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다양한 어려움을 마주하면서도 충실하게,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삶에는 그만큼의 밀도 높은 행복이 보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내게도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 . 난데없이. . .
지난 1월, 나는 한 단톡방에서
닉네임 '슬개골 6조각님'이 되었다.
지난밤, 방송 원고를 털었고, 오후엔 오랜만에 만날
후배를 생각하며 들떠있던 아침이었다.
주방으로 컵을 담그러 가려던 순간 '악'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나는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넘어진 순간은 기억나질 않는다.
서 있던 장면, 바닥에 누운 나. 굴러가던 유리컵...
몸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면, 그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순간적으로 신경을 끈다고 하던데
그런 거였을까.
무릎이 뜨끈해져 왔고, 누운 채로 119에 실려 나갔다.
'무릎이 탈골된 건가?'
'골절됐다면 한 달 정도 고생하면 되겠지...‘
하지만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은 무릎은
슬개골이 무려 6조각이 났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피가 차오르고
붓고 있었지만 병원 파업 이슈로 3일이 지나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핀을 5개 박았고 와이어로 슬개골 둘레를 감쌌단다.
무통 주사를 달고도 '살려달라'는 고함을 3일을 치고서야 통증은 참을 수 있을만큼이 되었다.
슬개골은 무릎을 굽히는 곳에 있는 뼈라 일반 골절과 달리 두세 달 후에나 걸을 수 있으며,
뛰고 쪼그려 앉는 등 다시 거의 정상에 가까워지는 데는 2년까지도 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2주를 밤마다 울었고, 급기야 병원에선 수면제나 우울증약을 처방받겠냐고 물어왔다.
불의의 사고나 표현할 길 없는 슬픔을 겪거나
갑작스럽게 병을 얻은 사람들은
도대체 그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디는 걸까?
이제는 나도 웬만큼 맷집이 세졌다 생각했지만
대단한착각이었다.
불행은 매번 낯설었고 아픔도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이 시련은 또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일까?'라는
생각 따윈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들은 일생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다리 수술을 이미
수차례나 했고, 목발이라면 지긋지긋한 나 아닌가?
이제 꽃길인가 싶을 무렵 맞닥뜨린 사고 앞에
배신감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어
나는 차라리 입을 닫아 버렸다.
모두 잠든 병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보면
괴로운 마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시간마다 마려운 소변이였다.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쇠로 된 무거운 보조기에
조심스레 넣고 찍찍이를 하나하나 당겨 붙여
부츠신듯 신은 뒤, 보조기를 찬 다리를 조심히 내려서 목발을 짚고 화장실로 향한다.
다리를 뻗고 변기에 앉아 어렵사리 볼일을 보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보조기 찍찍이를 하나하나 푼 뒤,
다리가 굽혀지지 않게 손으로 받쳐서 올리고 침대에 누우면 온몸엔 진땀이 흐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질 않는다.
그렇게 절망과 통증으로 뒤범벅이 되어 사는 게 말이 아닌 그런 날을 보내던 무렵,
애쓰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놓아버리고 싶은 일이
또 생겼다.
고1이 된 둘째가 자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자퇴라니... 생각해 보지도 않은 단어였다.
최근 자발적 자퇴율이 높아지고 있다고도 하고,
오로지 인생의 목표를 대학으로만 놓고 감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염증을 느낀 부모들은 찬성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적으로 반대였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무난하게 있길 바랐다.
설득에 협박, 회유, 급기야 눈물로까지 호소했지만
결국 아이의 뜻대로 결정이 났다.
왜 내게 연거푸 이렇게 힘든 일이 일어나냐며 달갑지 않은 걱정을 하는 지인도 있었고, 자퇴를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다독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다시 익숙했던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숨었다.
'아이 친구 엄마들이 자퇴했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큰아들 숙제 하나 풀고 나니 더 큰 골칫덩이가 생겼다고 할까'
'다리까지 다치고 참 안 풀린다며 동정할까...‘
다시금 깊은 혼란을 헤매는 날들이 계속 됐다.
