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거 다해보기-바보같던 나와 마주하기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지만, 혹시 내가 바보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매우 반복적으로.
무엇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을까?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하고, 마무리가 어떤지에 따라 그 이야기에 대한 정서적 판단을 크게 바꾼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갈무리해보면, 좋았던 기억 보다, 좋지 않은 기억만 알이 꽉 찬 찰옥수수처럼 수두룩 빽빽인 것이다.
_날 바보처럼 느껴지게 했던 직장 상사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야근을 자처했던 사회초년생 시절. "oo씨,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 없어." 허술하게 지시를 하지만, 허술한 결과물엔 면박을 줬던 허술상사A. 타회사 사람들과 함께 갔던 출장에서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도 남자조차 얼굴이 낯 뜨거워지게 하는 성희롱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희롱상사B. 직장생활 7년차, 내가 원하는 업무를 얘기했을 때, "oo씨는 그런 일 못할 거 같아. 내가 알아." 나의 사기를 꺾어버린 답정상사C. 연애, 사회, 시사부터 결혼을 하면 여자가 시댁에 가서 전을 붙여야 하나 등에 대해 내 의견을 얘기했을 때. "oo씨는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거 같아."라며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무참히 나를 짓밟고, 자신의 지식은 발광시킨 발광상사D. 여성의 신체를 습관적으로 터치하며, 당하는 사람조차 이건 아닌데 싶지만, 과도하게 티가 나지 않아 내가 당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교했던 스킬을 가진 터치상사E. 내가 속한 팀과 상의도 없이 자기 멋대로 일을 진행해서 같은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건 다반사. 불같은 성격에 눈치 보며 일하게 하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던 무례상사F. 직장생활 10년차 때. 내가 맡아 진행하고 있던 업무를 아무 상의도 없이 다른 직원에게 넘기거나, 본인이 한 것처럼 가로챘던 얍쌉상사G. 회사 대표의 조카인 타 부서 과장. 그가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의 일을 나에게 떠넘기고, 그의 업무가 늦어지면 우쭈쭈를, 내가 늦어지면 어쭈쭈를 일삼던 딸랑상사H. 반복되는 비체계적 업무와 사내 불평등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퇴사 의사를 밝힌 나에게 "oo씨,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떡할래." 하며 자신의 부조리한 행동을 내 나약함으로 덮으려고 했던 덮밥상사I.
_단절을 부른 15년의 우정
같이 대학 시절을 보내고, 같이 1년 동안 자취를 하고, 같이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같이 여행을 가고, 같이 서로의 연애사를 보며 위로를 하고, 대신 싸워주기도 하고, 떨어진 시간 동안 그리워하고, 다투고, 화해하면서 보내온 15년가량의 세월이었다.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 이성 얘기부터 진로, 가족, 직장, 별 시답지 않은 얘기까지 별의별 사적인 얘기를 나누며 쌓아온 눈물겨운 우정이었건만.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져버린 사건의 발단은 반복적으로 선을 넘는 그녀의 언사와 행동이었다. 나는 매사 걱정이 많았고, 그녀는 마음이 태평했다(실은 태평하지 않았을지라도 내 좁은 기준에서는 태평한 사람이었다.) 세상 물정을 일찍 깨달아 어른스러웠던 친구는 주로 나를 보호해줬고 난 그녀의 보호가 좋았다. 내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면, 같은 입장이 되기보다는 늘 반대편에서 대차게 조언을 해줬고, 난 그녀의 직언직설이 좋았다. 한 번은 내가 다단계에 걸려 이도 저도 못하고 어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녀만의 당찬 언사와 행동으로 대번에 다단계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깊숙이 숨어버리는 음침한 오타쿠인 나를 끌어내 줬던 그녀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친구는 휴학을 하고 미국에 어학연수를 떠났다. 승무원 도전에 실패한 나도 그녀를 뒤따랐다. 미국에는 처음이었던 나는 모든 걸 친구와 함께하려 했다. 그녀와 같은 기숙사 건물에서 살고, 같은 어학당을 다니고, 같은 한국 식당에서 일을 하고, 같이 마이애미로 여행을 가고, 같이 쇼핑을 가고. 난 친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였다. 지금 다시 가라고 하면, 코로나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혼자서 해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쫄보인 것이다. 꿈같았던 미국 어학연수는 4개월로 막을 내리고, 난 학교로 돌아와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내가 사회생활에 찌들어 가는 동안 그녀는 미국 생활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그녀 앞에 나는 해맑고 순수했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버린 달라진 모습이었다. 같은 생활 패턴에서 페어플레이를 했던 우리의 과거와 각자 고독한 사투를 벌이며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재는 많이 달랐다.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친구의 당찬 언사와 행동이, 어느덧 내가 고생하며 쌓아놓은 것들에 선을 넘는 불편한 언사와 행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서히 사회에 물들어 갈수록, 15년 우정의 바다에는 검푸른 불쾌감이 물들어 갔고, 분노의 파도가 거칠게 일렁였으며, 끝내 단절의 벼락을 맞고야 말았다.
단절은 결코 아물지 않았다.
배우 김태리에게 [친구관계 손절]에 대해 고민이 있는 팬이 상담한 내용 중 발췌한 부분이다.
