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를 가르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쯤 진수는 책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없어진 상태였다. 나는 ‘책과 친해지기’ 작전과 더불어 ‘글자하고 친해지기’ 작전도 세웠다.
진수는 여섯 살이라서 한글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한글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배우는 거지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과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수는 머지않은 미래에 한글을 배워야 했다. 게다가 진수 친구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조기 교육을 받아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진수 친구들은 가끔 나와 진수에게 와서 묻지도 않은 자기 자랑을 하곤 했는데(이거 제가 만들었어요, 우리 형아는 종이접기를 잘해요, 어제 케이크 많이 먹었어요 등등), 어느 날은 자기들이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자랑했다.
친구들 : 선생님! (내 명찰을 보며) 저 선생님 이름 읽을 줄 알아요! OOO!
선생님! 저 이 책 이름 읽을 수 있어요! 봐 봐요. ‘기. 초. 쑥. 쑥. 종. 이. 접. 기’ 어때요?
친구들이 이렇게 자기 실력을 자랑할 때 나는 살짝 진수의 표정을 봤다. 진수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언젠가 진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글자 싫어, 글자 무서워”
진수가 글자를 무서워하게 된 이유는 글자를 어렵게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 이때처럼 글자 때문에 친구들과 거리감, 소외감을 느끼고 자신감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진수에게 자신감도 심어주고 친구들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소외감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중에 한글을 배울 때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한글과 친해지게 하고 싶었다.
물론 이번에도 나는 다이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이소에서 한글 색칠놀이를 샀다. 여담이지만, 나는 다문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다이소에서 적어도 10만원 이상은 쓴 것 같다. 나는 진수에게 색칠놀이 책을 보여주며 같이 예쁘게 색칠해 보자고 했는데, 역시 진수는 ‘선생님 나빠!’를 외치며 다른 장난감을 찾았다. 며칠 동안 진수에게 한글 색칠하기를 내밀었지만 진수는 글자 때문에 색칠을 하기 싫어했고, 결국 나는 계획을 바꿔 책에 있는 그림을 오리기 놀이를 했다. 다행히도 그림 오리기는 진수가 좋아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오리자고 하니까 글자를 색칠했다.
한글을 색칠한 후에 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는 ‘기탄한글’의 <한글떼기 1단계> 책을 사서 진수에게 조금씩 한글을 연습시켰다. <한글떼기 1단계>는 ‘가~하’까지 연습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글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 쓰기의 기본이 되는 선 긋기 연습과 자음과 모음의 모양을 변별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물론 진수는 한글 연습을 하기 싫어했다. 다행히도 선 긋기 연습은 그럭저럭 잘했고 좋아할 때도 있었지만, 한글을 쓰는 연습은 아주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진수에게 여러 보상을 조건으로 내줘야 했다. 이거 두 장만 하면 간식을 준다든지, 숨바꼭질을 한다든지, 다 끝나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자든지... 이렇게 보상을 걸고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글자를 쓰며 글자를 읽어 주었다. 그리고 진수가 특히 싫어하는 날에는 그냥 안 했다. 싫다는데 억지로 하는 게 아이에게는 더 안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표는 아이가 ‘한글’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었지 한글을 배우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진수와 실컷 놀아준 후 기분이 최고로 좋을 때 한글 쓰기를 하자고 했고, 하다가 5분도 안 돼서 싫다고 하면 또 진수와 놀아 줬다. 그리고 다시 진수를 달래서 한글 쓰기를 했다. 이렇게 하면 하루에 두 글자를 간신히 연습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연습을 한다는 자체로 성공이었다.
