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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S Dec 27. 2018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다

마음의 낯가림은 잠시 내려놓고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 교정.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가방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불안한 듯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뒤뚱뒤뚱 우스꽝스럽게 걷는 중년의 사내. 주변에서 짓궂은 학생들이 그를 흉내 내고 시비를 걸어도, 그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간다. 학교의 많은 이들이 매일매일 도서관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공식을 벽에 끄적이면서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근처에 가려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을 앓은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한 장면이다. 잘 나갔던 수학자 존은 정신병을 앓아 명예와 직업을 모두 잃게 된다. 모두가 병으로 피폐해진 그를 폐인 혹은 광인 취급하며 피할 때, 어느 날 한 학생이 존에게 먼저 다가가 그의 수학 논문에 대해 말을 건다. 그러자 자신을 알아봐 준 그에게 존은 최선을 다해 가장 자신 있는 수학을 가르쳐준다.

만약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그 우스꽝스러운 폐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었을까.


니 수학과 맞제? 내가 이래 봬도, 응? 느그 교수하고, 응? 사우나를, 응? (출처: 영화 'Beautiful Mind)




퇴물 선배라고 무시하지 마라

"들었어? OO 부장님 이번에 완전에 눈밖에 나신 거 같아. 이제 뭐 다른 팀에서 받아줄 리도 없고, 나가실 준비 하셔야 할 듯..."


"이제 우리도 업무 보고는 OO 부장님을 거치지 말고 임원 직보* 하라던데."

예전 직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이런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과장, 차장 등 간부들은 눈치 보면서 그분을 제치고 임원에게 직접 보고하기도 했고, 사원, 대리급은 은연중에 그 소위 '퇴물 선배'의 말은 한 귀로 흘리기도 했다. 그 선배가 그렇게 되기까지 업무의 성과가 안 좋거나 변화하는 시장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는 납득이 되는 이유가 있었기에, 솔직히 나는 그에게서 배울 점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가끔 한잔 같이 하자고 물어올 때마다, '영양가 없는' 선배와의 재미없는 술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갖은 핑계를 대며 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관부서와 업무 충돌이 있었는데, 직급에 밀려 일방적으로 추궁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그 부서가 상당히 힘이 있던 부서여서, 팀의 선배들도 몸을 사리며 이 논쟁에 말려드는 걸 꺼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영양가 없다고 생각한 그 '퇴물 선배'가 무심한 듯 툭 던졌다.

"뭐 때문에 그렇게 혼자 끙끙대냐?"

"아, 아닙니다. 지금 해결하려 하는 중입니다."

"딱 보니, 헤매는 거 같은데 얘기해봐."

'딱히 무슨 도움이 되겠나.'라는 건방진 생각으로 간단히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이어서 이것저것 물으시면서 더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더니,

"뭐 그런 녀석들이 다 있어? 앞장서! 가자."

'이 무대뽀같은 선배가 문제를 더 키우려고 이러는 건가.' 걱정하는 마음 한가득 안고, 그 팀으로 갔다. 흥분해서 언성이 높아질까 걱정되었던 선배는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침착한 톤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조곤조곤 의견을 전달했다. 후배 개인의 결정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선배 자신을 포함한 팀 모두의 결정이었고, 양 팀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니 누구 하나에게 뒤집어 씌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 나는 옆에서,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임에도 부하직원을 위해 스스로 방패막이 되어주고, 비록 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팀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는, 신뢰할 수 있는 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그 후로 그분은 내게 있어 더 이상 배울 것 없는 퇴물 선배가 아닌, 부하직원으로부터 신망을 얻는 법을 알려준 인생 선배가 되었다.


그날의 그 선배는 '미생'의 오과장보다도 멋있었다 (출처: tvN 드라마 '미생')



근성 있던 그 후배는 내게 스승이 되었다


"아, 그 친구 좀 덤벙대는 거 같아. 똑 부러진 느낌이 잘 없어"

신입 직원들이 각 부서에 들어오면, 으레 누군 일 잘한다, 누군 좀 아닌 것 같다 등의 뒷말들이 있곤 했다. 그중 유관부서의 한 후배는 평이 그리 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제대로 같이 일해보기도 전에 그런 뒷담화로 선입견이 생겨버려,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후배 직원 하나 또 들어왔구나' 하고 무관심하게 넘겼다. 그 후배를 직접 만나게 된 건 여러 팀이 들어온 회의. 마케팅 전략에 관한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 하는 회의였다. 그 후배가 자신 있게 손을 들더니,

"전 20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런 전략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열심히 설명한 후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주변에 동의를 구하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큰 호응 없이 지나갔다. '저 친구 뻘쭘해서 의기소침했겠는데. 그런데 동기들 말대로 똑 부러진 느낌이 없네.'라고 속으로 그 '뒷담화'에 동의하려는 찰나,

"이건 어떨까요?"

'호오, 이 친구 근성 있네.' 흥미로운 친구였다. 주변의 무반응에 실망하지 않고, 그 뒤로도 연거푸 5개의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그날 회의 참석자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오늘 수고했어요. 의견 많이 냈는데, 채택된 게 없어서 좀 아쉽겠어요." 회의가 끝난 뒤 한마디 건넸다. 그러자 후배는,

"그래도 하고 싶은 의견들 다 얘기해봐서 괜찮아요. 다음에 또 아이디어 많이 내보죠 뭐."


그 친구 쿨했다. 자신을 실망에 묶어두지 않았다. 그저 덤벙대는 스쳐 지나갈 후배라 생각했던 친구에게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알려주었다.


"저요! 저요!" 후배의 근성있는 표정은 대략 이런 느낌 (출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부끄럽지만, 예전에 가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대할 때, 조금씩 다르게 대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누구는 화려한 배경을 가졌으니 더 잘 대하고, 누구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자는 식의 오만한 생각. 사실 사람인지라, 만인을 다 평등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통해 느낀 것은, 배울 점이 더 많고 더 적은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단순히 배경이나 실적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경험이 훨씬 적다고 해도, 나의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판단은 겉모습만 보고 섣부르게 하지 말고, 직접 그 사람들과 부딪혀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자. 혹시 아나? 그러다가 내 평생의 친구를 만날지도.





*임원에게 직접 보고하라는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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