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와 두 번째 수업 때 나는 진수에게 읽어 줄 동화책을 가져갔다. 내가 책을 많이 읽어주면 줄수록 진수의 어휘력도 많이 늘고 한국말도 자연스러워질 테니까. 내가 가져간 책은 그림이 많고 글은 조금 있는, 여섯 살 아이가 보기에 전혀 무리 없는 책이었다. 나는 진수와 색종이 종이접기를 재미있게 한 다음에 진수에게 선물이라며 초콜릿을 주었다. 진수는 기분이 너무 좋다며 방방 뛰었다. 진수가 초콜릿을 맛있게 먹자 나는 두 번째 선물이라고 하면서 책을 꺼냈다. 그런데 갑자기 진수가 교실 밖으로 도망갔다! 나도 뛰쳐나가서 신발장에서 등 돌리고 앉아있는 진수를 보고 왜 나갔냐고 물어보니 진수는 이렇게 외쳤다.
진수 : 선생님 나빠! 나 너 안 사랑해. 책 주고! 선물 아닌데!
그때 생각했다.아, 진수한테 책을 보여 주는 건 아~주 나중에 해야겠다. 일단은 다른 방법으로 진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야겠다.
나는 최소 한 달 동안은 ‘진수가 글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와 ‘놀이로 한국어 배우기’를 수업 목표로 삼았다. 이번에는 내가 놀이로 진수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진수는 존댓말을 안 하고 발음이 부정확하고 자기 생각을 바로바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는 문제 외에 아는 어휘가 많지 않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진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갈 때도 많았다. 또 진수는 자기가 모르는 말이 나오면 바로 회피하거나 짜증을 내서 분위기도 안 좋아졌었다.
진수 : 선생님! 그거 어디 있어요? 그거 그거!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
(주먹을 쥐고 허공에 문질렀다. 진수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색연필’이었다)
진수 : 뽀로로는 펭귄이에요.
나 : 아, 그럼 포비는(북극곰)?
진수 : 아이 선생니임~ 우리 이제 이거(?) 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진수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공부’가 아니라 ‘놀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중에 초등학교에 가서도 공부에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적대심(?)을 갖지는 않겠지.
1) 유치원에 있는 장난감으로 놀면서 어휘 배우기
유치원에는 다양한 장난감이 있었다. 주방 놀이 세트, 병원놀이 세트, 소방관 놀이 세트, 벽돌 빼기 같은 보드게임, 쉬운 퍼즐, 장난감 악기, 아이스크림 가게 세트, 마을 만들기 레고, 도로 만들기 놀이 세트 등등. 나는 병원 놀이와 소방관 놀이 세트로 의사와 환자, 시민과 소방관이 되어 진수와 같이 놀았다. 주방 놀이 세트로 놀 때 진수는 요리사, 나는 손님이었다. 놀이를 하면서 진수 모르게 병원과 소방서, 주방에서 쓰는 용어를 계속 알려 줬다. 병원 놀이를 할 때는 허리와 손가락 같은 신체 어휘도 자연스럽게 가르칠 수 있었다. 놀이에 빠져버린 진수는 그게 단어 공부인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치원 교사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진수 앞에서는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진수에게 어휘를 가르쳤다. 진수와 수업하면서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연기 재능을 발견했다. 내가 이렇게나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니...
진수 : (의사 역할) 어디가 아픕니까.
나 : 배가 너무 아파요. 어제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나 봐요. ‘토’하고 싶고 ‘속이 울렁거려요’. 아, ‘주사는 맞기’ 싫어요.
진수 : 안돼요. 주사 맞아요!
(역할극을 하기 전에는 ‘주사’라는 단어를 몰랐다)
‘아이스크림 가게’ 놀이를 할 때 진수는 항상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였다. 진수는 특히 이 장난감 세트를 좋아했다. 이 장난감으로는 가게에서 쓰는 표현들을 연습할 수 있었다.
나 : 아이스크림 아저씨, 돈이 없어요. '깎아 주세요'
진수 : 깎아 뭐예요?
나 : 돈이 없어요. 조금만 내고 싶어요.
