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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Dec 13. 2018

그레이트 오션 워크 1

트레킹 1일 차 (7월 31일)

: 아폴로 베이 - 엘리엇 리지 캠핑장 10km    

 

여행에 대한 흥분과 설렘은 보통 출발 삼 일 전에 최고조에 이른다. 여행 떠나기 전, 짐을 싸고, 안내서를 읽고, 지도를 들여다보고, 머릿속으로 그곳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나를 들뜨게 하는 일이다. 그 들뜸은 여행에 수반되는 모든 귀찮음과 힘듦을 이기게 한다. ‘이곳에서 살고 싶은’이 아닌 ‘이곳에서 죽어도 좋을’ 곳을 찾아 오늘도 나는 길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아폴로 베이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오전 11시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장을 보고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침착하자, 웃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다짐해보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급해진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지도를 구입하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식량과 물품들을 구입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타를 또 한 방 얻어맞고 만다. 가스 캔이 없다는 것이다. 가스가 없으면 캠핑이 불가하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마트 한쪽 구석에 기다란 부탄가스는 있는데 동그란 캠핑용 이소부탄 가스가 없다. 성수기에는 팔기도 했었지만 비수기라 갖다 놓지를 않았다고. 설상가상으로 한 블록 건너에 전문 용품점이 있긴 하지만 일요일이라 클로즈 상태였다.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이 스친다. 생쌀과 생 라면으로 생식을 해야 하나? 하루를 여기에 머물러야 하나? 그러면 이후 모든 일정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 텐데...   

 

하도 답답해서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갔다.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이장님이 나서서 ‘워크 91’(Walk 91은 그레이트 오션 워크 트레킹에 관련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여행사다. www.walk91.com.au)의 마크와 협상을 벌인다. 여기서 이번 여행의 구성원을 잠깐 설명하자면 예전에 나와 해외 트레킹을 함께 한 적이 있는 신 단장님, 이주택 씨, 김성철 씨 그리고 나의 고등학교 은사님이자 동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재직하시다가 퇴임하신 김 교수님,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해외 트레킹에 함께 나선 이 은한 씨(닉네임 이장) 이렇게 6명이 함께 했다.  

   

- 비극이 희극으로 -    


이 은한 님은 워낙에 마당발인 데다가 박학다식해서 우리 모임에서 언젠가부터 이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허리가 좋지 않아서 트레킹 오기 전부터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지고 갈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리고 무역업을 하시는 분이라 계속해서 인터넷으로 메일을 체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현지에 짐을 옮겨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적극적으로 접촉에 나선 것이다.     

사실 이 서비스는 성수기에만 운용이 되고 자신들의 스케줄에 맞추도록 코스와 숙박 일정이 미리 짜여 있어 우리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자 이장님은 집요한 협상 끝에 우리가 원하는 일정대로 짐을 옮겨주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6일 동안 호주 달러로 총 550불이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거기다가 윙크 한 번으로 50불을 깎기까지 한다. 현찰 500불을 건네는 것으로 계약이 완료되었다. 우리는 마크 덕분에 필요한 가스며 식수 문제까지 덩달아 해결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하늘에서 나타난 우리의 은인이었다.  

   

짐에 대한 부담이 확 줄었다. 비극이 희극이 되는 순간이다. 고기와 술을 더 확보하기로 한다. 5박 6일 동안 보급을 받을 곳이 전무했기 때문에 애당초 식량은 최소한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어떡하든지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이제 무게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하는 죄의식이 생긴다. 무슨 반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래 즐겁게 걸으면 되지 꼭 무겁게 짐을 메고 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여행 떠나오기 전에 다졌던 굳은 각오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 가벼운 출발 -    


출발이 많이 늦어졌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이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씨푸드 레스토랑에서 즐기려던 느긋한 점심은 물 건너가고, 마트에서 사 온 우유와 빵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랬다. ‘아폴로 베이’가 그레이트 오션 워크의 출발 거점 도시라고는 하지만, 실제적인 트레킹은 마랭고 ‘홀리데이 파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폴로 베이에서 마랭고까지는 3km. 도로를 걸어서 한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우리는 픽업 차량으로 편하게 이동했다. 차를 대절한 덕을 톡톡히 본다. 트레킹에 불필요한 짐들과 멜버른 관광 시에 필요한 옷가지들을 정리하여 픽업 차량에 맡기고, 마크가 끌고 온 짐차에 배낭과 식량들을 적재한 후 우리는 가벼운 몸이 되어 마침내 트레킹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야말로 가벼운 출발이다.     

