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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r 01. 2021

책을 보고 도망가던 아이

다문화 아이와 한국어 놀이하기

“아 선생님! 나 책 싫어! 책 저리 가!”     


진수는 책에 마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책을 싫어했다. 아무리 책을 싫어하는 아이라도 책을 보여줬다고 도망치지는 않지 않나? 진수는 그렇게 좋아하는 숨바꼭질을 할 때도 책장 쪽으로는 숨지 않았다.


진수가 책을 싫어하는 이유는 글자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글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글자는 나는 힘들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진수는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였다. 자기가 모르는 것, 조금이라도 어려워 보이는 것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런 진수에게 한글은 ‘적’이었다.


동화책은 아이들의 언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아이의 수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를 들려줄 수 있는 데다가 동화책 하나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나중에라도 무조건 진수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기로 했다. 단! 지금은 책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진수가 ‘책은 어려운 게 아니다. 재미있는 거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을 단기 목표로 삼았다. 일명 ‘책과 친해지기’ 작전을 세웠다.


먼저 나는 다이소에서 스티커북을 샀다. 처음 산 것은 동물 스티커북이었다. 진수가 스티커를 좋아하니 우선 스티커북으로 천천히 책과 친해지게 하려고 했다. 스티커북에는 한 줄이지만 문장도 쓰여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져온 스티커북을 본 진수는 역시 책이라며 질색했지만, 너무나도 재미있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책에 스티커를 붙이는 나를 보더니 의심쩍은 표정으로나마 내 무릎에 앉아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책에 나는 진수에게 붙이고 싶은 스티커를 붙이라고 하고 책에 있는 문장을 아주 재미있게 읽어 줬다.


진수 : 야아~ 이거 책이잖아! (도망가려고 한다)

나 : 이거 책 아니야 진수야! 이거 스티커 붙이기 놀이하는 거야. 잘 봐~ (돼지 흉내를 내며) 먹을 것을 좋아하는 토실토실 돼~지!  뾰족뾰족 왕관을 쓴 닭~! 진수야, 선생님 어때? 진짜 닭 같아?


진수의 첫 책 친구 다이소 스티커북

 

이런 혼신의 연기를 펼치니 진수는 아주 재미있어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스티커 붙이기를 했다. 이후에도 나는 음식 스티커북, 탈것 스티커북, 뽀로로 스티커북 등 여러 스티커북을 이용했다. 다이소에서 3000원에 파는 <아기돼지 삼 형제> 스티커북도 아주 잘 사용했다. 처음에는 책이라며 온갖 짜증을 내고 싫어하던 진수를 먼저 초콜릿으로 유혹한 다음 스티커 붙이기 활동을 하게 하고 나는 책을 읽어 줬다. 늑대가 돼지 삼 형제의 집을 날리는 장면에서는 진짜 늑대처럼 있는 힘껏 바람을 부는 흉내를 내고, 늑대가 벽난로에 떨어져 도망가는 장면에서는 정말로 뜨거워하는 것처럼 흉내를 냈다. 진수는 나를 보며 배꼽 빠지게 웃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진수가 재미있어하니 나도 덩달아 재미있어졌다.


진수는 이야기를 듣는 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스티커만 열심히 잘 붙였다


스티커북 말고도 <손도장 놀이> 책과 색칠놀이 책도 사용했었다. 진수가 생각보다 재미있어하지는 않았고 금방 싫증을 느끼긴 했지만, 책만 보고 도망가던 아이가 잠깐이라도 ‘책’으로 논다는 게 어디인가.


진수는 마구잡이로 손도장을 찍어댔다


그다음으로는 도서관에서 장난감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아 빌렸다(진수 덕분에 나는 아동도서관 단골이 되었다). 제일 먼저 빌린 책은 사운드북 <뽀로로와 양치해요>, <뽀로로와 목욕해요>였는데, 이 책은 버튼을 누르면 양치하는 노래와 목욕하는 노래가 나오는 책이었다. 진수가 좋아하는 뽀로로가 나오고 책 내용도 많지 않아서 딱 좋았다. 진수에게 책을 보여주자 또 책이라며 다른 놀이를 하려던 진수는, 내가 버튼을 눌러 노래를 틀어주자 ‘이거 뭐야~?’하면서 흥미를 보였다. 나는 진수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며 뽀로로 친구들이 양치하는 장면과 목욕하는 장면에서 진수가 버튼을 누르게 했다. 노래가 나오면 어깨를 들썩이고 춤을 췄다.


나 : 진수야. 뽀로로가 어떻게 양치해?
진수 : (버튼을 누르며) 이렇게! 치카치카 푸하하~

  

스티커북과 사운드북으로 ‘책으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다음에는 글자가 거의 없고 그림이 많은 책을 진수에게 가져갔다. 그중에서도 진수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책으로 골랐다.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책>, <어디에 숨었니?>,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 <누구 엉덩이?>가 그런 동화책이었다.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책>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기발하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책이어서 아이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좋았다.