진수 : 깎아 안돼요.
나 : 그럼 '카드로 계산할게요'.
이 외에도 교실 안에 있는 장난감으로 많은 어휘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장난감 악기로 연주하면서 악기 이름을 배우고, 레고로 마을을 만들면서 ‘잔디, 울타리, 풍차, 창고’ 등의 단어를 배웠다. 그리고 도로 만들기 세트로 차 종류와 ‘신호등, 횡단보도, 육교’등 도로에 관련된 어휘를 배웠다.
진수는 색종이 접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런데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자기가 접는 건 싫어했고 내가 접어서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항상 수업 끝나기 전에 진수에게 종이접기 책을 보여주며 ‘선생님이 뭐 접었으면 좋겠어?’라고 물어봤다. 진수가 선택을 하면 나는 집에서 그걸 접어서 다음 날 진수에게 선물했다. 사실 그것도 수업의 일부였다. 종이접기 그림을 보여 주며 어휘를 가르친 것이다.
나 : 여기 손목시계, 휴대전화, 상자, 팔찌... 그림을 봐. 진수는 선생님이 여기에서 뭐 접었으면 좋겠어?
종이접기 책을 보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2) 신체 활동으로 어휘 배우기
진수는 숨바꼭질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 나는 숨바꼭질을 한국어 연습에 많이 이용했다. 진수는 숫자를 ‘3, 셋’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항상 ‘3, 셋’이 넘어가면 숫자를 뒤죽박죽 섞어서 말했다.
진수 : 하나, 둘, 셋, 다섯, 일곱, 응응, 넷, 열!
일, 이, 삼, 여섯, 우우응... 열!
처음에는 숫자를 가르쳐 보려고 했지만 진수가 3 이상을 가르치려고 하면 심하게 짜증을 내서 숨바꼭질을 이용해서 숫자를 가르치기로 했다.
나 : 선생님이 술래 할게. 진수 잘 숨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진수 다 숨었어? 10초 더 셀까? 다시, 하나 둘, 셋, 넷...
(한자어 숫자인 ‘1, 2, 3, 4’로 바꿔서 말하기도 했다)
숨바꼭질 말고도 장난감 정리를 하거나 퍼즐 놀이를 하면서도 ‘이제 몇 개 남았지? 하나, 둘, 셋...’하면서 은연중에 숫자를 계속 말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진수가 자기에게 숫자를 가르치려 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짜증을 냈고, 숨바꼭질을 하면서 숫자를 가르치는 게 제일 효과적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며 숫자를 셀 때는 진수가 매우 즐거워했다. 진수가 술래를 하면서 숫자를 셀 때도 많았는데, 항상 ‘넷’ 이상부터는 숫자를 이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숨바꼭질을 하루에 기본 두세 번, 많이 할 때는 여섯 번 이상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결국 ‘열’까지 제대로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4개월 넘게 걸렸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게 어디인가.
한자어 숫자는 ‘기탄 수학’ 시리즈의 <수셈 떼기 기초 단계 1> 책을 개인 돈으로 구입하여 가르쳤다. 이 과정도 굉장히 힘들었다. 학습지 2장을 쓰는 시간이 한 시간이 넘는다고 하면 믿기는가? 학습지를 보여주기 전에 진수와 30분 이상을 신나게(진수만 신나게) 놀아주고, 학습지를 보고 학을 떼며 싫어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어 한 장 쓰게 하는 데 10분, 자꾸 딴짓을 하려 하는 진수와 놀아 주고 다시 달래서 또 나머지 한 장을 쓰는 데 20분. 그래도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10까지 가르치는 데는 성공했다. 정말 값진 성공이었다.
진수와 함께 연습한 기탄한글 시리즈 <수셈떼기 1>.
