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천만 출근길

Back OFF please!!!

by 해센스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당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출근시간 지하철에서는 앉으나 서나 퍼스널 스페이스가 침범당할 위험이 도사린다.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 사람의 신체를 둘러싼 개인 공간 영역. 타인이 일정거리 이내로 접근하는 경우, 불편하게 느껴진다. -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꽉 찬 지하철에 서서 갈 때는 퍼스널 스페이스고 뭐고 몸이 밀착되는 것은 참아야 한다. 꽉 끼는 지하철은 아스피에게 공황발작을 유발할 완벽한 환경이다. 싫어하긴 하지만 익숙해진 탓인지 서서 꽉 끼는 것은 답답하긴 해도 공황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나한테 정말 문제가 되는 상황은 앉아있을 때이다. 지하철에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서는 순간부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는 것은 그나마 참을만하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가와 내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만원 지하철도 아닌데 앉아있는 사람 앞에 그렇게 밀착해서 서있을 필요는 없다. 서 있을 때는 몸이 가깝고 밀착되어 있어도 얼굴과 얼굴이 마주치지는 않고, 언제든 내가 몸을 틀어 불편한 각도를 조금은 편안한 각도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서서 시야를 가로막고 밀착해서 퍼스널 스페이스를 조여 오면 내가 일어나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겨 상황을 피해버리지 않는 한 옴짝달싹 손쓸 수 없이 상황 속에 갇혀 버린 느낌이 든다.

오늘 내 앞에 밀착한 중년 여성분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의 밑단이 반바지를 입은 나의 맨 살에 닿았을 때 너무 기분이 안 좋았다. 지하철에 앉아있는데, 특히 누군가의 치맛자락이 내 몸에 닿을 때 느낌이 너무 안 좋다. 그 사람에게만 속해야 할 신체의 확장판이 내 몸에 닿는 느낌이다. 각자의 퍼스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이 서로 교집합을 만드는 소름 끼치는 기분이다.


특히 다리는 팔에 비해서 더 개인적인 공간이다. 심장과 뇌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고, 내 몸이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엄밀히 말하면 정강이 부분은 내 마음대로 그 부위만을 움직여 감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팔처럼 손쉽게 타인의 터치에서 재빨리 피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앉아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타인의 치맛자락이 내 살에 닿았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눈빛으로 그 사람을 올려다본 후 다리를 조금 쭉 빼서 떨어져 달라는 바디랭귀지를 보냈다. 지금 당신이 나에게 너무 밀착했고, 당신의 신체의 확장판에 해당하는 부분이 내 신체에 닿았으니 한 발짝 떨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소리 없는 언어로 표현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아줌마는 강하다. 아줌마는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고 나 역시 그대로 내려야 되는 역까지 앉아서 갔다. 그리고 출근한 후 패닉어택(공황 발작) 증세가 왔다.


3월에 누군가의 퍼스널 시공간 침범 후에 겪었던 공황 발작 이후의 가장 센 강도의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었다. 호흡 곤란이 오기 전에 긴급상황 기분전환 매뉴얼에 따라 행동했고 위기는 면했다. 좋아하는 컵을 가지고, 익숙한 카페에 가서 아인슈페너를 산 후 탁 트인 공원에 가서 나무 벤치에 앉아 나무에 몸을 접지한 후 시간을 잠시 가지면 된다. 탁 트인 곳에서 그라운딩 테크닉을 실행해 옮기고 릴랙스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글을 쓰면 마음이 조금 괜찮아진다.


이런 날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낮은 층고에 모니터로 시야가 막힌(사람이 내 시야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지만) 곳에서 좋은 에너지를 내뿜지 않는 사람의 근처에 있으면 멀쩡한 마음도 안 괜찮아질 판이다. 이미 마음이 괜찮지 않을 때는 사무실의 한구석을 떠나 공원과 숲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


공원 안에 있는 숲 속에 들어가 바위에 앉아서 엉덩이가 축축해도 좋으니,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비가 팔랑팔랑 날고 나뭇가지에 회색 새가 앉았다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조금 편안해진다. 가까이에 사람이 없고 사람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마음이 괜찮다. 홀로 산책하고 홀로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만 있는 작은 숲 속에 머물면 괜찮다.


타인과 적당한 시공간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는 과학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전에 있던 부서에서 부장님이 회의를 소집하면 10명이 넘는 인원이 1-2초 만에 팀원들과 심리적 거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물리적 거리를 유지한 곳에 앉기 위해 회의 테이블에서 자리싸움을 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근거리에 싫은 사람들이 앉았다면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 얼굴 한쪽을 가려서라도 그 사람들과는 물리적 장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압도구나 작은 인형 같은 애착템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싫은 사람들과 가까이 있어야 하는 불안감을 달랬다. 회의 중에도,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늘 아팠다. 1~2년 동안 그 부서에 있을 때는 몸과 마음이 아팠다.


내 공간에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는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쑥 개인적인 영역에 누군가 침범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대한민국 지하철에는 의자 앞 바닥에 발자국 모양을 그려놓아야 한다. 최소한 이 발자국 앞에는 서면 안된다는 표시로. 문화권마다 편안하게 느끼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있다. 북유럽에서는 대기줄에서도 사람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사진을 보았다. 난 북유럽에 가서 살고 싶다. 모르는 사람이나 심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 너무 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줌마 공포증이 있다.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같이 폐쇄된 공간에 아줌마가 들어오면 심장이 빨리 뛰고 가슴이 답답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아줌마들은 언제나 불쑥 말을 걸고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쩔 땐 청소 용역 하시는 분도 예외는 아니다. 화장실에 헤드셋을 끼고 가는 이유는 불쑥 개인적인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아줌마들의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 하소연병(혹은 자기자랑병)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


말없는 나무와 물, 꽃이 있는 숲 속에 있어야 안전하고 편안하다. 이들은 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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