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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24. 2018

그레이트 오션 워크 3

트레킹 3일 차(8월 2일)


: 케이프 오트웨이 캠핑장 - 케슬 코브 16km    


걷기는 따로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정해서 해야 하는 일회적 활동이 아니다. 걷기는 그대로 삶이고 생활이고 여행이다. 걸으면서 반추하는 낙타처럼, 걸으면서 일하고, 걸으면서 사유하고, 걸으면서 교제하고. 그리하여 걷는 곳이 일터가 되고 서재가 되고 삶의 현장이 되는, 걷기는 나면서 죽을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아침 기온이 제법 쌀랑하다. 온도계의 수은주는 4도를 가리키고 있다. 6시 기상, 7시 조식, 8시 출발. 트레킹 기본 일정표다. 주차장에 세워진 짐차에 가서 불필요한 장비를 내려놓고 비옷과 식수 등 간단한 채비만 챙겨서 가볍게 길을 나섰다. 이장님은 사업상의 이유로 이곳에서 마크를 기다렸다가 같이 시내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저녁에 합류하기로 했다.   

     

- 두 번째 야생 동물, 왈라비 -    


점심을 먹을 장소인 에이레 리버 웨스트(Aire River West) 캠핑장까지는 10km를 걸어야 한다. 아침부터 햇살이 눈부시고 날이 화창하다 싶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곳 날씨는 무척이나 변덕스럽다. 해가 났다가 금방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다가 이내 그친다. 다행히 내리는 비의 양은 많지는 않았다. 처음엔 비 온다고 부산을 떨며 비옷 꺼내 입고 방수 바지 받쳐 입고 하다가 몇 번 겪어본 뒤로는 비가 와도 무시하고 길을 걸었다. 십분도 안 돼서 그칠 비이기에.       

길을 걷다가 만나고 싶던 호주의 두 번째 야생 동물, 왈라비와 조우했다. 정확히는 ‘검은 꼬리 왈라비’로 불리는 종이다. 왈라비는 캥거루과의 동물로 캥거루와 비슷하지만 덩치가 더 작고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우리가 만난 녀석들은 부부인지 형제인지 모르겠지만, 둘이 나란히 서서 귀를 바짝 세우고 긴장한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길은 해안 절벽위의 언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길의 왼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바다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초원이 지평선에 닿아 있다. 호주가 정말 큰 대륙임을 실감하게 된다.     

걷기 좋고, 보기 좋고, 느낌 좋은 길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다. 트레킹 삼일 째가 되니 트레킹에 처음 나서던 흥분은 가라앉고 묵묵히 수행을 하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음 속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경건한 걷기의 세계로 한 발 한 발 침잠해 들어간다. 몸과 마음이 이제 걷는 일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걷기에의 몰입. 더 이상의 원망도 부러움도 없는 상태.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오욕과 칠정을 내려놓고 오직 걸을 뿐. 그저 걸을 뿐. 영혼의 불순물들이 민들레 홀씨 날리듯 부서져 멀어진다.     


- 세상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 -    


에이레 강어귀에 도착했다. 역광에 반짝이는 에이레 강의 윤슬이 눈부시다. 에이레 강에는 나무로 만든 근사한 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캠핑장 입구다. 에이레 리버(Aire River) 캠핑장은 취사장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고 너른 잔디밭에 캠핑용 탁자가 놓여있어 야영하기에 좋은 곳이다. 블랑킷 베이에서 첫 날 밤을 보낸 트레커라면 이곳에서 이틀 째 밤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그것은 현지 여행사인 ‘워크 91’의 홈페이지에서 제안하고 있는 캠핑 스케줄이기도 하다.     

점심으로는 짜파구리를 해먹었다.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함께 섞어서 끓이는 우리 팀 단골 식단이다. 그 잠깐 사이에도 해가 났다 비가 왔다하며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이곳 에이레 리버 캠핑장은 도로와도 연결되어 있다. 미니버스 한 대가 들어와서 한 무리의 학생들을 내려놓는다. 초등학교 5-6학년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재잘재잘 장난치며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금방 떠나갔다. 성수기에는 학생들을 위한 야영 행사가 많이 열릴 듯하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이제 오늘 저녁을 보낼 캐슬 코브(Castle Cove)를 향한다. 표지판에는 남은 거리가 5.5km라고 적혀있다. 짐이 가벼우므로 두 시간이면 여유 있게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하지만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바다를 계속 바라보며 걸어간다. 길이 순하고 발에 닿는 촉감은 아주 부드럽다. 돌조각 하나 없는 흙길의 연속이다.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장쾌하다. 묵묵히 길을 걷다가도 파도의 유혹에 자꾸만 발길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이 또 있을까?        


- 호주에서 누린 최대의 호사 -    

 

힘들이지 않고 캐슬 코브(Castle Cove)에 도착했다. 가서 보니 왜 성벽(Cast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만했다. 캐슬 코브는 암벽이 성처럼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만으로 어떻게 보면 설악산의 용아장성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와 그레이트 오션 워크가 가장 가까이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몇 군데 조식을 제공하는 B&B(Bed & Breakfast) 숙소가 있다. 우리는 그중 한 곳인 ‘그레이트 오션 워크 리트리트(Great Ocean Walk Retreat)’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구글 맵을 돌려 용케 찾아낸 집이다. 지난 몽블랑 트레킹 중에도 하루는 산장 숙소를 이용했었다. 트레킹 중간에 샤워와 세탁을 할 수 있는 곳에서 하루를 머무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지친 몸의 원기회복에도 좋고, 스마트 폰과 카메라의 충전을 위해서도.    

4시도 채 되지 않아 숙소에 도착했다. 도로에 인접한 숙소 건물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것. 이곳은 인터넷이 되지 않고 전화도 안 터지는 지역이라 예약할 때부터 전화가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메일로 발송된 비밀번호를 받아 문에 달린 고무패드를 열고 비번을 누르면 열쇠를 꺼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미리 비번을 확인했어야 하는 데 메일 확인을 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바로 앞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에 한 번 찾아가 보았다. 사정 얘기를 하니 그 집 주인과는 잘 아는 이웃인 듯 유선전화로 연락을 취해주신다. 덕분에 숙소 입장 성공.     

집주인은 근처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부업으로 민박 업을 겸하고 있었다. 방문해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신다. 냉장고에 비치된 우유며 푸딩, 오이 피클과 각종 소스들은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와우. 뒤에 다시 와서는 내일 먹을 빵과 아들이 직접 만든 맥주라며 두 병을 주고 가셨다. 팔기도 한다며 마셔보고 필요하면 말하란다. 숙소예약에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그 만큼의 가치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호주에서 누린 최대의 호사였다.     

세탁실이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제일 먼저 그동안 더러워진 옷가지들을 세탁했다. 건조기는 없었지만 벽난로를 지피고 거실 한 쪽에 건조대를 펴서 널어놓으니 빨래가 금방 말랐다. 그 사이 로벤과 이장님이 도착했다. 로벤은 마크와 함께 일하는 ‘워크91’의 직원이다. 부탁한 럼주와 왕새우 2kg, 소고기 2kg을 구해왔다. 뒤 테라스에 바비큐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구이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왕새우 소금구이와 호주산 소고기 스테이크로 거한 만찬을 즐겼다. 백패킹 트레킹 중에 이런 럭셔리한 만찬을 즐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사 모든 일이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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