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맞을까
결혼할 사람은 느낌이 온다고 한다. 직관을 중요시하는 편이라 그런 느낌 나도 가져보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 만나고 나서 집에 와서 생각해 봤다. 전통 한국나이로 29살부터 누군가 만나고 오면 결혼할 느낌인가 생각했다.
그런 느낌, 결혼할 것 같은 느낌, 생각해 보니 조금이라도 괜찮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다 가졌다. 29살 때도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에게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만난 지 1주일 만에 명절에 부모님 만나러 가면 같이 간다고 했다. 외적으로도 괜찮고 덕후처럼 안 생겼는데 덕후 같은 성격도 잘 맞고 처음 대화했을 때도, 처음 만났을 때도 다 잘 맞고 설렌다고 느껴서 이 사람 정도면 결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당연히 만나러 가지 않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건강 상의 문제로 어렵게 헤어졌다. 헤어지고 동네 친구로 조금 더 알고 지내보니 서로 너무 솔직해져서 다시 만나는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전남친과 다시 사귀었을 때 처음부터 이 사람하고 웬만하면 결혼하려고 했다. 결혼적령기였고,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생각한 끝에 이 사람과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결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될 일은 어떻게든 안되는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모든 우주의 기운으로 이 사람과는 결혼할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올해 적극적으로 만남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썸은 끊임없이 탔다. 나는 이성과의 만남을 추구하지 않고 부와 명성만 추구했는데, 내 마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과 사람, 만남을 열렬히 추구했다.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마음이 시키는 데로 몸도 열심히 움직이다 보니 아주 짧은 연애도 몇 번 했다. 상대방은 연애로 카운트하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만나자는 의사표현이 오고 갔으면 나는 연애로 친다. 그 표현을 하기까지 최소 둘 중 한 명의 마음은 골인 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는 것이니까.
난 다 결혼까지 생각했다. 생각의 속도는 무제한이고, 머릿속 상상의 나래만큼은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으니까. 누군가와는 가정을 이뤄서 생활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고, 누군가와는 신혼여행지를 생각했고, 누군가와는 아이의 육아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나 혼자 생각했다. 신혼여행에 대해 입 밖으로 나와버려서 이야기를 했던 적도 있다. MBTI N이라 어쩔 수 없다. 상상은 빠르게, 멀리 한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는 회사 선배에게 썸과 연애 스토리를 공유한다. 연애 이야기가 제일 재밌는데 이야기하기 딱 좋은 상대이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없거나 연애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연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회사에서 늘 볼 수 있으니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아도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연애 전문가는 아니라서 조언은 걸러 들어야 한다.
선배가 “이건 마음 있는 거네. ”라고 해도 요즘 MZ인지 Z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 모두에게 쉽게 건네는 말을 관심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도 한참 오빠들과의 연애에 익숙해 또래나 어린 친구들의 행동양식과 마음은 잘 모른다. 이런 착각을 많이 해서 자주 마음이 휩쓸렸고 혼자 시속이 올라가서 망했다.
내가 계속 누구 만날 때마다 결혼할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온다고 하니까 이제 안 믿는다고 한다. 누군가와 사귀었다가 일주일 후에 정리했다고 할 … 아무튼 슬로다운(slow down, 속도를 줄이기)하라고 한다.
나는 다른 이유로 슬로다운할 수가 없다. 미친 사랑의 노예(가끔 그렇게 될 때도 있지만)라거나 금사빠(과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만남에는 당연히 슬로다운할 수 있다. 천천히 알아가 보고 만남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 정리에는 슬로다운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 남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진다면 알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지켜봤는데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고 이성으로도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면 알아가 보는데 적극적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젊음도, 지금 이 순간도, 이 사람과의 기회도 한 번뿐인데 일단 알아가 봐야 후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성적인 끌림에 대한 스펙트럼이 그리 넓지 않다. 좁은 골짜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조금은 이성으로 느껴서 사귄 것인데, 막상 만나보니 그렇게까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경험을 몇 차례 했다. 그런데, 이 지점을 사귀기 전에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래오래 지켜보고 알아가 본다고 해서 이 사람과 오래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길게 썸을 타는 것이 나에게는 마냥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나에게 친구일지, 남자일지 직접 체험을 해봐야 된다.
그렇다면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바이섹슈얼은 아닐까 예전부터 궁금했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런데 여자에게 반해서 좋아해 본 경험이나, 여자와 스킨십을 해본 경험은 없다. 20대 중후반까지는 확실히 알기 위해 나에게 이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자와의 경험. 그런데 남자를 이성으로 느껴본 경험도 있고 남자만 만나기에도 바쁜데 여자를 좋아해 볼 여력까지는 없었어서 이성애자로 살고 있다.
아직까지 경험으로는 이성으로 느끼는 남자의 스펙트럼이 좁은 이성애자로 정리하면 될 것 같다. 남자는 스펙트럼이 좁고 여자는 더 넓은 바이섹슈얼일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편이고 생물학적인 바이섹슈얼이 흔하다고 한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내가 아스피인 것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아스피들은 사랑의 대상을 이성에 한정 짓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사랑에 대해서든, 다른 것에 대해서든 열려있는 편이다. 뇌 구조가 그런 것 같다. 만물을 사랑하게끔 되어있고, 그중에서 특정한 것들은 미친 듯이 사랑하게끔 되어있는 뇌를 가지고 있다.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하기엔 나는 그 x촉을 너무 많이 느꼈다. 그리고 결혼 근처에도 못 갔다.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남성에게 성적인 긴장감을 느끼는 것과 연애를 지속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남자로 느낄 수 있을까. 남자로 느끼면서 거부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결혼할 촉이 언제쯤 맞는 촉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