3) 그림 카드로 게임하면서 한국어 배우기
진수의 부족한 어휘력을 넓혀 주기 위해, 나는 진수와의 수업 초반부터 그림 카드 거의 매일 가지고 갔다. 하지만 매일 그림 카드로 수업을 한 건 아니었다. 하루는 그림 카드를 정말 ‘보여주기만’ 하고 그냥 유치원에 있는 도구로 수업을 하거나(진수는 놀이라고 생각했지만), 색종이 접기 혹은 그림 도안에 색칠하기 놀이 등을 했다. 그러고 나서 진수에게 준비한 단어 카드를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 : 진수야. 오늘 너무 재미있게 놀았지? 우리 내일은 이거(그림 카드)로 재미있는 게임 해 보자! 정말 재미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아이에게 ‘오늘은 네가 원하는 놀이를 했으니 내일은 선생님이 원하는 놀이를 한다’는 ‘약속’을 하고, 어휘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 줄여준 상태로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림 카드는 항상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만들었다. 차 종류, 동물, 운동, 직업, 곤충 등등... 처음에는 그림 카드 밑에 한글을 같이 써서 사용했었다. 글자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글자를 계속 보여줌으로써 글자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진수가 워낙 글자를 싫어해서 그다음부터는 그림만 있는 카드로 만들었다. 그림 카드 수업은 이렇게 했다.
① 처음에 그림을 하나씩 보여주며 진수가 아는 단어인지 아닌지 확인한다. 모르는 단어면 알려주며 따라 해 보라고 한다.
예) 진수야, 이 사람은 지금 뭐 하고 있어? 테니스를 치고 있어. 따라 해 봐. ‘테니스를 쳐요’
물론 이 단계에서 진수는 카드 두세 개만 보여 줘도 짜증을 내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래도 계속 달래서 했다. 너무 심하게 싫어하면 강요하지 않고 중간에 다른 놀이를 하다가 다시 가르치기도 했다.
② 카드를 책상에 쭉 펼쳐 놓고 내가 말하는 것을 찾게 한다.
예) 진수야, 우리 재미있는 게임을 할 거야. 선생님이 말하는 걸 찾아봐. ‘테니스를 쳐요’ 어디에 있어?
진수는 역시 그다지 재미있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게임이라고 하니 찾으려고는 했다. 게다가 내가 상품(?)으로 초콜릿을 걸어서 싫은 표정으로라도 찾는 노력은 했다.
③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맞는 그림 찾기 게임을 했다.
예) 나 : 진수야. 선생님 잘 봐봐. 지금 뭐 하고 있어? 이얍! (공을 찬다) 잘 찾았어! 그건 뭐 하는 거야?
진수 : 야구? 으응 아닌 데에.... 아! 축구!!
나는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했다. 이 단계는 진수가 아주 재미있어하며 적극적으로 단어를 찾았다. 내가 아주 웃기게 연기를 했으니까.
가끔 ②번 단계에서 시간제한을 걸기도 했는데, 이때 역시 진수에게 숫자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숫자를 아주 크게 말하며 셌다. 진수는 신기하게도 시간제한을 걸고 찾으라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내가 말하는 카드를 찾으려고 했다.
나 : ‘사자’ 어디 있어? 10초 센다~ 일, 이, 삼, 사, 오...
진수 : 잠깐, 잠깐만요! 이거예요? 이거예요? 선생님 일 이 삼 사 다시 해요!
수업에 사용한 그림카드들. 그림은 대부분 '누리 세종학당' 그림을 사용함
4) 동화책으로 어휘 늘리기
동화책을 포함해서 진수가 ‘책’을 싫어하지 않게 하는 데는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첫날에 내가 선물이라며 꺼낸 책을 보고 울며 신발장으로 도망친 진수는 4달 뒤 스스로 유치원에 있는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읽어달라고 하는 아이가 되었다. 진수가 어떻게 그렇게 변했는지, 그리고 진수와 어떤 책을 읽었는지는 다음 편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로 어휘를 가르치니 진수는 점점 변해 갔다. 아는 어휘가 많아진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모르는 단어를 질문까지 했다. ‘선생님 이건 뭐라고 해요?’라고. 남들이 보기에는 아이가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말이 나오거나 선생님이 새로운 단어를 알려주려고 하면 소리 지르며 짜증을 내고 도망가려고 했던 진수를 기억하는 나에게 이건 굉장한 발전이며 교육의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