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

홀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처럼

by 해센스

ASD(Autism Spectrum Disorder, 자페스펙트럼장애)에 대한 영상을 보다가 바닥에 엉덩이와 발바닥을 대고 쪼그려 앉아 있는 아이의 그림이 나왔다.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양무릎과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혼자 있는 그런 아이의 모습. 나도 밖에 나와 이런 자세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의 많은 글은 야외에서 탄생했다. 모든 글을 그런 자세로 쓴 건 아니지만. 2월 초중순의 겨울바람에 손이 시리지만 그래도 밖에서 스마트폰에 끄적일 때 글이 가장 편안하게 나온다. 봄이 오고 기온이 올라가면 밖에서 손이 얼지 않고 글을 쓰고 새를 관찰할 생각에 가장 설렌다.


마음이 답답할 땐 땅바닥에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이 좋다. 사실 전에도 밖에서 벤치 같은 곳에 꽤나 벌러덩 잘 누웠다. 나를 아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이라면, 햇볕과 공기와 바람이 있는 곳이라면 단체 생활을 하는 공간보다는 늘 편안했다. 가끔씩 혼자 있는 나에게 까치가 다가와 옆에 있어 주기도 했다. 새는 다가가려고 하면 멀어지지만 조용히 바라보면 먼저 다가온다. 바라보지 않아도 슬프고 쓸쓸한 사람 곁에 와서 적당한 거리에 살포시 앉는다.


“네가 느끼는 게 맞아. 모든 감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도 돼”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쪼그려 앉아 땅에 신체의 일부가 닿아 있다는 것은 안정감을 준다. 하물며 몸에서 가장 큰 뼈인 엉덩이 뼈를 발바닥과 함께 땅에 대고 있으면 얼마나 편안할까. 이 자세처럼 내 감정을(사실 정확히 인지하기도 어려운 내 마음을) 나름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이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한다. 늘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지만 전체 공개로 내 진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 두어 개의 저장된 글과 휙휙 진심을 담아 써낸 작업 계획서 몇 줄로 설레는 작가라는 이름을 부여해 준 브런치 덕분에 글을 쓰며 내 마음에 대해 조금씩 더 섬세하게 알게 되고 있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그리고 “난 이렇게 느끼고 생각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어 꾸준히 글을 쓴다.


오늘 나를 특별히 힘들게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말 좋았다. 좋아하는 동생과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행복했다. 두 명이서 뇨끼와 파스타 2개를 시켜서 세 종류의 모두 다른 질감을 가진 밀가루 반죽과 각종 치즈크림소스를 탐닉했다. ADHD약 콘서타를 먹을 때 살이 빠지는 게 행복이었다면 약을 끊고 나서는 다시 음식을 먹는 1차원적 쾌락에 탐닉 중이다. 점심도 많이 먹고 간식까지 쉬지 않고 먹었지만 저녁에도 다른 형태의 밀가루 반죽에 탐닉해 불편한 감정을 모두 먹어치워 버릴 것이다.


오늘 나를 힘들게 한 일은 일주일 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의 계기가 되는 일은 2년 전부터 2-3달 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감정 처리 속도가 느리다.


내가 느낀 감각에 ‘이건 이런 이름의 감정입니다’라고 이름표를 붙이는 일(labelling) - 감정을 붙여진 이름표에 맞는 분류체계로 보내는 일(sorting) - 분류체계에 맞게 감정들을 알맞은 방법으로 처리하는 일(processing) - 처리된 감정을 보내주고(letting go) 다시 편안한 일상을 살아가는 일(getting back on track)


나는 이런 일이 어렵다. 선천적으로 나의 뇌는 이런 작업을 하는데 결함이 있어 작업 지연이 심각하다. 단지 느린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시험 공부나 업무 처리 같은 다른 작업에는 <이름붙이기-분류하기-처리하기-편안해지기>가 잘 되는데 감정의 문제에서 만큼은 이 작업이 쉽지가 않았다.


특히 불편한 감정에 대해 나는 감각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몸이 아프니 몸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한의원, 마시지 샵 등을 찾아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불편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일과 진짜 감정은 묻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남친과의 에피소드에 대해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때가 있는데, '슬프다-그래서 눈물이 난다'의 방향으로 감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먼저 막 나고 나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거지?'라고 생각을 한다. '내가 아직 전남친이 그리운 것인가? 사랑의 감정으로 눈물이 나는 것인가?' 이렇게. 밖에서 즐겁게 사회생활을 하고 돌아오면 밤에 막 눈물이 날 때도 있다. 특히 알코올을 섭취하면 그렇게 되는 일이 많아 술을 마시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마치 웃었던 만큼 반작용으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힘든 마음이 해소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밖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표출해 버리면 집에선 힘듦의 감정이 눈물의 형태로 나오는 것이다.


