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부가 30대 초반이나 되었을 텐데 남쪽으로 가는 피난길을 앞장서서 도맡았다. 인천까지 가는 교통편과 부산행 배편을 서둘러 주선했다. 부산행 배를 형부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구해냈다. 지금 생각하니 많지 않은 나이에 이런 세파는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형부는 나서서 척척 해냈다. 부모님, 작은집, 외삼촌네, 고모네…, 그리고 우리 세 자매, 언니의 포대기 속 갓난아기 아들 등 전 식구를 배편에 태워 보내고 형부는 부산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겠다며 트럭을 빌려 타고 육로로 내려갔다. 바닷길이든 뱃길이든 쉬운 길은 없었다. 전쟁 중이기도 했지만 부산까지 갈 만큼 제대로 된 큰 배도 아니었고, 고속도로도 없던 시대에 산을 끼고도는 험한 육로로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온 국토가 전쟁통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울내기들이 부산까지 가야만 했다.
겨울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던 11월 말, 70톤 정도의 작은 배에 총 200여 명이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남편들은 전장에 나가 있다는 군 장성급 아내들과 아이들도 타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민군이 점령했던 서울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얼굴에 묻어났다. 우리는 모두 굳어 있었다. 부산까지 가려면 뱃길로 최소한 닷새는 걸린다. 선상에서 삼시 세끼 고스란히 차려 먹을 수는 없지만 목숨을 유지하려면 뭔가는 먹어야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끼니를 챙기려는 궁리를 하지 않았고 어른들이나 늙은이들은 그저 흔들리는 배 위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이러다 부산까지 가기도 전에 탈진하거나 굶어 죽겠다 싶어 스물한 살짜리인 내가 당돌하게 나섰다. 누구나 쌀 보따리는 어느 정도씩 끼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들고 탄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과 가마솥까지 눈에 띄었다. 갑판 위에서 밥을 짓기로 했다. 가장 어린 뱃사람에게 쌀을 거두라고 시켰다. 물은 떨어진 상태였다. 원래 인천과 강화도를 왕복하던 작은 배라서 물탱크도 작았고 200명이나 탔으므로 식수가 남아날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바닷물을 퍼서 밥을 지었다. 밥은 찝찔했고 설었다. 다행히 여름에 마당에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밥을 지을 때 불에 익은 숯을 꺼내 솥뚜껑 위에 얹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그대로 했더니 맛난 밥은 아니라도 그나마 먹을 만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집집마다 가져온 그릇에 다 퍼서 나누어주라고 어린 뱃사람에게 일렀다. 그런 밥이라도 다들 다툼 없이 잘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밥 짓기를 몇 차례나 했는지 모르겠다. 반찬이 있었냐고? 나도 모르겠다. 반찬까지 걷고 나눌 생각도 그런 여지도 없었다. 김치 같은 것을 챙겨 온 사람들은 꺼내서 알아서들 나눠 먹었을 것이다. 밥만 해서 나누어주었는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더 먹겠다고 더 달라고 다투지도 않았다. 각자 싸온 반찬이나 고추장, 된장 같은 것도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찬이 없더라도 바닷물로 지어서 찝찔한 맛에 주먹밥처럼 먹었을 수 있었다. 배에 함께 탄 우리 모두는 한계 상황의 극한치에 서있었으므로…
기우뚱거리며 배는 충남 서산에 도달했다. 바닷가에 배를 대던 중에 뭔가에 부딪쳐 배가 45°나 기울었다. 우리는 배의 제일 아래층에 짐을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가는 중이었다. 아가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언니가 엉덩이가 차갑다고 해서 깔고 있던 요를 들추고 일어나 앉은자리를 보니 짐보따리 사이사이로 이미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배가 기울면서 물이 빠지는 관을 통해 역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꼭대기 층의 뱃사람들의 선실로 뛰어 올라가서 주먹으로 창을 마구 두들겼다. “물 들어와요. 물이 새요.”라고 소리쳐댔다. 뱃사람이 선실을 활짝 열어젖히며 나오는데 들여다보니 그들은 거기서 화투놀이를 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무게를 줄여야 한다며 묻지도 않고 짐들을 잡히는 대로 마구 바다로 내던졌다. 