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지금 왜 이직하려는 거야?", "지금 왜 유학을 가려는 거야?"
주변의 질문을 받고는 나는, 잠시 머뭇하며,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글로벌 리더가 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원대한 목표와 꿈을 갖고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매진한 사람들 이야기들이 대부분인 것 같고, '원래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성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구나'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쩐지 나와는 DNA부터 다른 훌륭한 준비된 사람들의 먼 이야기인 것 같아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 주눅이 들었다.
난 사실 새로운 변화를 꿈꿀 때마다 '왠지 이대로 멈춰 있는 것은 미래가 불안해서', '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주변에서 많이들 도전하니까', '남들이 이게 좋다고 하니까', '외국에서 지내고 싶어서', '경력을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서' 등의 조금은 민망하고 소소한 이유가 더 컸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런 걸 해보려는 거야? 그런 이유면, 그런 거 다 해봤자 쓸 데 없어. 안 해봐도 다 안다. ROI(투자자본수익률. 투자 대비 효용)도 안 나올 거야.
할 필요 없어."
MBA를 준비할 때, 처음엔 그저 단순히 MBA란 타이틀이 갖고 싶어서 준비를 시작했다. 주변에 다녀온 분들이 있어서, 부러운 마음에 막연하게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엔 MBA가 희소성이 없어서 잘 알아주지도 않고 투자한 만큼 연봉이 오르지도 않으니까, 돈 낭비,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식의 조언이나 글들이 많았지만, 난 그 경험을 하고 싶었다. '안 좋든 좋든 내가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판단할래'라는 생각을 했다.
"넌 왜 지금 MBA를 오려고 하니?"라는 툭 던지듯 날아온 질문에 몇백 단어로 왜 나를 꼭 뽑아야 하는지 엑기스만 딱 뽑아서 답을 해야 되니,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깎고 또 깎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기에 지금 MBA를 가야 하는지, 이 학교는 왜 나를 선택해야 하는 건 지 머리를 쥐어짰다.
"형, 형이 보기에는 나 어때?"
"나 와이프 있는 거 잊었냐?"
"......"
지원동기를 묻는 질문 덕분에 주변의 MBA 졸업생들이나 사회 선배들과 참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한 내 선택이나 경험들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 교환학생을 갈 때, 취업을 할 때, 부서를 선택할 때 등 삶의 선택의 기로에 선 매 순간을 돌이켜 보며 그 선택의 이유를 되짚어 보았다.
"인류학? 거기서 뭘 배우는데?"
나는 전공을 얘기할 때마다, 이게 무슨 공부를 하는 학과인지 꼭 부연 설명을 해야 했다. 인간에 관한 전반을 배우는 비교적 생소한 학문이지만, 특히 문화, 타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인류학에 매력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했고, 교환학생 지역을 고를 때도, 일본 북해도의 '요사코이 소란'이라는 댄스 축제에 관심이 생겨 삿포로를 선택했다. '일본, 그중에서도 삿포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도 내가 인지를 못했을 뿐 그동안 심심치 않게 받아왔단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삼성전자의 해외 영업 마케팅 업무도 다양한 나라와의 교류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었다. 그렇게 보니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난 분명 나만의 선택 기준으로 내 삶을 이끌어 왔고, 이는 나를 규정하는 나만의 유니크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외국문화에 관심이 많았구나. 전공도 인류학을 하고, IT회사에서 해외 교류하는 업무도 하고... 학교에 가서 다른 백그라운드 가진 애들하고 교류 많이 하고, 돌아와서 글로벌 시장에서 IT와 문화 키워드 관련한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
이 과정에서 내 과거를 이해하게 되었고, 내 미래를 보다 구체적으로 꿈꾸게 되었으며, 내가 지금 도전하려는 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고 배울 수 있을지 더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일단 도전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 삶의 목표가 하나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할까 말까 고민되면 해라.'
단순하면서도 내게 참 많이 와 닿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이것 저것 다 경험해보면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부딪혀 오다 보니, 후회는 별로 안 한 것 같다. 사실 그 당시에는 후회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돌이켜 볼 때 후회했던 적이 그리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결과적으로 그래도 꽤 괜찮은 선택을 해왔나 보다. 그냥 일단 하고 싶으면, 어떤 이유던 해보고 나니, 내가 아는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점점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니 특별하지 않다고, 즉흥적이라고, 세속적이라고, 또는 한심해 보인다고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선택의 이유는 도전한 다음에 깨닫게도 되는 거니까. 일단 렛츠 기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