첫 번째 미션은 표지판을 찾는 일이었다. 미리 구글 맵을 돌려 위치를 확인해 둔 덕에 그레이트 오션 워크의 랜드 마크 캐릭터인 ‘노란 삼각형 화살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각목 말뚝에 예쁘게 박힌 노란 삼각 마크는 우리와 5박 6일의 여정을 동행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이 노랑 마크 말뚝은 적재적소에 아주 잘 설치되어 있어 트레킹 동안 길을 잃을 염려가 거의 없다. 게다가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한 방향으로만 걷기를 권고하는 일방통행 길이므로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만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 노란 화살표 찾기 놀이 -    


어느덧 황혼이 내려앉는다. 남반구인 이곳의 계절은 지금 한 겨울. 해가 일찍 지고 늦게 뜬다. 한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기온은 우리나라 늦가을 정도의 날씨로 최저 기온이 섭씨 5도에서 6도, 낮 기온은 평균 14도 정도이다. 밤에는 쌀랑하지만 낮에 해가 날 때는 더워서 겉옷을 벗어야 했다. 이 정도면 트레킹을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다. 그런데 걷기에 너무나 안성맞춤인 이 계절이 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일까? 그레이트 오션 워크 트레킹은 봄부터 가을까지가 성수기이고 겨울은 비수기이다. 실제로 우리가 트레킹 하는 동안 어떤 다른 팀이나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우리만이 길과 캠핑장을 독차지한 채 황제 트레킹을 즐기고 돌아왔다.  

   

운이 많이 따라 주긴 했다. 나중에 픽업 기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오기 전 주에는 일주일 내내 장마처럼 비가 왔었다고 한다. 우리도 비를 만나기는 했지만 아주 소량의 비가 잠깐 스치고 지나는 정도였다. 워낙에 여름보다 겨울에 비가 더 자주 내린다고 한다. 몽블랑 트레킹 때 비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 사실 비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하고 왔다. 겨울에 맞는 비는 심각한 저체온증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수 바지(오버 트라우져)와 스패츠로 비가 등산화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비하고 손이 젖지 않도록 일회용 비닐장갑까지 가져갔다. 물론 고어 재킷과 비옷은 필수.     

캠핑용 캐빈들이 늘어 선 마랭고 홀리데이 파크를 지나 오솔길처럼 이어지던 그레이트 오션 워크(이하 ‘그오길’이라 이름 하자)는 이내 바닷가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길로 이어진다. 우리들의 노란 화살표 찾기 놀이가 이제 시작되었다. 길을 걷다가 노랑 마크가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른 트레커를 만날 수 없는 고독한 걷기 여행에서 유일하게 벗이 되어 우리를 따라와 주고 이끌어 준 고마운 친구다.

언덕에 올라서니 전망이 좋은 곳에 벤치가 놓여있다. 어이 그냥 지나칠 수 있으리. 벤치에 앉아 멋진 남극해(호주의 남쪽 바다는 남극해, 북쪽과 동쪽 바다는 태평양, 서쪽 바다는 인도양이다)를 조망한다. 이후로도 우리는 벤치가 나타날 때마다 ‘벤치 클리어!’를 외치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벤치는 아주 적당한 거리, 적당한 장소에서 어김없이 나타났다.   

  

- 트레일러 시스템 -   

 

숲의 식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족히 삼사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두산 백과를 찾아보니 큰 녀석은 100 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잎에서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기름을 채취하여 약으로 쓰기도 한다고. 나무껍질이 벗겨져 가지에 축축 늘어진 모습이 무척 괴기스럽다.   

