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0일은 오지 않기를 바랐던 날이다. 진수와 이별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나도, 유치원 선생님들도 모두 아쉬워했지만 ‘찾아가는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이 10월 30일로 종료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전에 진수의 담임선생님께 ‘마지막 날 진수하고 같이 유치원 앞에 있는 빵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예전에 내가 교문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진수도 그때 등원을 해서 교문에서 진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진수가 선생님을 학교 안이 아닌 밖에서 만났다며 너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겨우 교문 하나를 사이에 둔 차이밖에 없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진수는 하루 종일 나를 밖에서 처음 만났다고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 일을 생각하니 항상 진수와 유치원 안(학교 안)에서만 같이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려, 마지막에는 밖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담임선생님과 원감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는데, 다만 원감 선생님께서는 빵집 앞 횡단보도까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원감 선생님과 진수와 같이 빵집으로 향했다. 원감 선생님은 나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말씀을 하시며 진수에게도 말을 붙였는데, 진수는 평소와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말도 별로 안 했다(진수는 원감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어서 원감 선생님은 조금 무서워했다.) 원감 선생님은 웃으시며 이제 자신이 빠져야 될 것 같다고 하시며 횡단보도 앞에서 유치원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진수에게 사고 싶은 빵은 뭐든지 다 사라고 했다. 진수는 소시지 빵과 피자 빵을 골랐고 나는 초콜릿 조각 케이크를 골랐다. 자리에 앉아 우선 초콜릿 케이크와 소시지 빵을 먹으며 진수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수는 당연히 유치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밖에 있는 게 어색한지 말을 별로 안 했고 주로 내가 말을 걸었다. 나는 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수야. 선생님은 진수한테 너무 고마워. 진수가 그동안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선생님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재미있게 놀아서 고마워. 그리고 사실 진수는 선생님이 힘들 때 많이 힘이 되었어.
진수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웃으며 ‘나도 선생님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열심히 빵을 먹었다.
이제까지 글을 쓸 때 내가 진수를 위해 한 일을 주로 썼지만, 사실 진수가 나에게 준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진수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2020년 1월 코로나 19가 국내를 덮치고 다른 한국어 강사들처럼 나 역시 실업급여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실업급여조차도 못 받는 실직한 강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괜찮은 상황이었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고 내가 안 힘든 건 아니었다.
국내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강의하는 한국어 강사들은 항상 비정규직으로, 시간제로 일하고 짧으면 4주 길면 한 학기(6개월) 단위로 계약을 한다. 학생 수에 따라 강사 수도 조정되어서, 학생이 학교를 이탈해서 학급이 줄어들면 강사는 다음번 계약을 걱정해야 했다. 계약을 해도 4대 보험은커녕 고용보험조차도 가입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뿐만 아니라 다문화교육센터도 1년 단위 시간제 강사로 일하고, 그나마 대우가 좋은 곳도 2년 단위 계약으로 일한다. 그래서 코로나 19로 다니던 어학당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 때, 지금 당장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진로가 고민되었다. 코로나 19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도, 너무나도 불안정한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을 느꼈다.
‘경력도 쌓고 대학원도 다니며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는데 그 대가가 이런 건가? 이제까지 헛고생했나, 그래도 일하면서 재미있었고 좋은 추억도 많았는데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데 이 시국에 그게 가능한가. 난 너무 능력이 없다. 한심하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했고 내 자존감을 스스로 깎아내렸다. 일을 못하고 집에만 있는 데다가 전 세계적으로 상황이 심각하고 뉴스에서도 계속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오니 더욱 그랬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다문화교육지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나는 일을 해야 우울한 기분을 잠시라도 떨쳐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진수의 수업을 맡았다.
솔직히 진수와의 수업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진수는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같이 돌아다녔고 기분이 안 좋으면 발버둥 치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진수가 또래 아이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세서 더 다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힘들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진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수업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유아교육 논문과 책도 읽고 아동도서관을 안방처럼 들락날락거렸으며 백화점이 아닌 다이소에서 쇼핑을 즐겼다. 그리고 단어 카드도 열심히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 우울감에 빠져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일도 하고 목표가 생기니 삶에 활력도 점점 생겼다.
진수가 말을 너무 안 듣고 문제를 일으켜서 속상했을 때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내가 자기 엄마 다음으로 예쁘다고 칭찬해 주는 진수, 나를 너무 사랑한다는 진수, 나를 너무 빨리 보고 싶어서 아침마다 유치원 현관에 앉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진수, 존댓말을 하는 걸 포함해서 눈에 띄게 한국말 실력이 는 진수, 그리고 자신의 문제점을 서서히 고치고 유치원 생활에 적응해가는 진수를 보며 잊고 있었던 가르치는 보람을 느꼈다. 진수는 내 마음에 잔뜩 끼어 있던 먹구름을 걷어 주고, 내가 한국어 교사로서 계속 갈 수 있게 해 준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진수가 아주 많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초콜릿 케이크와 소시지 빵을 다 먹었는데 피자 빵은 뜯지도 않아서 나는 진수에게 피자 빵은 안 먹냐고 물었다. 그러자 진수는 ‘이건 원감 선생님 꺼. 아까 같이 안 왔어요’라고 말했다. 순수하고 너무도 착한 진수는 본인이 무서워하던 원감 선생님이 빵집까지 같이 안 오시고 중간에 간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비록 돈은 내가 냈지만) 나는 원감 선생님을 생각하는 진수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유치원에 돌아가서 교무실로 진수와 같이 들어가 원감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며 진수가 직접 빵을 드리게 했다. 원감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 모두 감동받아 놀라셨고, 진수를 칭찬하며 안아주셨다. 진수는 볼이 빨개져서 쑥스러워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모두 나에게 그동안 수고했고 감사했다고, 내가 사랑을 많이 준 덕분에 진수도 좋아졌다고 하시며 내년에도 볼 수 있으면 보자고 말씀하셨다. 나도 감사했다고 인사한 뒤 진수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는데 진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 선생님, 이따가 또 봐요”
진수는 내가 이제 자기하고 같이 수업을 안 한다는 걸 이해 못했고, 언제나처럼 또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유치원 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유치원 때 외롭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던 느낌만 기억이 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은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진수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수에게 잊히는 게 전혀 섭섭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진수에게 잊히길 원한다. 진수에게 펼쳐진 앞날에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고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진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많아서 나는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말이다. 유아기의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남아 있다가 툭툭 튀어나오는 ‘암묵 기억’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한다.나는 그저 진수의 무의식 속에서만 존재하고 싶다. 훗날 진수가 어른이 되어서 유치원 시절을 회상했을 때 ‘아, 그때 유치원 가는 게 즐겁고 행복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제 올해 3월부터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진수를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지만, 지난 5개월 짧은 기간 동안 '진수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