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브 버튼(unlove buttons)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갯벌의 진흙밭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어렸을 때 갯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갯벌에서 걷다가 잘못 밟으면 몸이 훅 빨려 들어가 버리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갯벌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발을 그쪽으로 일단 디디면 빠져나오려고 해도 끝까지 빠지기 전까지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일단 다 빠진 다음에 누군가가 양팔을 끌어당겨 꺼내주거나 옆에 조금 더 딱딱한 진흙을 짚고 있는 힘껏 빠져나와야 한다. 사랑에서 빠져올 때도 아무도 꺼내주지 않고 혼자서 빠져나올 만큼 팔과 몸에 힘이 없으면 블랙홀에서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빠져나올 힘이 갑자기 솟아나는 그런 일들은 있다.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가 갑자기 팔에 힘이 솟아나서 마침내 갯벌의 블랙홀을 탈출하게 되는 일. 정신이 번쩍 들고 사랑에 빠지기 전의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오게 되는 일.
나에게 그런 계기들은 뭘까. 커다란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의 복선 같은 일이 생길 때가 아닐까 싶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는 새에 만들어진 불행 버튼들이 눌릴 때. 위험 신호들을 나는 불행 버튼이라고 부른다. 눌리면 대피해야 하는 그런 버튼들이 있다. 술 버튼, 집착 버튼, 폭력성 버튼, 회피형 버튼, 화법과 말투 버튼, 그리고 크고 작은 다른 버튼들.
자꾸만 발을 빠지게 하고 질척거리지만 중독성 있는 촉감의 갯벌 진흙에서 자발적으로 발을 쑥 빼게 하는 그런 버튼들도 있다. 불행 버튼은 아니지만 마음을 차가워지게 하는,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이성적인 상태로 되돌려주는 버튼들. 불행 버튼이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마음을 굳게 먹고 발을 떼야 하는 하는 대피 버튼이라면, 이성 버튼은 붉그스름한 마음을 푸르스름하게 바뀌게 하는 언러브(unlove) 버튼이다.
언러브 버튼은 대피 버튼만큼 널리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은 이해 못 해도 나에게는 마법같이 작동하는 언러브 버튼들이 있다. 같이 피크닉을 갔다가 돗자리를 개는데 돗자리집에 착 예쁘게 들어가게 작은 정성을 들여 각 맞춰 접지 않고 아무렇게나 접어서 쑤셔 넣는 모습을 보면 언러브 버튼이 눌린다.
눈에 보이는 것을 대충 아무렇게나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언러브 버튼이 눌린다. 반대로 완벽성과 장인 정신을 보이는 디테일에 강한 모습을 보면 러브 버튼이 눌린다. 틈이 없어야 하는 곳에 틈을 만들어버리는 대충 정신을 보면 언러브 버튼이 눌린다.
집에 커튼을 정교하게 잘 달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사랑할 수 있다. 정교함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제대로 하려고 마음먹지 않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대충 하는 그 마음을 사랑하기가 힘든 것이다. 경험상 돗자리 하나를 대충 개고 커튼하나를 대충 다는 사람은 다른 면에서도 대충이었다. 어떤 일들은 열과 성을 쏟고 시간을 들여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사랑이 유지가 안된다.
언러브 버튼이 눌리면 러브 버튼이 눌려있던 동안 이상해졌던 마음 상태와 행동들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표현을 했는데도 내 마음이 파란색이 되었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아니 파란색이라는 것이 보이는데도 몰아붙이는 상대에게는 차가움을 넘어 조금 잔인해지기까지 한다.
마침내 차갑고 단호해진, 사랑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내게 남는 것은 지난날들에 대한 뒤늦은 현실 자각과 부끄러움의 파편들이다. 도무지 지난날의 나의 판단력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갯벌의 블랙홀에 빠진 것이지, 빠져나와놓고도 왜 빠졌을 때를 그리도 그리워하고 생각했던 것이지, 이상했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지금은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을 그때는 보이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빠져나오는데 오래 걸렸을까 묻고 또 묻는다.
마침내 진흙에서 발을 뺐다. 과거는 확실히 과거에 두기로 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혼자 마음 주고 사랑 타령하지 않는다. 지난 인연들엔 불행 버튼과 언러브 버튼이 영원히 눌려있으면 좋겠다. 그 버튼들을 너무 자주 잊는다. 진흙의 부드러운 강렬함의 기억이 마음이 파랗게 되었던 순간들의 감각들을 종종 집어삼킨다.
이제는 한번 빠졌던 진흙탕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