 양말, 노트. 머리끈도 넣어둘까? 근데 배송비 포함해도 너무 비싸다. 이건 좀 아님.

- 날씨 풀리니 운동해야 하는데 운동용 레깅스도 하나 넣어둘까? (모델 착용샷이 있는 제품 사진을 보고) 아 카톡 친구 모두가 볼 수 있는 리스트인데 사진이 조금 그런데... 그냥 내 돈으로 사자.

- 딸기,  좋다좋다. (잠깐 생각 후) 근데 작년에 과일 선물이 동시에 들어와서 상하기 전에 먹느라 고생했던 거 같은데... 하나만 넣어두자.

- 교보문고 상품권 넣을까? 너무 가격이 눈에 보이는데... 속물처럼 보이진 않을까? 차라리 책을 넣어둘까? (책을 넣으려다가 선물받기엔 비싼 가격이라 후퇴) 그냥 만원짜리 상품권 넣어두자.

- (예쁜 장신구를 구경하다가) 사치품도 넣어둘까? 그런데 친구들 보면 장신구 비싼 거 하고 다니던데... 만얼마짜리 넣어둬도 될까? 이제 나이도 좀 있어서 싸구려 하고 다니면 눈치보일 것 같은데. 그냥 말자.

- 뜨개실 넣어둬야지~ ('임신출산선물'이라고 적혀있는 제목을 보고) 애인도 없는데 오해받겠는걸...? 빼빼 절대 빼

- 맞다 마우스슬리퍼 새로 사야하는데 (천차만별 가격대를 보며) 조금 덜 마음에 들지만 어차피 소모품이니 가격대가 적당한 거 넣어두자.


...그렇게 고민 끝에 리스트에 들어간 선물을 막상 받으면 왠지 감정이 애매하다. 아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하지?


겸연쩍다,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참 쑥스럽다. 위시리스트 자체가 내 취향 및 일상을 낱낱이 공개하는 느낌이라서 그렇다. 미안하다.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걸 줘,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향수나 핸드크림을 준 친구들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다. 위시리스트를 보면 '쟤 취향은 저게 아니네?'를 알게 되었을 텐데, 혹시 예전에 취향에 맞지 않는 선물을 줬다는 생각에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색하다. 얼굴을 맞대고 주는 것이 아니니 축하하는 느낌도 덜하고, 쟤가 챙겨줬었기에 나도 챙겨준다는 느낌도 좀 있어서 더 서먹서먹하고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생일 축하해 준 모든 친구들 고맙다!! ㅎㅎ


p.s.1. 위시리스트 말고 거절 리스트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커피 안 마시고 향수를 싫어하고 집에 인형 짱 많으니 그걸 제외해주시길 바랍니다....
p.s.2. 혹은 생일자의 편지? 같은 게 뜨도록 하면 좋겠다. "뜨개질이 취미이니 다음에 얼굴 볼 때 실 한 볼씩만 주시면 뭔가 떠 주겠습니다." 뭐 이런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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