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연희대학교로 시험을 보러 갔다. 지금도 변화와 변동의 시대이지만 당시는 격동과 격변의 시대였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거듭 바뀌곤 했다. 그해에만 졸업과 입학시험을 6월에 치렀다. 대입 시험은 지원한 대학에 가서 한 번만 치르면 되었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서는 캠퍼스를 구경하러 다닌 것을 증명하듯 엄지 손톱 네 배 만한 크기의 옛 사진들이 아직도 앨범에 있다. 옛 앨범을 들여다보면 낯설게 다가오는 사진에 눈길이 더 간다. ‘이런 사진도 있었나’, '뭐였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사진 속에서 어린 나를 발견하고 떠오르는 대로 설명하고 해설을 붙이는 재미가 있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는데 캠퍼스 구경을 하러 다니며 사진을 찍는 여유도 부렸나 보다.
나는 계획대로 영문과를 지원했다. 합격 발표일에 학교에 가니 게시판 합격자 명단에 나의 이름과 수험 번호가 눈에 딱 띄었다. 펄쩍펄쩍 뛰도록 좋았다. 곧이어 6월 10일에 입학식을 하고 등교했다. 부모님은 내가 무엇을 해도 아이가 좋아하니 하나 보다,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받아들였고 대학에 합격하여 일단은 좋아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부담이 안 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나의 입학은 전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어쨌든 부모님과 언니가 급히 마련해서 첫 등록금은 해결되었고 나는 꿈을 잔뜩 품은 여대생이 되었다. 내가 도전하고 시도한다고 했을 때 믿고 밀어준 부모님과 언니에게 항상 감사한다. 여학교에만 다니다 처음으로 남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니 강심장을 갖고 용기백배해서 임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영문과에 입학한 네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고 전체 학과 인원 중 여학생 수는 10분의 1을 차지하지도 못했다. 영문과에는 위로 세 기수의 여자 선배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A반, B반으로 나뉘어 국문과, 영문과, 사학과 학생들은 A반에서, 정치외교학과, 철학과, 신학과 학생들은 B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화여자중학교 출신은 나, 내 친구 고현옥, 박화양이 영문과에 들어갔다. 영문과 신입생 4명 중 3명이 이화여자중학교 친구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숙명여자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이화여자중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해서 랭킹 1위로 기록된 내 친구, 육상 선수 장석호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장석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석호는 가업을 잇게 되었다. 후에 석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의사 생활을 했는데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연희대학교에는 남자 농구부만 있기도 했지만, 대학에서는 운동은 그만 두고 공부만 하기로 해서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대학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학교에 가려면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북아현동에서 내렸다. 북아현동 언덕을 넘어 이화여자대학교를 지나 걸어 다녀야만 했다. 이화여자대학교 후문에서 연희대학교에 이르는 큰길은 닦여 있었지만 벌건 흙길이었다. 주변에는 논과 밭도 있고 비 오는 날에는 붉은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길고 먼 길을 걸어 다니다 보니 자연히 발걸음이 빨라졌다. 운동으로 다져져서 그랬는지 친구들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오토바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체력, 근력이 좋아서 발걸음이 오토바이처럼 빠르기도 했겠지만, 내 앞에 펼쳐질 대학 캠퍼스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미래를 향한 내 마음이 나를 오토바이처럼 빨리 내달리게 했던 게 아닐까.
얼마 후 학교 앞까지 바로 가는 버스 비슷한 운송수단이 생겼다. 요즘 버스와 비교하면 사실 버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필리핀에서 많이 보는 ‘지프니’처럼 트럭을 개조한 버스였다. 문은 뒤쪽에 나 있었고 양쪽으로 길게 좌석이 놓여 있었다. 버스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지나왔다. 연희대학교가 남녀공학이 된 지 겨우 4년이 되었던 때라 트럭 버스를 타고 가면 연희대학교 남학생들은 ‘젠틀하게’ 우리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럴 때면 이화여자대학생들이 삐죽거리며 시샘을 했다.
교문에서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면 맞은편에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 위에 우리 문과대학 건물이 있었다. 문과대학 건물을 마주할 때면 온 세상이 밝게 보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올랐다. 나는 영문과 교수의 꿈을 품은 1학년 대학생이었다. 나이 든 눈으로 봐서 그런지 요즘 20대 초반의 아이들은 정말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우리 때는 나이 스무 살만 되어도 제법 의젓했다. 큰 꿈을 키우려 했고 포부가 컸던 대학생이었다. 교수가 되려고 공부만 해야지 하고 거듭 마음먹었다. 옛 사진 속 표정이 진지하고 심각하니 더욱 그리 보인다. 백양로를 따라 문과대학까지 걸어 다니는, 의욕이 충만한 신입생이었다.
시대가 급격히 변화하는 와중에 살고 있기도 했고 매일의 일상 속에서 급변하는 뭔가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갔다. 당시에는 손바닥 뒤집듯 자꾸 뭔가 바뀌었지만 학교 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나는 짧은 반 치마 한복도 입었다가, 양장을 입고도 학교에 다녔다. 크리스천은 아니었으나 매주 노천극장에서 진행되는 예배시간에도 참석했다. 이화여자중학교 시절에는 미션스쿨이라 정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곤 해서 거부감은 없었고 대학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의미 있게 다가왔으며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푸릇하게 올라온 캠퍼스 잔디밭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앉아 머리를 맞댔던 나날들에는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옛 사진들을 다시 들추어 보니 매일매일이 밝은 시절만 같다. 사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