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값은 네가 냈어야 되는 것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오빤 날 사랑하긴 해?"란 말. 내가 언젠가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비슷한 말을 십 수 번의 연애만에 처음 들었다. 씁쓸하지만 여느 때처럼 한 달도 채 만나지 않고 어찌 보면 가벼운, 하지만 마음에 묵직한 충격을 준 말 한마디에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날 덜 사랑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점심값은 네가 냈어야 되는 것 아니야?"라고 해서 빈정이 상해서 '이런 대접받으면서 연애하기 싫은데?' 하며 순식간에 마음이 짜게 식어 이별을 통보했다. 그에게 굳이 설명할 생각도, 계획도 없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유독 더 속상했고 잠깐 자리를 떠서 어딘가에서 혼자 잠시 울다가 사진을 포함한 모든 흔적을 핸드폰에서 싹 지웠고,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정말 연인에게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쓸 만큼 쓰고 밥도 살만큼 산다. 돌이켜보니 이 사람에게는 내가 좀 덜 쓴 것 같아, 헤어지면서 정산해서 카카오톡으로 송금까지 했다.
삐진 것이 아니었고 진심으로 헤어질 결정을 해서 나는 일관적으로 단호했고, 그는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길래 왜 점심값 얘기를 하냐, 아침엔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무려 4년 전 친구로 지낼 때 내가 밥을 안 산 얘기를 하길래 조금 약해졌던 마음도 다시 강철처럼 단단해져서 송금해 줄 테니까 가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로 지낼 때부터 얻어먹은 밥값까지 대충 다 정산해서 송금했고, 그는 보내자마자 냉큼 받았다. 내가 받아서 네 맘이 편해진다면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서는 또다시 정산이 됐으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만나면 안 되겠냐고 했다.
'뭐?!?!?!?!?!?! 사람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아. ' 연애를 하려면, 사랑 같은 것을 해보려면 어떤 환상 같은 것이 필요한데,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밥을 함께 먹었을 사이에 그날 그 점심값을 나한테 얘기한 순간, 그리고 내 기억 속에는 우리의 가장 좋았던 추억으로 남아있는 4년 전 암스테르담에서 애플팬케이크를 같이 먹었던 날을 내가 밥값을 안 낸 날로 만들어버린 순간 환상 같은 건 산산조각 나버렸다고.
그리고서 그 얘기를 들었다. 내가 자기를 덜 사랑해서 그런 것 같다고. 그러니까 내가 자기를 덜 사랑해서 그날 점심을 안 사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부분에서도 서운하게 했다는 것이다. 글에 다 담지 않은 앞뒤 사정이 있고, 그날은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그의 말도 있었다. 전날 내가 밥을 사서 그가 평소에 돈을 조금 더 썼더라도 내가 꼭 이틀 연속 밥을 사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순하게 나는 나가는데 오래 걸리는 안쪽 자리에 앉아있었고, 나오기 전에 그냥 그가 먼저 가서 계산을 했다.
진지하게 결혼하자더니 밥값 얘기를 하니까 그냥 황당했다.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준비하고, 미래에 경제 공동체가 되지? 나중에 상처받을 일 생기기 전에 빨리 다 관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점심값 얘기보다 네가 날 덜 사랑해서 그렇다는 말의 파장이 훨씬 더 컸다. 그는 계속 아직 마음이 있다고 했다. 빈정은 상했지만, 환상도 조금 깨졌지만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서운해서 밥값 얘기를 했나 보다, 내가 내 트라우마 때문에 더 그 얘기에 민감했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며칠만 나한테 가만히 시간을 줬으면 내가 과민반응했다고 하며 다시 죽이 잘 맞던 우리로 자연스럽게 돌아갔을 것도 같다.
그런데 네가 날 덜 사랑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나니 부담감이 너무 커졌다. 나도 짧은 시간치고 그를 꽤나 좋아했다. 이런 사랑 방식이 낯설기도 하고 그의 조금은 과한 성격이 부담도 되었지만, 행복으로 느꼈다. 모자란 것보다는 과한 것도 괜찮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감당할 수 있다, 넘치게 사랑받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이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결혼이라는 미친 결정에는 현실적인 조건이나 이유 외에 어떤 단 하나의 특별함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것이 이번엔 그 특별함이었다. 4년 전에도 나를 좋아했고, 지금도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리고 나에게 설렘과 확신을 느끼는 사람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나를 선택했지만, 이번엔 나도 그를 선택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외에도 나는 나의 이유들로 그를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그를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좋아했고, 충분히 표현했다. 마지막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들도 했다. 그런데 그가 내 애정의 크기를 재고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자신이 없어졌다. 불편하고 부담이 느껴졌다. 진짜로 내가 그만큼 사랑하는 것인지 나 역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기간에 비해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내 이상형을 만나야 되는 것인가 싶어졌다.
완벽한 내 이상형이어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가 밥값을 내며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야 맞는 것인가 싶어졌다. 내 마음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