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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권 Mar 12. 2022

두려워도,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

그러니 불안할수록, 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해

몇 년 전, 학부시절이었나 학부를 막 졸업한 시절이었나.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저녁을 먹고, 신촌의 한 술집에서 선배는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거야. 냉장고가 있어. 너는 이 냉장고 안에 음식이 썩어가는 것을 알아. 그리고 이 썩어가는 것을 치우지 않으면 더 썩어가는 것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더 열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 


신기하게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한 자세한 문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음. 이야기는 이해가 가지만, 나와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 냉장고를 여는 사람들일 것 같아'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몰랐지만,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적용이 되었다. 냉장고를 여는 사람과, 냉장고를 열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행동은 둘로 나뉘었다. 냉장고를 여는 것과, 열지 않고 외면하는 것. 있는 힘껏, 눈을 질끈 감는 것.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냉장고 문을 잡아당길 힘조차 빠진 상황인지, 물론 모든 상황은 상황마다 달랐다. 내 발을 스치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모든 상황은 다르니까. 그래서, '와... 나라도 저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도 '난 무조건 정면승부야'하고 문을 여는 상황도 있었고, '와... 나라면 지금 당장 문을 열고 치울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도 어물쩡,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모르는 척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깨닫는 것은, 문을 열지 않을수록, 냉장고 안은 미지의 세계가 되어가고, 우리는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할수록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귤만 썩었을지도 모르나, 그 썩은 것을 어서 치워내지 않으면 옆의 브로콜리, 고기, 냉장고 벽까지 곰팡이가 피어날 가능성이 크니까. 더 최악인 것은, 무언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치우고 있지 않고 있는 회피하는 자신까지 인지하면 마음의 큰 부분이 잘 때까지 발을 뻗고 편히 잠들 수 없게 좀먹게 되니까. 그건 당사자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고문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상담가에게 하니, 상담가는 그런 경우를 종종 본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냉장고 안에 썩어가는 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그 냉장고를 무책임하게 버려도 되는 삶을 살아왔던 경우도 있고 혹은 누군가 계속 치워주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고.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자라왔다고 해서, 네가 그 사람들의 그 냉장고를 치워주는 역할을, 그 사람들의 걱정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되길 자처하거나 책임감을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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