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비 Dec 14. 2018

그레이트 오션 워크 2

 트레킹 2일 차 (8월 1일)

: 엘리엇 리지 캠핑장 - 케이프 오트웨이 캠핑장 23km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며 기억의 변이이고 이슈의 반전이다. 보고, 듣고, 만난 모든 사물과 사람, 먹고, 마시고, 견딘 모든 음식과 사건들이 여행의 구성 요소가 된다. 여행을 하며 겪는 악재들, 예기치 않은 시련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그 모든 것이 여행의 기승전결이다. 여행은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에피소드의 합이다.     

새날이 밝았다. 6시 기상 후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해서 8시에 출발하는 정상적인 일정에 따른다. 원 계획은 이날 새벽 4시 반에 기상해서 6시에 출발하는 스케줄이었다. 저녁을 케이프 오트웨이 등대공원(Cape Otway Lighthouse)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먹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이용하려면 오후 4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일찍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끼분의 식량이라도 짐을 줄여보려고 쥐어짜 낸 비책이었다. 그만큼 배낭 무게에 대한 압박이 컸었다.     

그오길은 중간에 식량을 보급할 곳이 없기 때문에 5박 6일 동안 먹을 식량을 모두 배낭에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말이 그렇지 6명이 먹을 6일 분의 식량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식단을 짤 때도 어떻게 해야 무게를 줄일 수 있을지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나 짐을 옮겨주는 패키지 서비스(Assisted camping package with Walk 91)를 이용하면서 무게에 대한 부담이 한방에 해결되었다. 우리처럼 호주의 겨울 비수기인 7, 8월에 트레킹을 계획하는 분들은 미리 Walk 91을 접촉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롯이 걷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면.     

아침은 산딸기 잼을 바른 빵과 커피 한잔으로 가볍게 해결했다. 식사 후 짐을 정리하고 둘째 날의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오전에 걷게 되는 길은 그레이트 오트웨이 국립공원(Great Otway National Park) 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바닷길로 나오는 코스이다. 블랭킷 베이(Blanket Bay)까지 12km, 케이프 오트웨이(Cape Otway) 캠핑장까지 11km, 도합 23km에다가 짐차까지의 왕복 3km가 더해져 하루에 걸어야 할 거리가 대략 26km. 그오길 트레킹 중 가장 길게 걸은 날이다.     


- 초록 겨울 -   

 

오트웨이 국립공원 안으로 이어진 산길은 신작로처럼 잘 정비된 반듯한 임도였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무척 부드러워서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거대한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국립공원의 위용을 자랑했고 기괴한 나무들이 우거져 마치 정글 속을 걷는 듯했다. 나무들이 어찌나 거대한지 두 명이 팔을 한껏 벌려 안아도 나무 몸통의 절반밖에 이르지 못했다.     

무질서하게 벗겨진 나무껍질의 칙칙함이 눈에 조금 거슬릴 뿐, 숲은 온통 초록의 세상이었다. 떠나오기 전에 상상했던 황량한 겨울 풍경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호주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곤 했다. ‘눈은 내릴까? 낙엽이 다 졌겠지.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내지는 않을까?’ 그러나 웬걸. 나무들은 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땅은 파란 잔디와 이끼와 잡초들로 온통 녹색의 세상.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뜻밖의 풍경이었다. 초록 겨울이라니.     

그오길에서 첫 번째 만난 호주의 야생동물은 잠꾸러기 코알라였다. 하루에 20시간은 잠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먹기만 한다는 특이한 녀석이다. 높은 유칼리나무 가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코알라를 용케 발견했다. 우리는 녀석이 신기한데 녀석은 우리가 신기한지 낯선 방문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귀엽기도 하지. 우리는 코알라를 발견한 흥분에 코알라가 정말로 나무 위에서 새끼를 낳는지, 코알라도 겨울잠을 자는지 한동안 논쟁을 벌이며 길을 걸었다.      

 


- 남극해를 바라보며 -    


드디어 숲길을 빠져나와 블랭킷 베이(Blanket Bay)에 도착했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빠른 속도다. 12km의 거리를 세 시간 만에 주파했다. 텐트까지 장착한 배낭을 메고 걸을 때는 시간당 2km 밖에 속도가 나지 않지만 배낭을 내려놓거나 가볍게 메면 시간당 4km도 걸을 수 있었다. 그만큼 길이 평탄하고 걷기 좋았다. 블랭킷 베이, 담요 해변이라니. 왜 그런 이상한 이름이 붙었을까? 담요처럼 넓게 펼쳐져서일까? 망망대해 바다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시원해진다.   

블랭킷 베이(Blanket Bay) 캠핑장은 바닷가에 바로 인접해 있어 툭 트인 전망이 아주 환상적이다. 밤에 파도 소리가 다소 시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하룻밤 야영하기에 더없이 쾌적해 보였다. 만약에 하루쯤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면 도착한 첫날 바로 트레킹을 시작하지 말고, 들머리인 아폴로 베이에 와서 하루 유숙하며 피로를 풀고, 다음날 아침부터 걷기 시작해 이곳 블랭킷 베이에서 트레킹을 마치고 첫날 밤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점심으로 다시마 라면을 끓여먹었다. 신 단장님이 어디선가 다시마 한 뿌리를 건져오셨다. 생 다시마를 잘게 잘라 라면에 넣으니 국물이 시원하고 다시마를 씹는 식감이 아주 그만이다. 먼 이국의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호호 불며 먹는 라면의 맛이라니. 어느 일류 호텔 해물 레스토랑의 고급 음식 못지않은 기가 막힌 맛이다. 싱싱한 자연산 다시마가 더해지니 인스턴트 라면에서 고급스러운 풍미가 우러난다. 식사 후에는 원두커피를 내려 거친 남극해를 바라보며 망중한의 여유를 즐겼다. 그래 이 맛이야.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이 오묘한 커피의 맛을 어떻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 플루커 포스트를 만나다 -    