활명수 박스뿐만 아니라 누군가 부산에서 장사하려고 실었을 법한 물건 박스들이 비좁은 통로와 갑판에 잔뜩 실려 있었다. 짐짝 중에는 재봉틀마저 있었다. 누구의 물건인지 가리지 않고 한참을 던지고 나니 배가 휘청 흔들리며 우뚝 섰다. 사촌오빠의 큰 가방도 쓸려나간 듯했다. 어두운 밤, 검은 바다 위로 광목에 쌓인 허연 짐보따리들과 둔탁한 덩어리들이 둥실둥실 떠갔다. 배가 침몰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감사해야 할까, 짐이 흘러갔다고 안타까움에 슬퍼해야 할까. 어느 누구도 내 짐을 왜 던졌냐고 불평하며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가장 소중한 모두의 목숨을 오늘도 건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배는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다음에 배를 댄 곳은 최근에 찐빵으로 유명해진 안흥이었다. 선원들은 다들 내려서 각자 재정비하라고 했다. 처음 가는 피난 항해 길이라 어느 누구도 선경험은 없었다. 되어가는 대로 맞춰서 헤쳐 나가야 했다. 배에 탄 200여 명이 모두 내려서 뿔뿔이 흩어졌다. 근처의 주민들한테 방을 빌려서 젖은 옷가지 빨래를 했고 먹거리를 구해서 밥을 해 먹었다. 한 이틀을 안흥의 빌린 방에서 머무르며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떠나는 날 어떻게 떠나는 시간을 잘 알고 모두 모여들었는지 200여 명은 다시 배에 올랐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다시 향했다. 한참을 가다가 식량을 구하고자 목포에 잠시 섰다. 사촌오빠가 그곳에서 쌀을 사서 실었고 다른 사람들도 식량을 마련했다. 그리고 통영에서도 멈추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충무공을 모신 충렬사에 잠시 다녀왔다. 피난길에 이런 여유가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 할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닷새면 도달하는 거리인데 열엿새 만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착했다. 200여 명의 생존자를 태운 우리 배는 잭 스패로의 ‘블랙 펄’처럼 항구로 서서히 들어갔다. 서산에서 우리를 앞질러 가던 배가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우리 배가 난파되었다고 항구에 소문을 냈다. 나의 형부는 그 말이 믿기 어려워 매일 부두에 나와 바다를 내다봤다고 했다. 부두에서 그 소문을 먼저 들은 나의 형부는 매일 부두에 나와 퉁퉁 부은 벌건 눈이 되어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던 참에 멀리서 들어오는 우리 배를 보게 된 것이다. 배가 침몰했으면 형부는 아기를 포함해서 처가와 사돈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을 한꺼번에 잃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나 싶다.
부산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순식간에 휙휙 제 갈 길을 찾아가 흩어져버렸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울내기인 우리는 부두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형부가 먼저 와서 봐 둔 방으로 어른들이 먼저 가보고 부둣가 근처에 전 식구가 살 방 세 개에 세 들기로 결정했다. 들고 간 보따리만 풀어놓고 살았다. 그렇게 어리바리한 서울 촌뜨기들의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많은 식구가 어찌 살아냈던 걸까.
한 달, 두 달, 1년이 지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부산은 우리가 상상하는 전쟁 현장과는 달리 전쟁이 없는 지구상의 어느 도시에서처럼 하루하루 일상이 진행되었다. 물론 긴박감, 두려움, 공포, 우울함은 등 뒤를 서늘하게 잡아당겼지만 삶은 이어졌다. 전쟁 물자는 부산항으로 속속 들어왔다. 경상도 사투리가 공중을 가르고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어온 이방인들이 치열하고 처절하게 끌고 가는 삶은 부산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전쟁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언제 끝을 보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대부터 뿌리내리고 살던 내 도시에서와 달리 일상이 참으로 서럽고 어설프게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절망 속에서 좌절과 포기를 하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을 것도 아니었다. 깨진 바위틈에서도 이름 모를 새싹은 트고 야생화가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서글프지만 삶을 다시 시작했다. 마치 영화 시리즈 물처럼 그다음, 그다음으로 삶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