반면 감각을 느끼는 센서엔 한도 제한이 걸려있지 않다. 해작가의 삶을 살며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묵은 감정들을 처리하느라 요샌 내 카드에도 한도 제한이 풀려버렸다. 쉬운 감정처리 방법은 습관적으로 편의점에 가서 먹고 싶은 것들을 사서 미각 자극을 주는 것이다. 내 감각들로 말할 것 같으면 너무 많이 보이고 너무 많이 들리고 너무 많이 느껴진다. 이런 감각 과잉과 감정 처리 지연은 사람을 탈진하게 한다. 출근해서 일하는 날이면 당장이라도 혼자만의 공간으로 떠나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을 하루에도 여러 번 경험한다. 멘붕(melt down)으로 가기 전 경보 알람이 울리면 혼자 만의 땅굴로 들어가 잠시 쉬다 올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 쑥 들어갔다가 충전이 되면 다시 나와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때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작은 트리거에도 올라와 나를 괴롭게 한다. 회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크게 상처를 받게 되면 대개 그 사람에게 제대로 이야기하는 대신 무조건적인 감각적 회피를 택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목소리도 최대한 안 들으려고 해버리는 것이다. 보게 된다면 두 눈 똑바로 뜨고 무시해 버리든지 해야 하는데 회사라는 이름의 특수한 사회이니만큼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마스킹해 행동하기도 했다. 스스로라도 감정에 이름표를 잘 붙여 분노라는 감정이라도 좋으니 분노를 제대로 느끼고 나름의 방법으로 내 감정을 잘 해소했어야 하는데 생각하기도 싫으니 찔끔찔끔 올라오는 분노만 빠르게 다른 생각으로 밀쳐내기만 했다.


그 정도의 상처가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내가 이런 면에서 이 정도 상처를 받았다”라고 의사를 전달하고 싶은데, 예민한 사람으로 받아들일까 봐, 또는 정확히 감정을 잘 전달하지 못할까 봐, 잘 전달한다고 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단념하고 회피를 택한다. 한 때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라도 “넌 날 이해 못 해. 수많은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날 이해하지 않기를 택한 거야.”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고통유발자의 실루엣을 보게 되고 목소리를 듣게 되면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때의 나는 제대로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나의 감각은 생생하게 느껴 온몸의 온 감각이 불편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럴 땐 감각이 알려주는 멘붕 경보 대피(escape) 신호에 잘 따라야 한다. 이 때 땅굴이 필요한 이유는 대피 중에도 사람들을 지나쳐야 하고 그때도 사회화된 성인의 ‘표준행동양식’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가볍게 말을 건네는 그런 행동. 나는 평소에도 눈을 마주치고 가볍게 말을 건네는 행동은 아주 편안한 사람들과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피 중에는 그런 고도화된 NT(뉴로티피컬) 미러링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 인사도 할 수 없고 그저 최대한 빨리 대피를 해야 한다. 대피를 안 했다간 괜히 이상한 데서 폭발해 '조용한데 특이한 애'에서 '성격 이상하니까 더 맘 놓고 괴롭혀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애'로 바뀌어버릴 테니까.


내가 일하는 곳은 혼자 만의 시간을 틈틈이 가질 수 있게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의 성향에 대해 더 파악할 수도 있었다. ASD(고기능 자폐, 아스퍼거)라는 자가 확신과 ASD로서의 정체성으로의 변화 과정도 꽤 자연스럽게 진행 중이다. 산책을 하거나 밖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나는 어떻게 충전을 하는 사람인지 충분히 관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셀프 진단을 하고 나서 내가 사회 속에서 왜 자주 탈진했는지, 왜 수많은 나날들을 화장실이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혼자 울며 보냈는지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어려움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과 글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네가, 공부와 일을 문제없이, 오히려 때론 남들보다 더 잘 해내는 네가, 많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해내는 네가? 그렇게 꾸준하고 열심히 사는 네가? 겨우 이런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사람들은 내 가면 속에 가려진 어려움을 보지 못한다. 똑똑하고 논리적인 내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니, 누군가가 그렇게 프레임을 씌운다.


