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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28. 2019

My story - 엄마는 신여성?

1955년 즈음,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양장 차림으로 직장에서 근무 중이거나 종로통을 걸어가거나 아버지와 데이트하는 사진을 보여주면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머니가 신여성이시네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전하면 엄마는 항상 양미간에 약간의 힘을 주며 강한 부정을 한다. "신여성은 아니지. 신여성은 우리보다 한참 위야."라고 딱 잘라 말한다. 1929년,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났으니 지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살았을 것만 같은데 엄마는 "요새랑 비슷했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하며 엄마의 젊은 시절을 요즘 시대로 편입시키는 발언을 하여 나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든다. 세탁기가 없는 시대이니 천이나 빨래터에 나가서 빨래를 했고, 김동환의 시에서 접했던 북청 물장수가 부엌까지 물 배달을 하고 배달된 장작을 패주는 사람이 일해주던 그때와 지금이 어찌 같다고 주장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 시대는 정말 어땠을까.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엄마가 기억을 잘할 수 없던 아가 시절의 세상에는 손목시계, 전차, 기차, 자전거, 인력거, 버스, 전기, 커피, 다방, 코티분, 임대용 포드 승용차, 영화관 '단성사', 레코드 판, 대중목욕탕, 아이스케이크가 등장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전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다니고 있을 거 다 있었어."라고 엄마는 강조한다. 기계적이고 디지털적인 문명의 산물은 빼고, 엄마 말대로 있을 것은 다 있던 시대가 엄마의 어린, 젊은 시대였다. 앨범을 넘기며 조그마한 흑백 사진들을 보니 우리 세대들이 등하교를 하면서 신던 하얀 운동화를 신고 엄마는 맨땅의 농구장에서 미끄러워 넘어지며 운동을 했다.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운동했던 시대도 아니고 있을 것은 다 있었는데 다만 기술력이 좀 부족했다는 말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일상생활에 들이는 각자의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육체노동의 비중이 컸던 시대가 아닌가 상상하고 추측해본다.

나의 친가, 외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태어난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을 한 번 들여다봤다. 고종의 아관파천 감행, 독립협회 결성, 독립신문 창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 개최,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대관식, 덕수궁 함녕전 전화기 설치, 미국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트 탄생, 화가 나혜석 탄생 등의 기록들이 있다. 나의 친할아버지가 십 대가 되었을 때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엄마의 주장은 조선시대와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신문물을 받아들이던 시대가 겹치는 시기에 재빨리 신조류에 편승한 사람들을 신여성,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엄마 선배의 선배들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모 혹은 조부모의 시대쯤이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신여성의 개념이 개화기 초기 여성쯤으로 정리되어 있는 듯하다.

엄마가 태어난 1929년에는 화가 김창열과 영화감독 김수용,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안네 프랑크, 마틴 루터 킹이 태어났다. 7년 후인 1936년, 엄마가 무릎길이의 한복을 입고 유치원에 들어가는 해는 일제가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들어가는 해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고, 그해 이상은〈날개〉를 발표했다. 인구에 회자되며 활동하고 있던 당시 젊은 어른들, 어린 엄마의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트렌디한 사람들이 엄마에게는 신여성이고 신남성이다. 엄마가 태어난 해 이전과 근접한 이후에 이미 성인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신여성의 기준으로 삼는 듯하다. 이상의 아내인 수필가이자 화가로 활동한 변동림(1916년)이나 화가 나혜석, 가수 윤심덕 같은 인물들이 그 예가 되겠다. 그들은 엄마 기준에 앞선 시대 어디쯤에 위치했다. 좁게 보면 1900년대 전후를 신문물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내 눈에는 1929년을 포함하여 광복을 맞던 1945년까지도 그런 신문물, 신여성, 신남성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의 기운이 쇠하면서 신문물이 마구 몰려오고 확산, 변질, 발전하고 어느 정도 정착하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따지고 보면 최소한 50년은 잡아야 할 것 같음은 내 생각이다. 그러니 넓게 봐서 엄마도 신여성에 포함될 듯한데 왜 한사코 아니라고 하며 단호하게 직전 세대와 명확한 선을 그으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을 찾고 이렇게 불리던 여성들을 찾아보며 추론해봤다. 강력히 거부하는 이유를 굳이 말씀하지 않으려는데 내 나름대로 얼추 짐작컨데, 엄마의 정서와 신념상 당시에 통용되던 단어 '신여성'이 포함하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생활이라는 부정적 의미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판단했다. 아무튼 엄마는 당신이 신여성이 아니고 서울의 평범한 요새 보통 사람임을 누차 강조했다.

앨범은 1950년에 받은 선물. 직장 시절,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시계를 들여다 보고 종종 걸음을 걸었다. 종로나 광화문통. 
남편과 데이트하던 시절. 뒤로 전차가 보인다.
남편과 데이트하던 시절. 가을인가 보다.
일하다 점심시간에 나온 듯.
동생(우)과 함께 무심히 걷는데 거리 사진사가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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