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것만 같은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레토릭.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야 할 순간마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과연 내가 이번에는 해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데 당신만은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나를 사랑해 대는지,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사랑은 항상 분에 넘쳤다. 김애란은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고 했는데 내 이름은 심지어 한 번 들으면 잊기조차 힘든 이름이다. 메이드 바이 문여사님. 덕분에 학창시절 내내 매 학기 첫날 불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지금도 역시 이름을 댈 때마다 주눅이 든 채 여러 번 얘기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인생이다.
신생아 때 다이어리에는 그 날 그 날의 습도까지 기록되어 있고, 10살까지는 엄마가 지어준 옷을 입었으며 시험공부할 때는 내 방에서 같이 밤을 새고, 급기야 고3때는 야자직전마다 밥을 새로 해서 교문 앞에서 도시락 들고 기다리는 등 엄마는 이 모든 걸 사랑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수행하셨다. 물론 내 의사 따위는 아웃오브안중.
태양같이 강렬해서, 도저히 피할 길 없는 이 엄마의 사랑은 너무 순수하고 저의가 없는 것이기에 주변의 내 친구들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사춘기를 겪는 내내 받을 때마다 쥐구멍에 들어가버리고 싶은 부끄러움과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할 수 없는 내 불경함에 허덕였다.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 난리대환장케어인가. 이러고도 서울대는 커녕 인서울도 실패했으니 엄마의 18년간의 자식농사는 일단 첫해부터 흉작이었는데 엄마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정도 인풋이면 내가 오른손목 하나 정도는 그었어야 마땅할 아웃풋이었다.
아마 심상치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때마다 본인이 어떻게 해야할지 가이드가 없었던 지라 일단 뭐가 되었든 못하게 하고 보는 게 안전하다 여기셨(다기보다 아빠한테 내가 혼날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려)고 집에서 대학을 다니던 6년 내내 엠티를 못가게 하거나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하셨다.
사랑에도 회계가 있다면, 이 때까지 나는 외상거래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엄마의 인풋은 꾸준히 들어오는데 도무지 엄마에게 되갚아지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은 약자다. 나와의 싸움에서 본인이 가진 패도, 남은 돈도 다 털리는 줄 알면서도 엄마는 매번 울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꾸짖었다. 사실 엄마에겐 줄 것도 없었고 주는 방법도 몰랐기에 이 당시 내가 오로지 일관성있게 줄 수 있던 것은 ‘무관심’뿐이었다. 사랑의 반댓말, 무관심.
25살, 11월 3일.
내 인생 광복절이다. 드디어 원수같았던 집을 벗어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서울에 왔다. 모르는 사람들 한 다스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던 그 묘한 설레임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에 짐풀자마자 끊었던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간 것이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이다!
이후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엄마는 ‘사춘기보다 더 독하다’는 갱년기를 맞이했고, 나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무기한계약직 카운셀러로 봉사했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는 나에게 엄마는 숨도 안쉬고 “넌 공짜잖어” 라고 했고, 서울에 반찬 이고지고 웃으며 올라왔다 매번 백만 가지 이유를 대곤 펑펑 울며 내려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결혼, 그노무 결혼 얘기, 자식 셋 농사 다 망한 얘기, 특히 막내 걱정 그리고 간간히 이모욕, 고모들욕, 당연히 할머니욕, 삼촌숙모 다 나온 뒤 마지막 피날레는 항상, 언제나 똑같이 ‘기승전그인간때문에.’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내가 만나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싫으면 이혼하시라고, 난 괜찮다고 하면 또 당신 지갑 돈 마를 생각에 갑자기 입이 쑥 들어가는 이 지겨운 패턴이라니.
어쨌거나 '인생은 타이밍.' 내 사춘기가 끝나자마자 엄마의 갱년기가 시작되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울어졌던 대차대조표의 발란스를 맞춰가게 되었다. 이젠 내가 이 외상을 갚을 차례인가, 생각하며 철든 큰딸답게 ‘그래, 하기 싫은 것도 할 수 있는 게 어른이지’ 라며 시도때도 없이 오는 전화받아주고 얼르고 달래다 먼저 제안해서 여행도 가고, 백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환갑잔치하며 본인 책 자비출판하고 싶대서 교정봐주고 글꼭지 골라주고, 집에 갈 때마다 엄마 따라다니며 봉사활동, 방과 후 학교, 촉석루, 시립박물관 등등 그 때 그 때 다른 엄마의 근무지를 열심히 탐방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재수해서 간 대학도 싫다고 때려치고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갔던 막내가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늘 시키는 것도 마지못해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본인이 선택해서 간 길이었고, 기나긴 유학생활에 별 도움도 못되었던 지라 꼭 가서 축하해줘야겠다 싶었는데 문제는 엄마. 여행갈 때마다 하도 싸우고 울고 하는 통에 둘이서 가는 여행은 엄두가 안났지만, 막내 대학 졸업식을 안갈 수도 없고 해서 눈 딱 감고 내 모든 연차를 털어 2주간의 미국여행을 계획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와서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에 빠져버렸다. 수없이 갔던 해외 출장이든 여행이든 돌아오자마자 무사귀환을 안도하며, 미뤘던 집안일을 해치우고 밀린 잠도 자다보면 하루 이틀 내 일상에 복귀를 할 수 있었는데, 이상했다. 극도의 피로감을 버티며 돌아와 엄마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내 집으로 돌아와 누군가에게 아무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시차고 체력이고 다 무시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길 위에서, 성수대교였던가, 다리 위를 스멀스멀 기어서 가던 차 안에서 갑자기 뭔가 내 안에서 터져나오려 했다. 별 일 없이 돌아와서 다행이네 중얼거리면서 문득 귀에 들려오던 음악 소리에 꽉 담아 눌러놨던 그것이 폭발하려던 순간. 그리고 2주일이 지나도록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우울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일기를 길게 써봐도, 친구들에게 호소해봐도 평소처럼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지는, 병처럼 느껴지던 그 마이너스 20도의 우울함.
이 글은 그 이야기를 쓰기 위한 프롤로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쓰면서 뭘 바로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 처음으로 왜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지 이해했던 그 날의 이야기들. 바쁨과 일상에 파묻어버린 채 간신히 수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호수 바닥에 두고 온 그 이야기들. 다 삼킨 줄 알았는데 조금씩 다시 게워내서 또 삭혀서 내려보내던 그 묵은 이야기들.
에세이를 쓰게 된 건 참 다행스럽다. 그저 둥글게 둥글게, 남들과 살비비며 살 수 있게끔 다듬고 다독이는 글을 쓰고 싶었던 적은 없었기에. 보다 원초적으로, 주머니에 숨겼지만 점점 갈아서 뾰족한 끝이 언젠가는 나올 내 송곳같은 글을 쓰고 싶다. 왜 그 동안 책이란 걸 읽어왔는지, 도대체 인문학의 효용이 뭔지에 대해서, 갚아도 갚아도 끝없는 이 외상장부의 긴 거래장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엄마라는 괴생물체 혹은 원수를 이해하고 싶어서. 대면하고 싶지 않고, 어쩌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공포와 두려움을, 그래도 이겨내고 싶은 내 작은 욕망으로 이 글을 시작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