동료 1 : "상처받은 그 분에게 사과하세요.", "대리님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실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런 것이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대리님이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분에게 사과하세요.",



동료 2 : "대리님이 먼저 문제 행동을 해서 A가 그런 것이라고 들었는데, A에게 사과하실 건가요?"(어느 순간 원인 제공자가 되어버림), "그래서 사과는 하실건가요?", "A를 이해하세요"(두번 째 반복)


직장에서 A에게 폭언을 듣고 나서 동료들에게 나는 이런 말들을 들었다.


좋겠다. 다른 정신적 문제를 가진 NT(뉴로티피컬)들은 이렇게 대신해서 말해줄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함께 다니며 모든 악행을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그들의 괴롭힘 대상에게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사회적인 지능을 발휘할 능력이 있어서. 나, ASD는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미연에 방지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회 지능도 부족하다. 나는 내 감정도 즉시 이해하지 못한다. 몇 주일에서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난 아직도 다 소화하지 못했다. 작은 트리거만 있어도 여전히 고통받는다. 나는 “내가 타인에게 하지 않을 행동”, “책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행동”에 대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정말로 없다.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나를 괴롭힌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의 불안하고 초조했던 심정, 그걸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했던 행동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그 즉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ASD의 뇌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고 타인의 감정(혹은 감정연기)에 공감을 느끼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 에 이상이 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 A, B가 나를 싫어하니 당신 C도 나를 싫어하고 같이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을 못한다. 나는 그렇지 않으니, 타인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A, B, C, D가 E를 함께 미워하고 괴롭히니 E는 나쁜 사람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 보고 내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만 믿는다. A, B, C, D의 연기와 E에 대한 프레임 씌우기는 나에게 전이되지 않는다.


ASD는 감정도 더 많이 느낀다고 과학적으로 보고되었다. 단지 감정의 입력(이 감각은 이런 감정이라고 인지)과 출력(느낀 감정에 대해 타인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전달)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인지가 좋으니 감정에 대해서도 잘 훈련하고 학습한다면 (착취적, 상하관계적 인관관계를 주로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감정 소통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자주 보고 신뢰 관계가 쌓인 인간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잘 들어준다면 감정에 대해 잘 설명을 할 수 있다. 때론 내가 상황을 말해주면 '이런 감정이겠구나'라며 감정의 이름을 알려주는 좋은 친구들도 있다.


내가 하지 않을 악행을 타인이 나에게 할 것이라고 아무 이유 없이 생각하지 않는다. ASD는 단지 감각이 예민하고 부족한 사회적 지능을 보상하도록 논리력이 발달되어 있다. 내 몸이 어떤 감각을 느꼈고, 내 머리가 이렇게 추론했으면 맞을 때가 많았다. 정황적 타당성, 패턴 상의 통계도 확보 되었다. 나에게 악행을 하는 사람이 나를 지나칠 때 보이는 불안한 눈빛과 황급히 피하고 싶어 하는 동작도 파악했다.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친구든 심리상담사든 나는 내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기를 포기했다.


일터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비슷했다. 나는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폐인의 모든 특성과 취미를 갖췄으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자폐 성향을 갖췄네' 까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똑 부러지는 애', '어울리는 것보다 때로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애' 정도의 프레임 안에서 이해된다. 내가 왜 사회생활이 아니라 내 생활과 내 목표에 몰입하는 지의 근본적 이유는 모른다.


나의 진짜 어려움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진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단념하게 되고 혼자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에 몰두하는 것이다.


타인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빠르게 문제를 파악하고 불편한 상황, 뭔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몸이 아프다는 건 사회생활에서 축복이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공감받고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모두가 YES 할 때 NO 할 수 있고 모두가 NO 할 때 YES 할 수 있는 나의 뇌신경학적 특징도 집단주의적 문화에서 그리 환영받지만은 않는다.


그래서 난 물리치료, 한의원진료, 마사지 받기, 호캉스, 맛스타그램을 하며 힐링하고 자연 속에서 더 깊은 소통과 공감을 얻을 것이다. 봄이 오면 당당한 ASD(자폐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번에 주문한 망원경으로 열심히 새를 관찰할 것이다.


기능적인 대화를 재미있게 나눌 수 있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교류할 수 있는 몇몇(few) “사람친구”들의 존재에는 늘 무한히 감사하다. <3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해 줄 사람과 사랑도 하고 싶다. 내 통찰력이 맞다고 해줄 사람.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 “설마”, “아닐거야”, “증거있냐”라고 하지 않을 내 사람.

keyword
이전 02화웃음을 잃고 집중력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