  

숲길을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셀리 비치(Shelly Beach)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곳에 우리 짐을 실은 트레일러(짐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짐을 실은 트레일러를 봉고 차량 뒤에 매달고 가서 지정된 장소에 세워두었다가 다음날 이동시키는 시스템이다. 번호 키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짐이 분실될 염려는 없다. 문제는 캠핑장이 도로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결국 접근 가능한 가장 가까운 지점에 짐차를 세워두고 가면, 짐을 찾아서 야영을 하고 다시 이 짐차가 있는 지점으로 와서 짐을 실어놓고 트레킹을 이어가게 된다.   

  

야영장까지 남은 거리는 1.5 km. 결국 이 거리만큼은 배낭을 메야하고 다음 날 짐차로 돌아가서 짐을 내려놓고 온 길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 바람에 전체 트레일 길이는 104 km였지만 실제 걸은 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말았다. 4일째와 5일째 야영장은 도로 접근이 더욱 어려워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린 끝에 비장의 꼼수를 써야만 했다.     


- 마치 소가 달구지를 끄는 양 -    


확실히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으니 걷는 속도가 현격히 느려진다. 산책 나온 듯 물병 하나만 꿰차고 룰루랄라 걷던 우리는 이제 마치 소가 달구지를 끄는 듯한 모습이 되어 끙끙 힘을 쓰며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사십 여분을 더 걸어서 첫 번째 야영지 엘리엇 리지(Elliot Ridge)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다.

이곳의 캠핑장은 샤워장과 세탁실을 완벽히 갖춘 정규 캠핑장이 아니라 취사장과 화장실 등 최소한의 시설만 갖추고 운영되는 무인 간이 캠핑장이다. 물은 취사장의 지붕에서 끌어 모은 빗물을 탱크에 저장하여 사용한다. 언트리트(untreated) 된 물이라 그냥 마셔서는 안 되고 반드시 끓이거나 정수를 해야만 한다. 빗물을 모았다기에 흙물일까 봐 걱정했으나 공기가 맑아서인지 흙은 보이지 않고 생각보다는 깨끗한 물이었다. 마실 물은 워크 91의 마크를 통해 매일 제공되었다. 그렇지 못했으면 매일 물을 끓이느라 가스 소모가 많았을 듯하다.   

  

캠핑장은 예약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다(Camping by permit only)고 되어 있지만 비수기에는 캠핑을 하는 사람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어 양심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도 캠핑장 관리와 자연보호에 사용된다니 비용을 치르고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전체 104km의 길 위에 대략 십 여 킬로미터의 간격으로 7개의 캠핑장이 있다. 느긋한 여행자라면 캠핑장마다 숙박하면서 7박 8일의 일정으로 트레킹을 진행하면 된다.   

  

예약은 그레이트 오션 워크 홈페이지(www.greatoceanwalk.com.au)에 링크된 빅토리아주 공원 숙박 사이트(www.parkstay.vic.gov.au)를 통해 할 수 있다. 텐트 하나당 1박에 호주달러로 30불이니 우리 돈으로는 2만 5천 원 정도. 캠핑장 한 곳에 보통 8동의 텐트를 칠 수 있는 개인용 사이트와 6동을 칠 수 있는 그룹 사이트가 갖춰져 있다. 화장실은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휴지도 비치되어있다. 리얀스 댄(Ryans Den)과 데블스 키친(Devils kitchen) 캠핑장의 화장실은 정면에 전망 창이 있어서 변기에 앉아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아주 일품이다. 꼭 이용해 보기를 추천한다. 취사에 필요한 물은 빗물 저장탱크를 통해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다.   

    

호주에서의 첫날 밤이 깊어간다. 하루의 피로를 호주산 소고기와 조니 워커 블루로 풀어준다. 하루 트레킹을 마치고 야영지에서 마시는 한 잔의 술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곤한 잠을 불러오는 마법의 약이다. 우리는 길을 걷는 워커들이기 때문에 조니 워커를 마셔주어야 한다는 되지 않는 아재 개그를 주고받으며 잔을 부딪치는 사이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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