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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Her Story - 저기 이화 6번 간다!

창신 소학교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저학년 아이가 걷기에는 거리가 좀 멀었다.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동덕여자 중고등학교>의 무척 높은 학교 담장을 따라가야 했다. 담장 옆 거리 한편의 큰 우물 근처에 서면 그 학교 높은 담 위로 불그스레한 큰 공이 휙휙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하얀 판때기 앞에 굵은 그물로 엮은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주머니 아래는 뚫려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커다란 공이 하늘로 휙 날아와서는 그 망태기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게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푸른 하늘을 가르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커다란 밤색 공이 망태기 속으로 쏙 들어갈 때면 왠지 모르게 활명수 가스가 속에서 터져 나오듯 시원했다. 누가 어떻게 던지는 건지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공만 허공을 가르며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다가 망 속으로 쏙 쏙 빨려 들어갔다. 호기심도 자극했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매일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운동일까?’ 몹시 궁금했지만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 ‘언니’가 되면 저런 큰 공놀이를 하는구나, 나도 나중에 저걸 꼭 해 봐야지! 해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허공을 가르는 공을 볼 때마다 쌓여 갔다. 그때는 그 큰 공놀이가 농구라고 불리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전학 간 첫날, 이화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 바로 그 망태기 골대가 한두 대도 아니고 줄지어 서있어서 깜짝 놀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화에는 농구부와 농구 골대가 이미 몇 대 있었는데, 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즈음 어느 학부형이 학교 농구부 격려 차원에서 농구 골대를 12대나 기증한 것이었다. 이화여자중학교에 오니 학교와 선생님들이 펼쳐 보여주는 것이 많아 신문물을 끊임없이 대하는 것 같았다. 맘껏 배울 수 있는 드넓은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특활반을 지원하는데 망설일 것도 없이 농구부에 바로 신청했다. 비록 노천이었지만 여학교에 농구 골대가 십몇 대나 있어서 이화농구팀이 충분히 연습하고도 남았다. 심지어 연희전문학교 상대 출신인 우리 중학교 이상훈 농구 코치의 인맥을 따라 연희전문 선후배 농구 선수들까지 우리 학교에 와서 연습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인 데다 초등학생 때부터 마음에 품고 동경하던 그 공을 만났으니 내가 농구부에 들어가는 것은 운명처럼 당연했다. 6년을 오가며 담장 너머 날아다니는 농구공을 바라보면서 ‘저걸 꼭 해봐야지’ 꿈꾸긴 했어도 이화여자중학교에 전학해서 농구를 진짜 하게 될 줄은 그때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점쟁이라도 나의 미래를 못 맞췄을 것이다. 인생이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가면서 한 번도 한 치 앞을 미리 알고 나아간 적은 없었다. 성장하면서 십 년, 이십 년 산 후에 학창 시절, 직장인 시절을 되돌아보니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기회가 주어졌고, 열심히 하다 보니 길이 조금씩 열려 갔음을 확인했다. 하고픈 걸 간절하게 생각하니까 원하는 바를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기회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펼쳐졌고 꿈은 대부분 갑자기 이루어진다.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다가오는 일들 중에 내가 하고픈 것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고 나는 나의 길을 걸어나갔다.

열대여섯 살의 나는 짧은 반바지 운동복에 농구화를 신고 맨 흙바닥의 코트를 무진장 뛰어다니며 몸을 사리지 않고 연습했다. 거친 모래 흙바닥에서 뛰고 구르고 하다 보니 하루도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맨날 피딱지가 앉았고, 딱지 위에 또 상처가 나서 멀쩡한 날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몇 해나 지나도 무릎의 흉터는 깊게도 자리잡아 사라지지 않았다. 운동한다고 하도 뛰어다녀 운동화 밑창은 맨날 떨어져 나갔다. 운동화가 귀하던 시절인데 그래도 부모님은 운동화 밑창 닳는다고 혼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대체 어찌 지내고 뭘 하기에 운동화가 다 뚫어질 정도인지 묻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성격상 운동도 열심히 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여자아이가 무슨 농구를 하냐 거나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말라 간섭하지 않았다. 방목하듯 내버려 두어도 딸이 옆길로 샌 적도 없고 거짓말한 적도 없고 학교 생활에 몰입하고 있으니 그저 믿어주었을 것 같다.

나는 농구를 하기엔 키가 작은 편이었는데 우리의 ‘탱크’ 이상훈 코치 겸 감독님은 ‘항상 머리를 쓰라’고 말했다. 코치님이 늘 해주던 조언, ‘농구는 머리로 하는 거야’라는 말씀은 나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말을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도 해주었다. 포지션이 포워드인 나는 코치님 말씀대로 머리를 써서 골 밑까지 파고 들어가 점프 슛을 날리며 작은 키의 단점을 나만의 슈팅 기량으로 보완했고 경기장에서 점수를 올렸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살아오면서 코치의 말씀을 오랫동안 곱씹고 오래오래 삶의 교훈으로 삼았다. 

농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나는 농구부 주장까지 맡게 되었고, 등번호 6번을 달고 학교 대항, 전국체전 등 각종 시합에 출전했다. 나의 영향으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특활반에서 농구를 할 때도 나의 번호였던 6번을 달고 뛰었다. 나는 키는 작아도 장신의 숲을 뚫고 달리고 점프해서 슛하고 경기에서 이기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1970년대에 고교 야구가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1940년대 당시 전국을 뒤흔든 최고 인기 종목은 농구였다. 시합이 끝나거나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하굣길에서, 동네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고 저희들끼리 “저기 이화 6번 간다, 저기 이화 6번 간다”라고 수근덕거릴 정도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시합이 있을 때면 표를 사지 않고 담 넘어 들어와 보던 농구 팬들 중에 이 아이들도 끼어있었을 것 같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좀 으쓱해져서 조금 더 늠름하게 걸었다.

1946년 이화 박정숙 6번. 
위 사진 뒷면 기록.
1948년. 4월 22일. 대구. 제3회 전국 종별남녀선수권대회. 이화여중 대 대구여중 시합. 
이화운동장에서 이화 박정숙. 뒷면에 기록이 남아있다.
운동장에서 농구 연습 중.
1946년 조선 올림픽. 이화여자중학교 3학년 시절.
위 사진 뒷면 기록. 제2회 올림픽 대회. 제2운동장에서 이화 대 전남 6번 박정숙.
위 사진 뒷면 기록.
경기 운동장에서 3월 리그 전.
위 사진 뒷면 기록. 경기 운동장에서 3월 리그 전.
숙명 선수들과 함께. 시합 후. 나는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1946년 조선 올림픽 경기 중. 나는 백 넘버 6번 주장 선수.
한국여자농구 초창기 유니폼 '부리마'를 입고 뛰는 선수들.
위 사진 뒷면 기록.
1947년 4월 25일. 제2회 남녀종벽 농구선수권대회 우승 후. 이화여자중학교 운동장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앨범에 정리된 사진. 기억 나는 대로 선생님 성함을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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