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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Her Story -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조선올림픽대회>가 ‘서울운동장 제2코트’에서 열렸는데 우리 이화가 여자농구 결승에서 또 우승했다. 우리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점잖은 표현으로는 기쁜 속을 다 드러내기에 모자랐다. 우리는 점점 우승의 기쁨, 승리의 환희를 알아갔다. 이듬해 4월 25일에는 <제2회 전국종별선수권대회 >가 전주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각 스포츠 종목별 전국 통합 단체가 해마다 농구, 배구, 탁구, 하키 등 종목별 국내 제일인자를 결정하기 위하여 겨루는 가장 권위 있는 전국대회였다. 당연히 전국 중고대학부 농구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국대회였고, 당시 귀하던 라디오로 전국 생방송 실황중계까지 하던 가장 큰 대회 중 하나였다. TV는 존재하지도 않던 그 시대에 라디오 전국 생방송 중계라니 어느 정도 중요한 대회인지 지금도 얼추 짐작할 수 있겠다. 이 대회는 지금까지 이어져서 올해 74회를 맞는다.

결승전까지 며칠 동안 치열한 토너먼트 시합이 벌어졌다. 선수들이 여러 날 동안 전주에서 묵으며 경기를 치러야 해서 주최측의 배려로 우리 팀은 <전주여자고등학교 기숙사>에 숙소를 마련했다. 임시 사감 선생님으로 가정 선생님까지 내려와 기숙사에 함께 머무르며 경기 외에 우리의 생활을 감독하고 돌봐주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전주까지 함께 오지는 못하고 서울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움트는 봄날에 뜨거운 청춘들의 치열한 농구대전의 결과는, 각 부분별로 <배재중학교>, <고려대학교>, 그리고 우리 <이화여자중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져도 괜찮다는 말들을 하지만 수많은 날을 피땀 흘려 연습한 선수들에게 우승만큼 기쁜 것은 없다.  토너먼트를 치를 때마다 거듭 이기고 또 이겨 기어이 우승까지 차지하니 흥분과 감격의 소용돌이가 머리 위 사방으로 불꽃처럼 솟구치는 듯했다.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응원과 함성으로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전국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주장이었던 나는 기진맥진 땀범벅인 상태에 우승의 기쁨까지 더해져 숨이 더욱 턱까지 차올라 흥분에 들떠 있는데,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라디오 전인국 아나운서가 나타나 나를 끌고 중계본부석으로 데려갔다. 갑자기 마이크를 덜컥 들이대고는 우승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얼떨떨해진 나는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고 비장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음!!음!!! 아,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니, 겨우 열여덟 살인 고등학생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프로 선수라도 된 양 말했으니 듣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았을 것만 같다. 물론 방송이 전국에 중계되는 것도 맞고, 조선동포들이 듣고 있는 것도 맞다마는, 우리가 국가대표 선수도 아니고 올림픽 같은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 거창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에 유명 정치인이나 국가대표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듯 내가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외쳐 부르며 우승소감을 늘어 놓았던 것은 그만큼 우승의 기쁨이 하늘을 찌를 듯했고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스럽기도 했겠지만, 지난 뒤 생각해보면 어쩌면 평소에 내 마음 속에는 그만큼의 포부와 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동포 여러분을 외친 다음에 감사합니다, 어쩌고 저쩌고 지절거렸지만 그 뒷말은 뭐라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인터뷰를 마친 후 우승한 세 학교 학생들은 전주 시내로 나가 깃발을 휘날리며 시가 퍼레이드를 벌였다. 고등학교, 대학교 농구 경기에서 우승이 뭐 그리 대단해서 시가 퍼레이드까지 벌였는지 요즘 사람들은 의아해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그 밤에는 대회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젊음의 열기로 전주 시내가 들썩들썩, 왁자지껄했다. 순수의 시대, 우리 기쁜 젊은 날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날 기차는 보무당당하게 우승기를 앞세운 우리를 태우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플랫폼까지 이미 환영 인파가 가득 들어차 있어 깜작 놀랐다. 교장, 교감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 학생 대표들이 특별 허가를 받아 플랫폼까지 들어와 선수들을 환영하느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는 환영단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열차에서 내릴 겨를도 없이 우리는 영광의 우승기를 기차의 좁은 차창 밖으로 내밀어 환영단의 머리 위로 흔들어댔다. 우승을 고하고, 환영을 외치는 함성이 한데 어우러져 서울역이 터져나갈 듯했다. 주장인 내가 우승기를 앞세우고 모든 선수들과 함께 서울역 문을 나서자 전교생이 서울역 앞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교생이 환호를 터트릴 때 그 감격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서울역에서 정동 이화여자중학교까지 또 시가행진을 했다. 나는 우승기를 들고 앞장서서 선수들과 걸었고 뒤로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따라서 행진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참으로 순박하고 순수했으며 소박한 낭만에 흠뻑 빠져서 웃고 기뻐하고 행복해 했다. 목표를 향해 기를 쓰고 노력하고 목표를 이룬 뒤에 오는 짜릿한 쾌감에 흠뻑 취했던 날들이다. 삶 속에서 늘어지는 긴 여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이런 최고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그마한 키였지만 퍼레이드에 앞장서서 걸어갈 때는 승리의 흥분과 젊은 기운에 우승기가 무거운지도 몰랐다. 교장 선생님 이하 전교생이 힘든지도 모른 채 학교까지 신나게 걸어갈 수 있었음은 우리 안에 솟구치는 우승이 가져온 엔도르핀 덕분이다. 이날 승리의 주인공인 농구부원들은 커다란 꽃다발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걸었다. 우승기를 들고 가는 나는 꽃다발을 안지 못했다. 우승기를 들고 앞서가는 영광도 좋았지만 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터라 내심 그 예쁜 꽃다발을 안지 못한 것이 한편으로 아쉬웠다. 지금도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예쁜 꽃다발을 들고 걷지 못해서 꽤나 섭섭했나 보다. 내 기억에는 이 행사 이전에는 커다란 축하 꽃다발을 본적이 없었다. 광복 후 이런 큰 행사에서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준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즈음부터 축하 행사에서 꽃다발을 주는 관습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고 우리 이화학교가 시초가 되었다고 추측해본다. 

