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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샴페인 May 24. 2020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것은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

<존엄하게 산다는 것>. 게랄드 휘터


위키 백과 사전에 '존엄'이라는 뜻을 찾아보면 "존엄(尊嚴)이란 도덕, 윤리, 사회적 논고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타고났음을 나타낸다."라고 나와있다. 한 개인이 가치가 있고 존중받는다는 말에는 타자가 개입된다. 즉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타자들은 한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윤리적인 대우를 할 의무가 있음도 내포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의 사회는 이 존엄을 자신에게만 한정하는 모습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자신이 존엄한 인간임을 타자를 통해서만 확인하려 드는 소식을 접할 때면 이러한 권리가 누구나 타고났음에 대한 의문이 든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 택배기사 폭행사건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시민들에게 총을 겨눈 정치인과  한 사람이 삶을 끝맺기로 결심할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가한 그들의 존엄에는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거나, 인간 내면의 다양성, 즉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중략)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존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모순될 경우 내면에 일어나는 동요를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경생물학적 뇌와 존엄



게랄드 휘터는 <존엄하게 산다는 것>의 시작을.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 인간은 결코 현혹되지 않는 다"로 시작하면서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으로 이 책을 소개한다. 



과도한 물질적성장과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가고, 인간의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고 도구화 수단화되어가는 기계적 사고방식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신경생물학자로서 뇌의 변화과정으로 얘기하고 있다.



언뜻 존엄성과 뇌는 서로 의미가 상충되어 보이지만, 개인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 뇌는  일정한 패턴을 만들고 우리의 태도(존엄)의 방향을 잡는다는 면에서 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뇌는 에너지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사고방식''태도'를 단일한 움직움으로 일관되게 패턴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일관된 패턴은  '자아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관심한지 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존엄은 이러한 '자아상'에 나침판 역할을 해주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의 뇌는 학습에 따라 뇌가 유연 해지는 '뇌 가소성'이  있다. 이는 경험과 학습을 기반으로 세상에 적합한 방식으로 뇌가 변화되는 성질로 이는 다음 세대로 물려 줄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수평적으로 전파하고 서로 영향을 준다. 여기에는 외부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유대 관계, 소속감같은 연결고리도 포함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의 만남과 공존은 생존으로서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뇌는 이러한 생존으로 타인과의 공존에서 고통을 최소화 하는 긍정적관계 맺기 방식으로 '존엄'이라는 내적 표상을 만들어 행동의 패턴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공동생활에서 교류와 공감이라는 또 다른 생존적 사회화를 양상한다.  이러한 타인과의 긍정적 피드백은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존엄'을 인식시켜준다. 이러한 인식은'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해결책들을 기반으로 뇌가 구성되는 것이다. 만약 그 과정에서 보호와 소속감은 물론 개인의 창의력과 자시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경험의 강도가 클수록 그것이 뇌에 더 깊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우리는 왜 존엄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러한 타고난 뇌의 기능에 각인된 '존엄'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 듯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이는 과도한 동물적 생존본능에 의한 존엄의 훼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생존본능은 상위 패턴인 '자아상'의 형성을 방해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고, 미시적인 동물적행위로 오히려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숭고한 태도'와 '우월한 태도' 그리고 '존엄'이라고 했다. 즉 이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참됨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학습하고 이성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고 했다. 칸트의 존엄은 "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타인에 의해서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때에도 상처를 입는 것"이며 이는 나와 타인의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존중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으로 규정했다. 결국 존엄을 인식하지 못한 행동은 학습에 결여와 교육의 부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존엄성은 침해받을 수 없으며, 쉽게 빼앗을 수 없고 인생의 부당한 요구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내면의 가치다. 인간의 존엄은 변하지 않으며, 항상 있고 영원하며, 뜻밖의 사건들이나 폭력에 무너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존엄이 침해받을 때, 당당하게 우리의 존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사회문화적 침범인 경우는 분연히 일어서야 하고, 한 개인이 개인에 대한 침범에 대한 것에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존엄에 대한 침범은 생존권과 기본권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리, 어떠한 자리나 위치에 있더라고 인간으로서 타인을 충분하게 존엄해야 할 의무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 할 당연한 것이며,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질서의 원칙'인 것이다.



타인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까닭




저자는 인간은 존엄성을 선천적으로 지닌 채 태어나는 존재로 본다. 즉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  보살핌을 받길 원하고, 소속되기를 원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기를 원한다.  



하지만 타인을 도구와 시키고,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될 때 객체로서 타인은 주체성과 기본 욕구가 무너지고 이러한 객체인 타인의 뇌는 몸에 문제가 생길 때 활성화되는 곳과 같은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가해가 되는 것이며, 한 사람의 사회성의 흠집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받은 타인은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존엄에도 해를 가하게 된다



반면, 자신이 존엄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타인의 행동에는 상처를 받거나, '자신을 무시한다'라는 비합리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타인도 하나의 존엄한 대상이라는  '사회적 자아상'이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토록 존엄하지 않은 인류의 발전을 그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말로, 존엄한 행동으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뿐 아니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지고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존엄의 신경망이 널리 퍼져, 존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들을 깨우쳐 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는 모든 존엄이 사회깊숙이 뿌리내려 당연한 정언명령으로 모두에게 각인된다면, 비정규직라는 이유로 폭언, 폭행을 하는 일도, 무고한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여 무참히 총기난사하는 처참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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