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보낸 그 계절
지난해 하늘나라로 떠난 큰아이의 교회 친구 엄마가 있었다. 어제 그녀의 노모가 갑자기 쓰러져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엄마에 이어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1년 만에 떠나보낸 큰아이 친구.
이제 겨우 스물 한살.
인간이 한없이 무력한 존재라는 걸 이런 순간에 절감한다. 죽음을 예측할 수도 없을 뿐더러 슬픔 앞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을 낱낱이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날들도 그냥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 일은 나이가 많든 적든 예외없이 감당해내야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예약된 건강 검진을 한 오늘. 수면으로 위내시경을 하고 난 뒤였다.
간호사의 말에 적잖이 놀란 나는 종일 여러 생각에 머무르는 중이다.
마취에서 깨고 있던 내가 끅끅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는 거다.
어디가 잘못됐나 싶어 놀란 간호사가 우는 이유를 묻자, 들릴 듯 말 듯 내가 느릿느릿 마취가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단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엄마가 떠난 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간호사는 말없이 등을 쓰다듬으며 휴지를 주었다고.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나는 생각해보니 꿈인가 싶게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았다.
다행히도 그 바쁘고 정신없는 내시경실에서 온기가 남은 간호사의 손이 있어 휴지도 얻었고, 위로도 얻었다.
엄마가 떠난 계절이 오면 늘 아프다던 후배가 있었다.
‘뭐 그럴라고...?’ 싶었는데,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고 황망한 죽음을 준비하던 그 계절이 왔다.
풍경에도, 바람에도, 병원 공기에도 기억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저린 마음을 참... 어떻게, 얼마나 더 겪어야 하나 싶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가을길이 어쩐지 설레지지가 않는다.
택시 라디오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흘러나오고 기사님은 휘파람으로 콧노래를 부르시지만.
엄마와의 이별 이후, 나는 상실에 대한 애도가 너무 본격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너무 보채고 있다는 생각,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압박, 너무 슬픔에 젖어있지 말라는 서운한 위로...
모두들 너무 서둘러 덮고 싶어하는 거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오늘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애도는 아주 오래, 아주 충분히... 그래야 한다고.
그리고, 어쩌면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는 복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이 시린 마음이 다른 무언가로 채워져, 더 깊어진 어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날도 오겠지만
아직은 충분하지가 않다고. 아직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