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 시절부터 검은 가운을 입고 검은 베레모를 쓰고 팔레트를 든 화가를 동경했다. 엄지손가락을 팔레트에 끼고 오른손에 붓을 들고 그림을 척척 휙휙 그리는 아티스트의 겉모습만 보고 매료되어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화가의 삶과 고충을 알지 못했고 소학교 때 ‘참 잘했어요’ 평가를 받아 게시판에 붙여진 홍당무 그림 한 장이 계기가 되어 화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들떴음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상상만으로는 이미 화가가 된 듯싶었다. 그래서 이화여자중학교에 올라와 농구부 주전을 뛰면서도 미술부에 들어갔다. 미술부원인 나는 수업을 마치면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곧장 미술실로 달려가 1등으로 도착했다. 다른 아이들이 오기 한참 전이다. 문을 열면 항상 이인성 미술 선생님이 계셨다. 내가 뛰어올라간 붉은 벽돌의 교사(校舍)는 <심슨홀>로 불리는데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의 3층에 미술실이 있었다. 나는 매일 그림을 한 장씩 그렸고 선생님은 지도해 주셨다. 수채화, 유화, 목탄화, 크레파스화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 색상, 질감의 물건, 풍경, 인물을 표현해 보라며 이끌어주셨다. 하얀 비너스상도 마련되어 데생하는 법, 붓이나 연필을 든 한 팔을 높이 들고 멋지게 사물의 사이즈를 재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미술실에는 내게 배정된 이젤이 있어서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그대로 세워두고 갔다가 다음날 와서 계속해서 그렸다. 미술부 전원은 각자 자기의 이젤이 있었고 뭔가를 배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시기에 이런 시설을 다 갖추고 예술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뿐이다. 그때 미술 선생님이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이인성 작가였는데 나는 선생님의 애제자이기도 하고 수제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광복이 되니 이런저런 변화가 많았다. 새로운 교복 디자인도 그런 변화 중 하나였다. 이인성 선생님이 디자인을 주도했는데 나름대로 지난 시대와는 획을 그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새 디자인의 교복 샘플이 나오면 꼭 나를 불러서 모델처럼 입어 보게 했다. 키가 작은데 모델이 가당치 않다고 말씀 드리면 선생님은 “정숙이가 우리나라 표준 키야”라고 북돋우며 새 교복을 처음 입는, 요즘 말로 피팅 모델 역할을 계속 시켰다. 선생님은 내가 입은 교복을 보고 다른 선생님들과 상의하여 수정을 가하고 최종 디자인을 결정했다.
한 번은 신봉조 교장 선생님이 전교에서 '수秀'인 학생 한 명을 뽑으라고 선생님들에게 지시를 내린 결과를 발표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수는 박정숙"이라고 갑자기 호명하여 깜짝 놀랐다. 나중에 들으니 특히 이인성 선생님이 강력히 추천해서 최종 학생으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학업과 병행하여 다양한 특별 활동을 부지런히 해나가는 나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목격하는 분이었다. 자칭 애제자라고 하기 뭐하지만 이 실례가 조금 뒷받침해주겠지 싶다.
학창 시절에는 미술 담당 선생님으로만 알았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 2012년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작가를 재조명하는 <화가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 회고전>이 대대적으로 열렸을 때, 나의 선생님을 ‘천재 화가’라 불러서 정말 놀랐다. ‘내가 천재 선생님께 특별한 개인 지도를 받았던 셈인가요?’라고 몇 번이나 자문할 정도였다.
천재 화가에게 배웠는지도 모른 채 내 나이 여든넷이 되던 2012년의 이인성 회고전에서 남겨진 작품들을 보면서 선생님께서 재료와 도구를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주려 하셨는지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민속적인 것을 제일 먼저 그리라고 했고 내가 그렸던 그림들은 선생님의 작풍(作風)을 자연스레 답습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선생님은 우리 것에 대한 진한 사랑을 소리 없이 표현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나는 당시 윤리, 도덕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修身)' 교과서에서 봐 둔 '아버지와 아들이 산소에 가서 절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었다. 이 그림을 포함해서 나의 그림과 몇몇 아이들의 작품 몇 점을 일본으로 보냈다. 왜 보냈는지,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6·25 전쟁이 터진 그해 11월경,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선생님을 향해 정치적 반대파인 누군가가 총을 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학교 교정에 어린 맏딸을 데리고 나들이도 오던 선생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을 세상에 남기고 갑자기 그렇게 떠나셨다. 전쟁의 난리통에 그 천재성을 더 발휘하지 못하고 더 많은 작품을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말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38년의 짧은 인생이었음에도 덕수궁 이인성 작가 회고전에 전시된 수많은 작품들을 보니 학교에서 우리를 열성적으로 가르치던 업 외에 화가로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업 활동에 몰입했는지를 뒤늦게 엿보게 되어 작품 앞에서 숙연해졌다.
지금 돌아보면 말도 못 하게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매일매일 가슴속에서 어떤 열의가 솟구치던 시절이었다. 매일 미술실에 1등으로 달려가 그림 한 장을 그려 놓고 미술실 창밖을 내려다보면 그제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슬슬 걸어 나오는 농구부원들이 보였다. 그러면 나는 또 냅다 달려 내려가 농구팀에 합류했다. 매일 그림을 그리고, 매일 연습하고 여름 방학에는 합숙 훈련을 하러 월미도 같은 먼 곳에 가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공부해야 하니 운동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작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에도 농구팀을 이어갈 선수들이 없어서 농구부가 아예 사라졌다. 그런데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 중 하나는 어린 시절에 운동으로 몸을 다지고 건강한 신체를 만드는 것이며 또한 미술, 음악을 접하며 정서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길고 긴 인생길을 헤쳐나갈 때 의지할 건강한 심신을 우선 세우는 것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