그런데...그 무렵 체념과 괴로움의 시간 사이사이,
생각지도 않았던 세심하고도 과분한 선의가 꾸준하게 끼어들기 시작했다.
두 달간의 병원 생활 내내 남편은 출근 전 새벽, 퇴근 후 저녁 나를 살피려 매일 들러 반찬을 사다 채우고
필요한 것들을 날랐다.
거동이 불편한 나를 위해 과일을 종류별로 깎아 통에 소분해서 들고 온 후배,
내가 좋아하던 회사 앞 마라탕 가게에서 마라탕이
식을까 봐 택시를 타고 온 동료 작가,
내 몫을 최대한 나눠서 할 테니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팀원들,
내 마음에 위로가 되길 바란다며 직접 원단을 사서
무릎 흉터가 보이지 않는 길이로 잠옷을 만들어 온
친구,
병원에서 원고를 쓰던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던 간식이라며 간식 상자를 밤늦게 넣어주고 간 막내 작가,
생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온라인 새벽 기도 모임
멤버들의 카톡 선물들,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며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는
날마다 와준 지인들...
'내가 뭐라고 이 고마운 마음들을 계속 주는 건가'
내가 긍정을 놓아버리는 동안
뜻밖에도 내가 놓은 것들을 다시 하나씩 하나씩
손에 쥐어주는 이들이 나를 계속 두드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아한 건 큰아들이었다.
사실 나는 그 아이와 사춘기 이후 관계 회복을
단념했었다.
그간 너무 마음 고생을 했었기에 적당히 소원해진 채 갈등만 없으면 된다 생각했었기에.
그런 아이가 병원에서 볼만한 드라마를 골라주고
대학 캠퍼스 초록이 예쁘다며 사진을 보내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에 오고, 재활하면 얼마든지
이전처럼 될 거라며 응원의 톡을 보내왔다.
내가 바라던 것들이 모두 어긋난 그 자리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일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보조기를 떼고 목발 없이 걷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걸어서 화장실을 다녀오던 날 밤,
나는 진심 100퍼센트의 감탄을 내질렀다.
'아! 진짜 너무 행복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마치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매일 '감사하다'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두 발로 딛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진심으로 감사의 연속이었고, 내 감탄사에 거짓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누구보다 감사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버거운 일투성이에서 억지로 감사를 찾는 행위가 무슨소용인가 싶었고 너도나도 떠들어대는 감사 습관이
못마땅했다.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질문은 '잘 지냈어?'였고
내 대답은 언제나 '그럴리가요' 였을만큼.
그런 내가 매우 낯설게도 점차 ‘감사하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단순히 일상을 회복한 것에 대한 감사만은 아니었다.
계획대로 되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기에
크게 감사하지 않았고
돌발 변수들에만 연연하며 불행해했던
내 마음의 습관에 깊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껏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숱한 일들에 전전긍긍하며 살았구나.
어리석게도 내 영역 밖의 일들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그렇게 마음이 기울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없이
긴장했던 마음에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가기시작했다.
언제나 플랜 A,B,C를 세워야 했던 삶에서 엄청난 짐을 내려놓은 듯한 심리적 해방감.
그건 체념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인생의 파도가 거셀지, 잔잔할지, 언제 올지,
언제 그칠지 애를 태우는 대신
그저 나는 오는 파도를 어떻게 탈지 고민하기만 하면 된다는 각성...
나의 역할을 재규정했고,
나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제 무수한 밤, 알알이 박혔던 불안과 두려움 대신
인생이 흘러가는대로 지켜볼 수 있을 거 같은 용기가 생겼달까.
언제나 한발도 내딛지 못하고 동동거리던 내가 아니라
이 시간이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다리며,
회피하지 않고 성실함을 잃지 않으며 걸어가는 것,
그럴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어쩌면 가장 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중에도
안녕한 시간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