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0일, 충청북도 다문화 교육지원센터의 사정으로 ‘찾아가는 한국어교육’을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연말에 다문화 교육지원센터에서 예외적으로 일부 학교만 ‘찾아가는 한국어교육’ 프로그램을 신청받았고, 해영이의 학교인 C 초등학교에서는 다시 한국어 수업을 신청했다. 덕분에 나는 12월에 다시 해영이와 한국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2021년 1월에는 학생이 두 명 더 늘었다. 이름은 진규와 경수. 해영이와 경수, 진규는 어머니의 나라부터 성격과 특징까지 완벽하게 다른 학생이었다.
1) 긍정 파워 해영이
해영이는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이고, 해영이도 베트남에서 8년 동안 살다가 한국에 왔다. 그래서 그런지 해영이는 베트남에 대한 애착이 컸다. 나에게 항상 베트남 이야기를 하며 베트남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영이는 자신이 한국과 베트남어를 모두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대단해했고, 올해(2020년) 한국 국적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해영이는 정말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수다쟁이였다. 그만큼 공부도 열심히 했고, 또 공부를 놀이처럼 생각해서 재미있어했다. 조금 어려운 문제가 나와서 싱글벙글 웃으며‘일단 해 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하는 성격이었다. 잘하려고 노력하지만 틀리는 걸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틀리면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해영이의 한국어 능력은 나와 먼저 두 달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그래도 말하기와 쓰기 모두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해영이는 자기가 틀려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긍정적인 학생이었다.
해영이 : 선생님. 해영이는 틀려도 괜찮아요! 왜냐면! 선생님 고쳐주니까~
틀려도 괜찮아. 선생님이 고쳐주니까
해영이는 비행기 승무원이 꿈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이 되면 딱 어울릴 것 같은 아이였다. 진규가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으면 "진규야, 내가 너 도와줄게. 가르쳐줄게"라고 하며 진규를 도와줬다.
해영이 : 진규야, 이건 이렇게 쓰는 거야. 여기 봐 봐. 그렇지. 선생님, 맞지요?
그리고 경수가 내 말을 듣지 않거나 딴짓을 하려고 하고, 나와 이야기하다가 혼잣말로 반말을 하면 항상 옆에서 나보다 먼저 잔소리를 하거나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 : 경수야. 선생님이 찰흙 놀이 다 하면 손 씻으라고 했잖아. 친구들은 다 씻고 왔어.
해영이 : 맞아 맞아. 선생님이 손 씻으라고 했는데. 선생님 말 들어야지.
나 : 경수야. 이거 어려워 보여서 안 쓰고 있는 거야? 이거 어려운 거 아니야. 경수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야.
경수 : (혼잣말로) 아닌데... 나 못하는데...
해영이 : (째려보며) 아닌데'요'! 저 못하는데'요'! 선생님한테는 '요' 말해야지!
2) 성실 대마왕 진규
진규의 어머니는 캄보디아 사람이었으나, 해영이와 달리 한국에서 생활을 더 오래 한 것 같았다.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그저 부모님과 같이 여행한 기억만 있었다. 진규는 누가 말해 주지 않으면 다문화 가정 아이라는 걸 눈치 못 챌 만큼 한국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쓰기 실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받아쓰기를 할 때는 ‘책을 읽어요’를 ‘채글 일거요’라고 쓰는 등 단어를 거의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
진규는 매우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시키지 않으면 말을 거의 안 했고, 자신감도 부족했다. 문제를 내거나 문장을 만들어서 말해 보라고 하면 틀리는 것을 걱정해서 한참 동안 뜸을 들이기도 했다. 해영이는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항상 나에게 질문을 했는데 진규는 질문하는 것도 잘 못했다. 자신이 쓴 답을 내가 틀렸다고 표시할 때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진규는 세 명 중에서 가장 성실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항상 5분이나 10분 늦었는데, 진규는 항상 수업 시간 기본 10분 전에 교실에 와서 다소곳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책을 읽고 있으라고 하니(교실이 도서실이었다) 정말로 그다음부터는 책만 읽었다. 또 숙제도 빼놓지 않고 해 왔으며, 수업 시간에는 딴짓을 전혀 하지 않고 시킨 것만 했다.