나 : 비가 오네. 쥐는 비가 오는 게 싫나 봐. 다음에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너무 궁금하다.

진수 : 아! 이거(청소기)로 윙윙 해요!

나 : 정말이네! 청소기로 구름을 빨아들이는구나! 어떻게 맞혔어? 진수 대단하다!


머리가 좋아지는 그림책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책하고 똑같이 예상하지 못해도 나는 진수의 생각이 더 멋있다며 호들갑 떨며 칭찬해 주었다. <어디에 있을까?>는 진수가 좋아하는 숨바꼭질 이야기라 진수가 좋아했다. 게다가 직접 동물들이 숨어있는 곳을 펼칠 수 있는 책이었다.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는 새하얀 그림에 갑자기 떨어진 등장인물들이 어리둥절하다가 이야기를 기다리고, 결국 본인들이 이야기를 만든다는 내용의 동화책이다. 진수가 책을 읽기 싫어해서 나는 우선 진수와 같이 장난감 벽돌로 두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집을 만들었다. 집 만들기 놀이를 한 다음에 그 안에서 책을 읽어 줬는데, 장난감 벽돌집을 좋아하는 진수는 내 무릎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 엉덩이?>는 동물들의 엉덩이 그림으로 동물을 알아맞히는 책으로, 엉덩이를 좋아하는 진수에게 딱 좋은 책이었다. 또 진수에게 동물 종류를 재미있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누구 엉덩이? 진수 엉덩이!


진수에게 매일 책을 읽어 준 것은 아니었다. 단어 카드와 마찬가지로 하루는 책을 가져가서 ‘보여주기만’하고 ‘오늘 읽으려고 했는데 그냥 내일 읽자. 오늘은 장난감으로 재미있게 놀았으니 내일은 책으로 노는 거야. 약속~’이라고 말하고 다음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진수가 이렇게 말했다.


진수 : 선생님. 내일 아니고 지금 읽자.  

   

진수는 내가 가져온 책의 내용이 정말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는 기뻐하며 책을 읽어 줬지만 진수는 언제나 그랬든 두세 장만 가만히 듣고 딴짓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수가 드디어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 이후에 나는 슬슬 진수의 태도 교정에 도움이 되는 동화책을 골라 가져 갔다. <울지 말고 말하렴>은 뭐가 안 되면 항상 짜증부터 부리는 진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동화책이었다. <유치원이 없어졌어요>는 아이들이 유치원 규칙을 지키지 않아 유치원이 도망갔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유치원에서 지켜야 하는 것도 배우고 협동심의 중요성도 알려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유치원을 밧줄로 당겨 구하는데, 이 내용에서 나는 진수와 같이 줄을 당기는 시늉을 했다. 진수는 아주 재미있어했고, 처음으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질문에도 잘 대답했다.


나 : 진수야, 유치원이 왜 없어졌어?
진수 : 비 오는데 친구들이 창문 안 닫아요. 그래서 유치원이 감기에 걸려요.

나 : 맞아. 창문을 안 닫아서 감기에 걸렸지? 그럼 유치원하고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
진수 : 창문 잘 닫아요. 신발 잘 벗어요. 그런데 유치원은 감기 안 걸려요. 안 살았어요.

나 : 아니야. 진수하고 친구들이 유치원을 힘들게 하면 유치원이 도망갈 수 있어. 진짜야.

진수 : (심각한 표정으로) 헉! 안돼...


<아야, 배가 아파요>라는 동화책을 읽을 때는 놀랍게도 진수가 직접 책 내용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진수 : 선생님, 친구는 왜 손을 안 씻었어요? 안 씻으니까 배 아프지. 주사를 맞을까?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어서 배 아파요?


그러던 어느 날, 진수가 갑자기 유치원에 있는 동화책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나한테 왔다.

    

진수 : 선생님, 이 책 읽어 주세요.


나는 너무 감격해서 진수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했다. 책을 보고 도망가던 진수가, 책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다니! 감격의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자 진수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진수가 가져온 책을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읽어 줬다.  


이후에도 진수와 나는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비 오는 날>을 읽을 때는 동화책 주인공처럼 장화를 신고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뛰노는 흉내를 내며 놀았고, 소방관이 나오는 동화책을 읽을 때는 나는 불이 나는 집에 갇힌 사람, 진수는 소방관이 되어 놀았다. <난 강아지니까>라는 동화책에서는 강아지가 꿈속에서 하늘을 나는 장면이 나왔는데, 진수를 직접 안고 교실 한 바퀴를 빙 돌아 하늘을 나는 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 <애벌레의 꿈>을 읽을 때 진수는 애벌레가 되었고, 나비가 될 때 나는 진수가 나비처럼 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을 보고 도망갔던 진수는 이제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아이가 되었다.


잔수도 나비와 강아지처럼 날라다녔다




교사는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운다고 한다. 나 또한 진수를 통해서 배운 점이 많다. 나는 ‘책과 친해지기’ 작전으로 학생이 싫어하는 것을 교육적으로 좋다는 이유로 무작정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 학생이 그걸 왜 싫어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한 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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