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D의 ADHD약 단약기
난 ADHD가 아니라 ASD(Autism Spectrum Disorder)다. 언어능력과 논리력이 뛰어난 고기능 자폐인(High Functioning Autism)이다. 고기능이라는 표현은 웃기다.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능 중 중요한 기능인 '자연스러운 사회적 상호작용' 기능 하나가 빠졌는데, 자폐 치고는 기능적인 대화와 업무가 가능해서 고기능이라고 불린다. 빠진 기능은 사회적 상호작용 말고도 좀 더 있긴 하다.
혼자 있는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공간에서 이 고기능을 발휘하는 동안 웃음기는 싹 없어진다. 주위의 소음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늘 날 긴장하게 한다. 내가 놓친 건 없을까, 잘못 행동한 건 없을까, 늘 긴장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표정이나 맥락으로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게 안되니 저런 표정과 행동은 어떤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걸까 늘 궁금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만 안 들리게 사람들이 소곤댄다면 더 멘붕이다.
그렇다고 안면인식장애 정도라는 건 아니고 웃는 것, 찡그리는 것, 화내는 것, 슬픈 표정 정도는 알 수 있다. 미묘한 표정들, 언짢은 건지, 상관없는 건지 이런 표정들이 어렵다. 멘탈이 붕괴되면 사람을 더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정을 사실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바디 랭귀지나 맥락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게 맞겠다. 이런 건가 싶은데 문제는 확신이 안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유쾌하진 않지만 괜찮은 건지, 엄청 싫은 건지 이런 게 구분이 안된다. 물어볼 사람이 있으면 물어볼 때도 있는데, 내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거라고 괜찮다고 이야기해 줄 때가 많았다. 걱정을 달래 주려고 그러는 건지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 생각을 많이 한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맥락은 잘 못 읽지만 패턴의 불일치에 대한 파악이 빨라서 내가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면 일반인(뉴로티피컬, Neurotypical)보다 타인의 감정 상태를 더 정확히 캐치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상처를 많이 받고 스트레스가 심한 걸지도.
단순 ADHD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중추신경 각성계열 ADHD약 메틸페니데이트 콘서타는 끊었다. 콘서타를 먹는 나는 엉망이었다. 주의력을 향상시켜 준다더니 세상 산만한 중증 ADHD로 만들어줬다. 출근을 해서 아주 낮은 효율로 일을 하다가 퇴근하길 반복했다. ADHD가 ASD의 흔한 공존 질환이기도 하고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ADHD 성향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난 차분하고 일어난 지 3시간 정도 후부터는 집중도 잘하는 편이었다. 아침에만 집중이 안되다가 어느 순간 딱 버전이 바뀌고 집중이 잘 된다고 해야 하나. 공복을 유지하거나 점심때 키토제닉 식단(저탄고지 식단)을 한다면 오후까지 집중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점심때 탄수화물 섭취를 하면 혈당이 올라가고 브레인 포그와 졸림이 유발돼서 2시까진 또 집중을 잃는 상태가 된다. 난 이렇게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잘하고 있었는데 ADHD 오진이 사람을 망쳐놨었다.
메틸페니디에트의 한 가지 장점은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들뜨게 하는 건 아니지만 각성제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에너지가 생기게 하고, 하루 종일 졸리지 않게 만들고, 나의 경우엔 시각적 예민성도 떨어뜨려 사람을 덜 피하게 됐던 것 같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진짜 ADHD처럼 앞뒤 안재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보기도 하고 투약하는 2달 동안 한결 가볍게 살았다. '아, 원래 인생은 이런 거구나. 즐거운 거구나'라고 느꼈던 것도 같다. 알약 하나가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변하게 한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무섭다. 물론 중간에 굉장히 우울해서 항우울제도 먹었지만. 투약을 하기 전에는 ASD들이 주로 하는 '마스킹'이라는 걸 하고 사느라 집 밖에선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시 약을 안 먹고 회사 생활을 하니 확실히 근육통도 더 심해졌는데 근육통의 원인은 비자폐인처럼 나름 매끄럽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늘 긴장하기 때문인 것도 크다.
마스킹 : 자폐인 등 뉴로다이버전트(Neurodivergent)들이 뉴로티피컬(Neurotypical)처럼 보이기 위해 그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방법을 학습해서 모방해 행동하는 것
사회 속에서 너무 피곤하니까 혼자 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게 되고 늘 낮잠이나 휴식이 간절했는데, 그런 점들을 조용한 ADHD의 특성으로 스스로도 오인했었다. 더구나 미세근육을 잘 사용하지 못해 물건을 잘 떨어뜨린다거나 어딘가에 부딪쳐 다치는 경우가 많다거나 이런 점들도 내가 ADHD라고 생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ADHD와 ASD 모두 뇌신경학적으로 소근육 발달 문제가 있다. 주의력 결핍만으로 부주의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소근육 발달 문제로 손가락과 같은 미세 근육을 잘 사용하지 못해 어설픈 행동과 실수를 하는 것이다.
ADHD가 70% 정도 유전이 되는 질환이라고 하던데 가계도를 타고 올라가면 ADHD를 대입하면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성원들이 있어 유전적으로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ADHD, ASD가 실제로 같은 유전자 변이를 공유한다고 한다. 그래서 ADHD 부모에게 ASD 자녀가 태어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친척들 중에 뇌질환이 있거나 의심되는 사람들이 꽤 많아 나의 뉴로다이버전스(Neurodivergence)는 가족력이 거의 확실하다.
