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시커멓게 변한 한강은 점점 그 수위를 높이며 주변 공원들을 삼켜나갔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폭우에 취약시설이 붕괴되고 저지대가 침수되는 사고가 줄을 이었다.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팔당은 견디다 못해 수문을 열었다. 커다란 입에서 쉴 새 없이 흙탕물을 뿜어져 나왔다. 방류를 시작한 댐과 침수 위험에 노출된 주변 마을 취재를 위해 카메라를 긴급히 차에 실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강을 거슬러 한참을 올랐다. 거센 빗줄기가 차창을 쉴 새 없이 때렸다. 일상 속에 오가며 보던 한강의 모습이 아니었다. 림만 겨우 보이는 공원의 농구 골대를 보니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대강 가늠이 됐다. 겁이 덜컥 났다.
땀이 난 손으로 카메라를 부여잡고 2시간쯤 달려 댐에 어느 정도 다다랐을 때,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조용히 서 있는 응급구조차량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 상황도 물을 겸 내려서 구조대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별 말없이 손가락을 쭉 뻗어 시커먼 강가의 수풀 쪽을 가리켰다.
‘등’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의 그것이었다.
순간 발뒤꿈치부터 정수리까지의 모든 세포가 빳빳하게 서는 기분이었다. 중년 남자의 시신이었다. 곧이어 또 한 대의 구급차량이 도착하고 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황급히 강가로 내려갔다.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차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댐에서 가까운 유속이 빠른 상류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구조대원들까지 전부 휩쓸려 내려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시신 수습에 시간이 걸렸다. 물을 잔뜩 머금은 시신을 무겁고 미끄러워 보였다. 로프로 허리와 팔다리를 감아서 뭍으로 간신히 끌어올렸다. 거대한 나무 밑동을 당겨 올리듯 구조대원 대여섯 명이 맞잡고 안간힘을 썼다. 뭍으로 올라온 시신은 익사 후 시간이 꽤 흐른 듯 보였다. 시신은 사후 경직으로 인해 팔을 앞으로 곧게 뻗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에 빠질 당시에 입고 있던 반팔 상의와 짧은 바지 그리고 샌들까지 그대로 신은 채였다. 마네킹처럼 핏기 없는 새하얀 팔다리가 옷가지 사이로 삐져나와있었다.
막상 카메라를 들고 취재는 하고 있었지만 이를 뉴스로는 내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시신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왼쪽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오른쪽 눈을 뷰파인더에 묻었다. 과학수사대의 간단한 현장 부검과 사망 판정 후에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졌다. 경찰은 며칠 전 가평에서 불어난 강물에 실족으로 인해 휩쓸려 실종된 50대 남성이라고 추정했다. 구조에서 시신 수습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과정들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되는 강렬한 취재였다. 주변 최초 목격자와 경찰 등의 인터뷰를 통해 취재를 이어가려고 했다. 발을 떼려는 순간 카메라에 얹은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이었다. 그다음의 팔당댐 방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를 돌려 서둘러 서울로 복귀했다. 비에 젖은 옷가지는 금세 말랐지만,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펼쳐지는 현장에 대한 기억이 한동안 머릿속을 헤집으며 나를 괴롭혔다.
이듬해 여름, 결혼을 앞두고 와이프와 신혼집 청소를 하기로 했다. 청소도구를 사서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아파트로 향했다. 주차장 출구 쪽 화단 앞에 경찰들과 주민 몇몇이 모여 있었다. 슬쩍 기웃거려 보았다.
아파트 10층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투신을 했다. 추락하면서 부딪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시신은 화단에 쓰러진 채였다.
머릿속 시계가 1년 전 팔당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카메라도 쥐고 있지 않은 오른손이 또다시 굳어졌다. 잊고 지낸 줄 알았던 사건들이 기억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자 속이 울렁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이용해 주변 상황을 찍고 최초 발견자와 평소 가깝게 지냈다던 지인들을 인터뷰했다. 통장으로 활약할 만큼 평소 동네에서도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근래에 들어 어떤 연유인지 급작스럽게 우울증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끝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고 말았다. 보도국 당직자에게 취재된 내용을 보고하고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일반 투신사고의 취재는 나름 경험이 많았다. 그중엔 아주 끔찍한 사고도 더러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도 사고 직후에 모든 장면을 목격, 취재한 터라 충격은 더 컸다. 그 후로 2년간을 살면서 사고가 났던 화단을 지날 때마다 팔당댐 익사사고와 투신사고와 겹쳐져 투영됐다.
‘취재를 포기하고 지나칠걸, 못 본 척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을......’
끔찍했던 당시 기억이 떠오를 때면 몇 번이고 가슴을 때리며 후회도 했다.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단을 빙 돌아서 귀가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트라우마’는 의학적 용어로 큰 범주의 ‘외상’을 의미한다. 이를 따서 심리학에서는 트라우마를 ‘정신적 외상’, 즉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으로 규정짓는다. 강렬한 경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내상을 입는 것이다.
참혹한 사건 현장의 가장 최전선에서 취재에 임하는 카메라 기자들은 늘 이 ‘트라우마’ 가운데 살아간다. 비슷한 취재 환경에 놓이거나, 훗날 사건 현장을 다시 지날 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런저런 기억의 퍼즐들로 힘겨워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그라져 갔을 생명들. 그들을 제 때 도와주지 못한 도의적 책임과 원망. 눈을 감기엔 아직 꿈과 미래가 너무나 많은 가녀리고 여린 생명을 보내는 슬픔.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찢어지는 고통. 그 마저도 곁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카메라를 들이대 취재해야 했던 순간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질 줄 알았던 그 기억의 조각들은 가슴 깊숙이 박혀서 때가 되면 또다시 아물지 않는 염증이 되어 욱신거린다. 잊히지 않는 고통의 기억을 안고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들 중엔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기자들도 다수 있다. 때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현장들을 촬영기자는 온몸으로 뷰파인더에 담는다. 함께 슬퍼하며, 몸부림치며 가슴 깊숙한 곳에 눌러 담는다.
기자는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하며 현장에 대한 목격자로서 기민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나하나 용맹하게 현장을 거치며 생긴 마음의 상처들은 사회를 향한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씨앗이 지금은 싹을 틔우기 위한 거친 몸부림으로 힘겹지만, 분명 밝은 미래로 아름답게 꽃 피워 보답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조각조각 쓰라린 가슴 한 편으로 우리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