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모국어라면 어떤 느낌일까

감정보다 영어가 편한 사람

by 해센스

아주 적절한 비유가 떠올랐다. 나에게 감정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인 한국어와 외국어인 영어보다 더 어려운 언어이다. 감정을 분명히 느낀다. 아주 많이 느낀다. 재밌는 것은 더 많이 재밌고 슬픈 것은 더 많이 슬프다. 크게 웃기도 하고 아주 많이 울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많이 좋아하고 무관심한 사람은 아주 많이 무관심하다.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웃음, 눈물, 호불호가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읽고 듣고 말하고 쓰기, 그리고 인지적으로 알아차리기가 영어보다도 더 어렵다. 나의 머리는 감정을 적기에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보면 눈물이 나는데 눈물이 나서 슬픈 감정이 생긴다. 그러면 평소에 슬펐던 일이 그때 가서 다 떠오른다. 그러니 슬퍼지고 싶지 않으면 드라마를 보면 안 된다.


마치 술을 많이 마시고 중간에 필름이 끊긴 그런 느낌이다. 술을 분명히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중간에 몇 분간의 필름이 끊긴 그런 느낌이다. 뇌 회로에서 감정을 느끼는 부위와 감정이 감각으로 나타나는 회로는 더 섬세하게 작동하는데 그 중간에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를 알려주는 그 회로가 작동을 안 하는 느낌이다. 감정 인식 회로가 고장 났기 때문에 뇌의 다른 회로에서 이 감각을 느꼈으면 이 감정이라고 분석을 해서 이름을 붙여준다. 반복적 학습으로 눈물이 나면 슬프다, 웃음이 나면 기쁘고 즐겁다고 사후 분석적으로 알려준다.


내가 읽은 책의 모든 구절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아스퍼거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니 단순히 로맨틱하기 때문에 이 구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시멜로는 눈에 보이고 촉감을 알고 맛도 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설레는 것인지, 보고 싶은 것인지, 존경하는 것인지, 감사하는 것인지, 신뢰하는 것인지 순간순간 어떤 감정을 인식해야 사랑인 것인지 어렵다.


아스피인 내가 사랑을 느끼려면 이런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마시멜로한다는 것처럼 인지할 수 있게. 나의 마음은 아주 신속정확하게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보고 싶어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 설레는 느낌, 상대방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기는 것을 보고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보기 위해 행동을 취하고 나에게 질문을 한다면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추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타인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느끼지는 못한다.


감정이 모국어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한 번쯤 느껴보고 싶다. 다시 태어나면 아스피로 태어날 것이라고 묻는다면 유치원과 학교만 다시 다니지 않아도 되면 아스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것 같다. 아스피가 가진 능력치들과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가벼움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궁금하다.


연애를 했던 사람의 일관성 있는 행동을 보고, 나를 배려해 주는 행동을 보고 사랑하는구나, 진심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의 사랑은 알 수 있었지만 상대방의 사랑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나는 말로 정확히 반복해서 표현해 주어야 알 수 있다. 나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한테만큼은 사랑받았다고 확신했다. 항상 말로 정확하게 표현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만날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손녀딸이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늘 아기 때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었다. 사랑해 주는 여러 행동 역시 동반되었다. 사랑하는 손녀딸이라고만 했으면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지 않아 마음을 확실히 잘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받아들였다.


그곳에서만큼은 아이였다. 그리고 그냥 나였다.


어느 순간 누군가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느꼈다면 정말 많이 노력하고 표현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는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누군가의 호감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워졌다. 인위적인 만남이 아닌 자연스러운 만남을 한다면 회로가 고장 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미묘하게 마음을 전달한다. 하지만 나는 첫째, 나를 바라보는 것, 미묘하게 전달하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고, 둘째, 긴가민가 할 때 확신을 하지 못했고 나 역시 호감이 있었더라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연애를 시작하지 못했다.


눈빛과 미묘한 행동을 보고 그냥 호감을 전달받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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