현대인들은 쓸 데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멸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서 한 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 애쓴다. 기필코 목표를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조바심을 낸다. 여행에 가서도 동선을 완벽하게 짜서 목표했던 관광지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종종거린다. 그러나 여행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신기록을 세우거나 무결점의 성과를 내야 할 의무가 없다. 여행은 그냥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오후에는 11km의 길을 걷는다.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해 떨어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하려면 조금 속도를 내야 한다. 채비를 갖추고 길을 나섰다. 이곳 캠핑장들의 화장실 시설은 아주 훌륭하다. 새 휴지가 떨어지지 않고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한번씩 들러 관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 안가 파커 힐 캠핑장(Parker Hill)이라는 곳을 지난다. 이곳은 그레이트 오션 워크 홈페이지에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캠핑장 예약 사이트에도 나와 있지 않은 ‘파커 힐 캠핑장’이 길 위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오길을 걷노라면 보호 구역을 벗어나거나 진입할 때 신발을 닦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신발에 묻은 흙들을 솔로 닦아낸 후 발판을 밟으면 나오는 세척액으로 소독을 하는 시스템이다. 곰팡이나 세균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라고 한다.  

   

왼쪽으로 계속 바다를 끼고 키가 작은 관목 숲길을 걷다가 언덕을 내려서니 강 하나가 길을 막고 있다. 파커 강(Parker River)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징검다리 하나 찾을 수 없다. 하는 수없이 신발을 벗어 들고 강을 건너는 수밖에. 스패츠를 단단히 장착한 단장님이 신발 벗기를 귀찮아하신다. “그려, 이럴 때 인심 한 번 쓰자.”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강물이 정말 차다. 배낭을 옮기고 사람을 옮기며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발이 동상이 걸린 듯 시려온다.     

길을 걷다가 ‘플루커 포스트(Fluker Post)’를 발견했다. 일본의 여행가 사이토 마사키가 쓴 책 <세계 10대 트레일 걷기 여행>에도 ‘플루커 포스트’가 언급되어 있다. 지정된 포인트에서 사진을 같은 각도로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면 그곳의 날씨라던가 생태변화를 과거와 비교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사이토 마사키가 만났던 그 ‘플루커 포스트’를 2016년 오늘 내가 또 만난다.       


- 이 밤을 당신과 보낼 수 있다면 -   

 

관목 숲길을 계속 걷다가 돌계단 길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자 쉬리의 언덕 같은 분위기 좋은 곳이 나타났다. 예쁜 벤치도 놓여있다. 이곳에서 연출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가재만(Crayfish Bay)을 지나 힘차게 길을 걷는다. 조금 질척거릴 만한 길은 나무 데크로 길을 내놓았다. 이 데크 길은 스웨덴의 쿵스레덴에서 보았던 나무 길과 아주 유사하다. 벤치마킹이라도 한 것일까?    

발걸음을 재촉하여 속보로 걷다 보니 저 멀리 라이트하우스(Light house)의 등대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힘을 더 냅시다.” 서로를 격려하며 끌고 민 끝에 오후 4시 30분에 라이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처음 계획했었던 바로 그 시간이다. 출발을 두 시간이나 늦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배낭이 가벼운 덕이다.     

케이프 오트웨이 등대공원(Cape Otway Lighthouse)은 유원지처럼 관리되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공원 내 식당은 비수기라서인지 이용에 여러 가지 제약사항이 있었다. 저녁 식사는 4시 30분까지 식당에 도착해야 하고, 최소 인원이 12명이 되어야 식사를 준비해줄 수 있다고 한다.

   

이곳 라이트하우스 주차장(Car Park)에 우리 트레일러가 세워져 있다. 필요한 짐들을 꺼내어 ‘케이프 오트웨이(Cape Otway)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캠프 사이트까지는 550m. 이 정도면 아주 가까운 거리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먼저 텐트부터 설치하고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채소와 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 밥이다. 야외 캠핑 요리 메뉴로 카레만큼 훌륭한 음식도 없다. 당근과 양파와 감자를 먹기 좋은 크기로 깍둑 썰고 호주산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먼저 버터에 살짝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인다. 준비해 간 카레가루를 잘 풀어서 한소끔 끓여주면 맛있는 카레가 완성된다. 술은 서울에서 공수해 간 천지람 고량주. 중국의 명주 중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술이다. 도수는 52도.   

  

어둠이 깔리고 천지람이 몇 순배 돌고 나니 목젖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어찌 노래 한 소절이 빠질 수 있으리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애타게 찾으며 ‘돌아오라 소렌토’로 시작한 노래가 “내가 말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을 거쳐 “백마강만 강이냐 낙동강도 강이다. 낙또옹강 강파아 라아아암에~”로 이어진다. 얼마 되지도 않은 술이 그새 동이 나고 말았다. 이제 막 흥이 돋으려는 참인데 술이 떨어지다니.  

   

결국 내일 마시려고 비축해 두었던 5리터짜리 와인 팩을 오늘 그냥 해치우기로 한다.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 등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우리의 보물창고로 향했다. 보관 중이던 와인 팩을 꺼내 들쳐 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캠핑장에 입성. 노래는 이제 “비 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에서 “이 밤을 다시 한번 당신과 보낼 수 있다면~”으로 구성지게 이어진다. 아! 그레이트 오션의 뜨거운 밤이여!

이전 02화 그레이트 오션 워크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