또래와 동화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가장 큰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가 제일 힘들었고 부모님이 잘 키워주셔서 그래도 사회에서 그럭저럭 적응해서 살고 있다. 직장에도 여자들이나 또래가 많다면 엄청 힘들 거다. 비슷한 연령대의, 뭔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내면적으로 난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그런 사람들이 매일 같이 다니고 매일 모여서 수다를 떠는 그런 분위기라면 겉도는 느낌과 소외감은 정점을 찍을 것이다.
연애할 때 밥 먹는 것 가지고 까다롭게 굴고 상대방이 약속 안 지키는 것에 예민한 것 말고 딱히 일상에서 티 나는 지점은 없다. 사회에서도 그냥 조용히 살고 있다. 누가 먼저 나를 도발하지 않는 이상 난 내 할 일 잘하고 가끔씩 주변도 돌보는 묵묵한 직원 그뿐이다.
사람의 생각의 프레임은 참 무섭다. ADHD라는 정체성에 2달 정도 심취하다가 유튜브에서 '조용한 ADHD를 진단받았다면 아스퍼거를 의심해 보라'는 내용의 닥터토마토님 영상을 보게 되었고 아스퍼거의 특징에 대해 찾아보니 나 자체였다. 사실 어릴 때도 '페어런트후드(Parenthood)'라는 미드를 보며 내가 아스퍼거의 성향을 많이 공유하는구나 느끼긴 했다. 그런데 내가 공룡이나 파충류와 같은 특정 분야에 꽂혀 거기에 대해서만 계속 말하진 않았으니 아스퍼거는 아니구나 싶었다. 심지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에피소드를 한 두 개 보면서도 '저 정도는 딱 알아챌 수 있는 자폐네. 그런데 자폐가 저렇게 똑똑할 수 있어? 가상 아니야?'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바로 우영우였다. 우영우처럼 똑똑하진 않지만 우영우보단 말투의 톤과 행동이 덜 뉴로다이버전트스러운 우영우. 더 무지했던 건 자폐인이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나란 생각마저 했다는 것이다. 나만 봐도 이렇게나 감정에 섬세하고 눈물과 정이 많은데.
어렸을 때 본 자폐 아동들의 이미지는 종종 기괴한 고성을 내고 상동 행동의 동작이 컸던 것으로 각인되어 있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 학교 친구들 몇 명과 같이 자폐 아동들을 위한 센터에 방문해 자폐아들과 같이 풍물을 꽤 오랫동안 배우고 공연도 같이 했었는데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그들의 습득 능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잘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다 보니까 이들이 사회적인 성숙도도 생각보다 떨어지진 않는구나, 나랑 비슷한 정도인데 싶었다. 알고 보니 나도 같은 스펙트럼이었다. 물론 스펙트럼 장애와 사회적인 성숙도가 비례하지도 않는다. 경증 자폐라면 행동에 통제도 잘 되기 때문에 이들이 반사회적 범죄를 일으킨다거나 집단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다. 자기 세계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타인을 어떻게 괴롭혀야지 이런 생각도 안 한다. 자기 만의 세계에서 재밌는 것들이 많아 그런 시간 낭비는 할 틈이 없다. 진짜로.
나도 상동행동을 한다. 좀 일반인이 보기에 티가 덜나는 행동이어서 그렇지. ASD임을 확신했던 건 감각 이상이 나한테도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상동행동도 이 감각이상에서 나온다. 쉽게 말하면 어떤 감각에 대해선 굉장히 예민하고, 어떤 감각에 대해선 둔감한 것이다. 예민한 감각은 최대한 자극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둔감한 감각은 보상하기 위한 상동행동을 한다. 그리고 긴장했거나 양손으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거의 모든 순간에 어떻게든 손장난을 친다. 원래 하는 상동행동을 억제하려고 하면 다른 상동행동이 나타난다.
고기능 ASD인 동안 나는 고효율로 일을 하고, 일을 빠르게 마치고 남는 시간 동안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메틸페니데이트를 투약하는 동안은 그 반대였다. 아무것도 제대로 못했다. 에너지는 엄청 좋으니 달리기도 하고 글도 쓰고 하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래의 생명을 끌어다 쓰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콘서타는 식욕 저하 효과가 굉장히 큰 편이라, 입에 음식을 넣었을 때 이물감이 너무 심해 약을 한 번씩 증량할 때마다 적응되기 전까지는 밥도 잘 못 먹었다. 적게 먹고 적게 자고 많은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이 줄지 않을까. 한 가지 약의 장점은 수면의 질을 높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수면 시간이 짧아져도 평소 나의 수면의 질보다 올라갔었다. ADHD나 ASD의 대표적인 특징이 수면의 질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낮 동안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면의 질 향상은 수면 시간 감소를 조금 보완해 주긴 했다.
만약 ASD가 ADHD약을 먹고 집중은 할 수 있는데 기분만 좋아진다면, 하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면 생명을 끌어다 쓰든 말든 좀 더 약을 먹어볼 것도 같다.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ADHD의 자유로움을 잠시나마 느꼈다고 해야 하나.
성격도 어찌보면 습관의 결과다. 이런 말과 행동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도 그 행동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약을 끊자마자 다시 사람을 피해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 불편한 것을 말하는 능력은 생긴 것 같다. 이 음식이 먹고 싶다, 이 감각이 불편하다 이런 말을 하는 의사표현 능력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