전교생이 퍼레이드를 마치고 속속 학교 운동장에 들어왔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도열했고 연단에 올라서서 교장 선생님과 학교에 우승기를 전달하는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때의 흥분이란 다시 생각해도 격한 감동이 가슴에 한가득 몰아친다.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했다. 서명학 교감 선생님께서 나를 붙잡고 함박 웃음을 띠며 “우리가 중계 방송을 들으면서 “정숙아~! 정숙아!” 응원을 하다가 라디오를 하두 두드려서 라디오가 다 부서질 뻔 했단다. 얘, 네가 우승소감에 ‘전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했지? 하하하 ”라면서 내 등을 두들겼고 다 함께 폭소를 쏟아냈다.

내가 이화여자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세상은 급속도로 변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 다른 것으로 이동했으며 이화 농구 열기도 사그라들었다. 우승한 후 25년쯤 지난 어느 해 5월 30일, 이날은 이화학교의 창립기념일이다. 출근하는 택시 안에서 ‘25년 만에 이화가 농구 우승기를 되찾아 왔다’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듣는 순간 회사고 일이고 뭐고 깊이 고려할 겨를도 없이 그 길로 택시를 돌려서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로 가자고 했다. 학교에 들어가니 마침 노천극장에서 우승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놀란 임원식 음악 선생님이 맞아주고, 신봉조 교장 선생님은 기꺼이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하더니 “25년 전 우승했던 주장 6번”이라고 전교생들에게 소개했다. 회사 출근 길에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이 중요한 날, 감격스러운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농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음에 대한 하늘의 보상이었는가 싶다. 


1947년 전주. 제2회 남녀종별농구선수권 대회. 누군지 모르겠으나 모눈 종이에 사진을 붙이고 기록을 남겨서 전해주었다. 아직 간직하는데 일부는 찢겨나갔다.
수상하고 있는 6번 주장인 나.
1946 조선올림픽대회 우승 후 조선일보에 난 사진. 나는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아래는 이상훈 코치.
1947년 올림픽 대회 하프 타임. 다리를 두들기고 있다. 나는 가운데 고개 돌리고 앞을 보는 선수.
위 사진 뒷면 기록.
1947년 봄,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종별선수권대회 참가하여 우승하고 돌아와 서울역에서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플랫폼에 나온 이화중학교 대표들. 나는 왼쪽에서 다섯 번째.
위 사진 뒷면 기록.
경기가 열린 전주. 전주 여중고 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은 함께 내려온 사감선생님.나는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경기를 위해 사감 선생님으로 내려오신 차 선생님. 
조선 올림픽 대회 우승 기념 사진. 친구들과 농구부원들과. 나는 앞줄 가운데 공을 쥔 흰 운동복 입은 선수.
1947년 11월 2일 아침. 대구역. 대구에서 농구대회. 기차 문에서 내려다 보는 우리들.
위 사진 뒷면 기록.
1947년 4월 25일 전주에서. 전국종별 남녀농구대회. 나는 왼쪽에서 세 번째 머리 한 갈래로 묶은 선수.
위 사진 뒷면 기록.
전주에서 우승 후 서울역에 도착, 정동 이화여자중학교까지 걸어서 전교생이 행진. 교정에서 우승기 전달 식 진행 중. 나는 우승기 앞 작은 학생. 신봉조 교장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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