기탄한글 한글떼기 1단계 선 긋기 연습
‘사’까지 연습했을 때 단어 카드로 게임을 준비했다. ‘가~사’까지 글자를 크게 인쇄한 다음, ‘가~사’가 들어간 단어를 그림 카드로 만들었다. 어휘 공부를 할 때는 그림 카드에 글자를 뺐는데, 이번에는 글자가 중요했으므로 글자를 넣었다. 나는 진수에게 한글 카드를 먼저 보여주고 진수에게 따라 읽어보라고 했다. 그 후에 그림 카드를 책상에 펼쳐 놓고 한글 카드를 보여 주며 이 글자가 있는 글자를 찾아보라고 했다. 물론, 잘 찾으면 상으로 초콜릿 과자를 준다는 조건도 걸었다. 나는 진수가 내가 말한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찾으면 과장되게 칭찬을 했다.
나 : ‘가’. ‘가’ 찾아봐 진수야. ‘가’가 들어간 그림은 어디 있어? 세 개 있어.
나 : 우와! 진수야 잘했어! 우리 진수 너무 똑똑하다, 최고 최고!
처음에는 초콜릿 과자 때문에 단어를 찾던 진수는 나중에는 진심으로 재미있어서 단어를 찾았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 진수는 칭찬받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나중에 ‘하’까지 모두 연습한 후에도 이런 단어 게임을 했다.
진수와 함께 연습한 단어 카드들
진수는 혼자 글자 쓰는 것을 하기 싫어했다. 글자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잘 못 쓸까 봐서였다. ‘가’를 쓸 때 내 부탁을 들어준다며 혼자 쓰려고 했다가, 글씨가 안 예쁘자 연필을 집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진수 : 안 예쁘잖아! 나 못해!
나는 대부분 진수의 손을 잡고 같이 글자를 썼다. 나중에 ‘타’를 연습할 때는 내가 진수 손을 잡고 쓰려는데 놀랍게도 진수가 혼자 쓰고 싶어 했다. 진수는 혼자서도 글자를 꽤 잘 썼다.
(좌) 진수와 내가 같이 쓴 '가' 진수가 함을 주는 바람에 안 예쁘게 써졌다/ (우) 진수가 혼자 쓴 '타' 혼자 썼는데도 꽤 잘 썼다
기탄한글 책으로 ‘하’까지 모두 연습한 다음에는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모음’을 연습시켰다. 역시 다이소에서 책을 사서 연습을 했고, 한글 자음과 결합해서 읽는 연습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음까지만 연습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자음과 결합하는 걸 연습하기는 했지만 정말 맛보기 정도로만 연습했다. ‘찾아가는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이 10월 30일까지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업 3일 전, 진수는 나에게 아주 놀라운 선물을 주었다. 바로 색종이에 숫자를 1부터 4까지 쓴 것이었다. 진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선물을 내게 주었고 나는 아주 감격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분이 엄청 좋아진 진수는 나에게 또 선물을 주겠다며 색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진수는 나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나는 진수에게 간식을 선물할 때마다 눈을 감고 있다가 뜨라고 했다. 이걸 따라한 것이다.)
진수 : 선생님! 이제 눈 뜨세요!
나 : 어머! 이게 뭐야! 진수야, 한글 쓴 거야?
진수 : 이거 편지예요. 선생님, 내가 편지 줄게요.
진수가 나에게 준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연습한 한글 모음이었다.내가 색종이에 써 준 것을 보고 그대로 쓴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 진수가 혼자 한글을 쓰다니!
(좌) 내가 쓴 것 / (우) 진수가 나에게 준 편지
진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지~’ 하며, 자기가 만든 편지 봉투에 넣어 주었다. 나는 그걸 집에 와서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엄마가 진수를 칭찬하는 영상 편지를 찍었다. 엄마에게 진수를 마구마구 칭찬해 달라고 부탁했고 감사하게도 엄마는 진심을 담아 진수를 칭찬해 주셨다.
다음날 진수에게 엄마의 영상 편지를 보여줬는데, 진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진수와 헤어진 지 5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진수의 표정을 생각하면 웃음이 날 정도이다. 우리 진수도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아이 었다니. 처음에 어딘지 모르게 공격적이고 경계심을 품은 표정을 자주 지었던 진수, 그런 표정 안에 외로운 감정을 숨겼던 진수가 진심으로 행복해하니, 나는 프로그램의 종료로 일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돈보다 값진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