매일 일찍 와서 심심해하는 진규를 위해 나는 게임 책을 하나 샀다. 미로 찾기, 숨은 그림 찾기, 틀린 그림 찾기와 퀴즈 맞추기 등 여러 게임을 할 수 있었는데, 게임을 하면서 게임 책에 나오는 어휘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수업 10분 전에 교실에 와서 진규와 같이 게임을 했다. 진규는 엄청난 집중력과 도전 정신을 보이며 게임을 했다. 게임을 통과할 때마다 ‘아하하하 내가 또 이겼다!’라고 말하며 좋아하며 발을 동동 굴리고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진규와 같이 가지고 놀던 게임책. 해영이도 나중에 일찍 와서 합류했다.
그리고 항상 조용히 있었던 건 아니고, 수업 분위기가 좋아지면 크게 웃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다. 진규가 장난을 칠 때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대마왕’이었다. 경수는 수업시간에 연필을 자주 떨어뜨렸는데, 하루는 경수가 두 번째 연필을 떨어뜨렸을 때 나는 경수에게 "경수는 항상 수업 시간에 세 번은 연필을 떨어뜨려. 이제 한 번 남았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규는 이렇게 말했다.
진규 : 아하하. 한 번만 더 떨어뜨리면 경수는 떨어뜨리기 대마왕!
3) 숫자 천재 경수
경수는 어머니가 중국 사람이신데, 다문화 가정 아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경수의 담임선생님도 경수가 다문화 가정인지 몰랐다고 한다. 경수는 첫 수업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나 : 얘들아, 오늘 날씨가 어때? 해영이 : 좋아요. 별로 안 추워요.
진규 : 음... 따뜻한 거 같은데...
경수 : 오늘 날씨가 영상 3도라고 일기예보에서 말했어요! 어제는 영하였는데. 일주일 뒤에는 폭설이 와서 강수량이 20mm가 넘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확실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경수는 정말 해영이와 진규와는 언어 수준이 다른 아이였다. 수준 차이가 커서 해영이와 진규와 수업을 나눠서 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결국 경수도 같이 수업을 하기로 했다. 경수는 말도 유창하고 똑똑한 아이였지만 그만큼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자기가 못할 것 같은 것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쓰기 활동을 할 때 그런 면이 심하게 드러났다. 받아쓰기나 똑같이 쓰기처럼 자기가 따로 생각할 필요 없이 쓰는 활동은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참여했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생각을 써야 하는 활동은 고집을 부리며 시작도 하기 싫어했다. 심지어는 쓰기 싫다고 울기도 했는데, 이유는 ‘잘 못쓸까 봐 걱정돼서’였다.
나 : 경수야. 이거 어려운 거 절대 아니야. 친구들도 다 쓰잖아. 한번 해 보자.
경수 : 싫은데에... 나 못할 것 같아요... (울먹울먹)
편지 쓰기 활동을 할 때는 진규와 해영이 모두 어려워하면서도 짧게라도 편지를 썼는데, 경수는 끝까지 연필만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방식을 바꿔 내가 말하는 편지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기 해 보라고 하자 그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경수에게 책에 있는 글이나 내가 쓴 모범 글을 그대로 베껴 쓰는 활동을 많이 시켰다. 다행히 내용이 많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베껴 쓰기는 따라왔고, 결국 이런 노력은 마지막 수업 때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경수가 특출난 분야가 있었다. 바로 숫자였다. 경수는 숫자를 매우 좋아했다. 교실에 오자마자 "오늘 날씨는 영하 1도예요, 내일은 영상 7도까지 올라간대요. 체온은 아까 쟀을 때는 36도였는데 지금은 0.5도 떨어져서 35.5도가 됐어요" 라며 숫자를 말했고, 친구가 시간을 물어보면 시계 앞으로 달려가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 세세하게 말했다. 수업 시간에도 숫자를 웅얼거려서 해영이가 "선생님, 경수는 왜 자꾸 숫자 말해요?"라고 물을 때도 많았다.