(팬은 20년 된 친구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해서 인연을 끊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학교에서 만날 때는 서로가 생활 사이클이 같지만, 성인이 되고 각자의 영역이 달라지니까 어쩔 수 없이 어긋나는 부분이 생겨요. 대다수 분들이 인연 정리를 하라는 쪽으로 말씀을 해주시는데, 제 생각에는 잠시 시간을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잠시 거리를 두고서 서로의 삶에 좀 더 집중을 하다가 간만에 만나면 또 좋을 수가 있거든요. 추억 이야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아! 내가 이 친구의 이런 면을 좋아했었지. 내가 이런 일들이 있어서 얘랑 재밌게 놀았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고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어요. 틀어진 관계에 있어서 시간을 둔다는 대안점이 있다는 걸 한 번씩 생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김유은 작가의 [언젠가 그리울 오늘]에서 발췌한 관계에 관한 글이다.
단지 오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무조건 그 인연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지금의 내가 힘들고 아프다면 애써 그 인연을
잡지 않아도 된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알아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알아갈 시간 속의 나의 행복이다.
한 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나의 모든 감정, 에너지, 시간과 할 말을 쏟아냈다. 소중한 것(사랑, 친구, 직장에서의 업적, 동료애 등) 들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나만 바보가 되거나 나만 상처 받는 이야기로 마무리됐을 때가 잦아지면서 조금씩 변해갔던 거 같다. 점점 무가치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나의 감정, 에너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 태도가 형성됐다. 배우 김태리의 말과 김유은 작가의 말에 모두 공감하지만, 각자의 타이밍과 상황에 따라 틀려지기도 한다. 그때의 내가 배우 김태리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 나와 그 친구 관계는 달라져 있을까?
직장에서의 갈등, 친구와의 단절, 가족 간의 불화, 불확실한 미래 등으로 인해, 내게 남겨진 대부분의 정서적 판단은 부정적으로 형성돼 있다. 하. 나는. 음침한 오타쿠에 정상이 아닌 것인가. 우울한 마음으로 비정상의 길을 가던 중, 부정적인 정서의 이유가 외부의 위험에서 나를 지켜주는 뇌의 알람이 과도하게 반응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정신과 의사 니시다 마사키의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 기술]에 따르면, 신경에 날이 서는 이유는 뇌에서 경보와 알람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과도하게 반응하기 때문인 것이다.
편도체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오는 불안, 공포나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관리하며, 생명유지에 중요한 뇌의 한 부분이다. 긴장을 담당하는 물질이 강하게 작용하는 뇌 부위이기 때문에 지나친 긴장으로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편도체 가까이에 있는 해마에도 영향을 미친다. 해마는 단기 기억의 저장고다. 편도체가 싫고 짜증 나는 단기 기억을 증폭시키면 이것이 머릿속에 좀처럼 잊기 힘든 기억으로 각인된다. 과거의 실패와 굴욕을 잊고 싶어도 선명한 기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또 같은 함정에 빠져버리는 일. 바로 편도체 알림이 멈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울리는 상태다. 외부의 위험에서 나를 지켜줘야 할 알람이 반대로 신경질적인 나를 깨우는 효과음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 편도체 알람을 끌 수 있는 열쇠는 부교감 신경과 전두엽인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전두엽을 잘 관리해야 내면이 날카로워지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전두엽을 건강하게 하는 생활습관
수면이 부족하면 편도체의 폭발을 억제하는 전두엽의 능력이 저하돼 아주 위험하다. 식사나 운동을 거르는 생활습관도 계속되면 전두엽 기능의 저하, 더 나아가서는 위축을 부른다. 방에 홀로 틀어박혀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오랜 기간 회피하거나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일도 전두엽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때로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의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생활이 지속되면 정신건강 상태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수준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포인트는 규칙적인 식사나 수면과 같은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 기술] 중
니시다 마사키 정신과 의사는 잔뜩 날이 섰을 때 가족이나 반려동물 사진을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자신이 귀여워하는 존재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 수준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날카롭고 황폐해진 마음을 치유해주는 효과가 있고, 힐링이 되는 아이의 사진이나, 배우자, 연인의 웃는 얼굴은 사람의 불안과 공포를 완화시켜준다고 한다.
나 자신이 바보 같거나, 불안하거나,
화가 날 때, 시시콜콜 나를 판단하는 대신,
내가 지금 잔뜩 날이 서있구나, 지금 내 마음이
평온해 지기를 원하고 있구나, 를 인지하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바라볼 때다
심란한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평소 해보고 싶던, 도자기 만들기에 도전을 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의 오랜 반려인형 복실이를 디자인으로 활용한 것이다. 내가 배운 도예 공방에는 두 종류의 클래스가 있었다. 하나는 손으로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핸드빌딩과 사랑과 영혼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물레 위에서 점토를 쓰담쓰담하던 물레체험이 있었다. 난 한 번도 도자기를 만든 적 없는 초특급 초보이기에, 물레 전에 기초를 다질 수 있는 핸드빌딩을 선택했다.
완전한 도자기가 완성되기까지 유악을 바르고, 건조를 하고, 고온 가마소성을 거쳐 3주가량이 걸렸다. (내가 모르는 다른 과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감 시간은 3달인 것이다. 내가 만든 복실이가 어떻게 나왔을지, 귀나 코 한쪽이 떨어지진 않았을지, 잘못하면 복실이가 터질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무 이상은 없는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시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릇 하나를 만드는 데도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의 그릇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이렇게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내 부정적 정서가 차츰 긍정적인 정서로 나아질 것이라 믿어 본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복실이 그릇처럼, 내 인생의 이야기도 나라는 인간의 그릇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지길.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