어느 날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활동을 했다. A4 용지와 색연필을 주고 마음대로 그린 후에, 자기가 그린 것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또 친구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거나 조언하는 활동이었다. 해영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 그렸고 진규는 자기가 하는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렸다. 경수는 ‘지진’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 : 지진? 땅이 흔들리는 거 말하는 거지? 지진을 어떻게 그릴 거야?
경수 : 지진을 색깔로 그릴 거예요. 진도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요.
경수는 지진을 진도 1~7까지 그렸고, 진도에 따라 다른 색깔을 칠했다. 진도 6은 검은색, 진도 7은 빨간색 등등... 진도를 색칠하며 경수는 지진의 세기를 계속 이야기했다.
경수 : 서울은 진도 7. 땅이 엄청 흔들려요. 우아아아아. 청주는 진도 6이에요.
나 : 헉, 그럼 건물이 무너지는 거 아니야? 우리가 있는 곳인 청주인데. 너무 무서운데?
경수: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진도 3으로 낮춰줄게요.
지진을 이렇게 색깔로 표현한다는 발상이 독특하면서 대견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정말 무궁무진하게 넓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보라고 하자 경수는 '진도'를 그렸다.
이렇게 해영이와 진규, 경수는 성격이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이었다. 성격이 가지각색인 학생들을 가르쳐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많기도 했다. 진규에게 질문을 하면 진규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옆에서 나에게 너무 말을 걸고 싶어 하는 해영이가 대신 대답을 하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한다. 해영이의 태도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진규가 계속 말할 기회가 없어졌고, 바로바로 말을 잘하는 해영이 때문에 진규의 자신감도 낮아질까 봐 걱정이었다. 그리고 의욕이 넘쳐서 굳이 안 해도 된다는 쓰기 활동까지 하는 해영이와 반대로 자신감이 없어서 하라고 하는 활동을 안 하고 버티는 경수를 달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아이들도 한마음 한 뜻이 될 때가 있었다. 바로 ‘종이비행기 날리기’ 놀이를 할 때였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 집중력이 떨어지면 가끔 중간에 종이접기를 했는데, 아이들은 특히 ‘종이비행기 접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종이비행기를 접으면 운동장에 가서 날리기 놀이를 하고 싶어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항상 종이비행기를 날리자고 조를 정도였다.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면 아이들은 누구나 신나게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뛰놀고 좋아했다.
해영이 : 선생님! 제가 여기에서 날릴게요! 선생님이 잡아 보세요! 진규야, 너도 날려 봐!
진규 : 내껀 저기까지 날아갔어. 와 진짜 잘 날아가! 아하하하
경수 : 선생님! 저는 누가 더 멀리 날리나 볼게요~ 해영이 1m, 선생님은 50cm, 진규는 2m?? 와~~
아이들은 종이비행기가 바로 자기 앞에 떨어지든 운동장을 가로질러 훨훨 날아가든 상관없이 비행기를 날리는 것 자체로 큰 소리로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을까? 단지 종이비행기를 날릴 뿐인데. 수업 시작 전에 "오늘은 날씨 좋으니까 종이비행기 놀이할까?"라고 하면 눈빛이 달라지고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왜 하필 종이비행기 놀이를 그렇게 좋아할까. 하늘을 훨훨 나는 종이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걸까?
나도 초등학생 때는 종이비행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왜 좋아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아마도 내 동심이 없어진 탓일 것이다. 종이비행기는 아이들의 동심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아이들의 웃음에 담겨 있는 행복 바이러스 덕분인지,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면 나도 진심으로 재미있어졌다. 아이들과 종이비행기 날리기 놀이를 할 때는 나도 진심으로 놀이를 즐겼다. 왜냐하면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없어져 버린 내 동심도 다시 살아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오직 하늘을 훨훨 나는 종이비행기와 그걸 보며 깔깔 웃어 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존재했고, 내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걱정거리를 잠시 내팽개칠 수 있었다.나는 앞으로도 고민이나 걱정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는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려 보기로 했다. 종이비행기로 스트레스를 잠시 잊는 방법은 아이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