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에에에세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그놈의 소개팅
한 동안 뜸했었다. 아무리 이상형이 '낯선 남자'라도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누구에게 부탁할 처지도 못되었고, 21세기의 넘쳐나는 오락거리들에 빠져 딱히 연애라는 단쓴단쓴의 세계에 대한 흥미도 점차 잃어가는 중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커녕, 사람의 손이라는 것을 잡고 밤거리를 걸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오지라퍼의 나라인지라, 나의 처지를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아도 또 선한 누군가는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법.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곧 가을이 오니 월동준비를 하자며 한 건을 주선해주었다. 상대는 한 살 어린, 좀 멀리 사는 분인데 뭔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을 묘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소개팅은 늘 이런 식이다. 뭘 좋아하는지,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그건 너님들이 만나서 알아서 파악하라는 뜻이겠지만.
이제까지의 전적을 고려했을 때 어차피 스스로에게 이 소개팅의 성패에 대한 기대치가 없으므로 미리 사진을 달라거나,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미리 알면 뭐하나, 만나보면 알겠지. 그래도 주선자를 생각하면 기본은 해야겠지, 그래도 혹시, 진짜 혹시 모르니 나름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일년 중 치마를 입는 날이 손에 꼽는 나는, 당일 아침에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아마도 이십대의 어느 날 나에게 '분홍색 가디건을 입으라'던 프로 중매 아지매의 조언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나는 치마가 안어울리는 사람인데 하.... 결국 원피스를 입는다. 이제 거의 감정적 무생물체가 되어가는 단계라, 사람을 남녀로 구분하는 것도 머쓱할 지경인데 마치 백일된 여자아이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묶어서 표시하듯 나는 나 혼자 툴툴대며 치마를 입고 나갔다.
그는, 돈이 엄청 많다던, 그는 티내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전면에 로고가 새겨진 언더아머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오셨다. 수트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 만남에 얼마나 생각을 하고 왔는지 알아차렸다고 하면 지나친 편견일까. 그래, 솔직히 티셔츠야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여름이고 날씨는 무더웠으니까. 중요한 건 그의 이야기다.
말이 남들보다 많은 나는, 오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절대 모든 말을 나 혼자 하지 않으리라. 잠자코 있으면 할 말을 하겠지. 어라, 근데 또 번지 수가 틀렸나보다. 이번 소개팅의 그는, 다른 많은 '그'들과 달리 내게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단, 본인이 나에 대해 미리 들은 걸 확인하는 용도일 때만 빼고. '아버님이 000셨다면서요?' '직업이 000라 들었습니다...?'
맥주를 홀짝이며 10초씩 기다려보아도 질문이 나오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이것저것 물어본다. 사실 궁금하진 않았다. 일은 어떤지, 쉬는 날엔 주로 무얼 하며 보내는지,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 또 그 공부를 좋아했는지, 가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왜 소개팅에 나오게 되었는지, 지인의 지인인 주선자와는 어떤 관계인지, 지금 사는 곳은 어떤지 등등등등. 그는 모범생같이 질문을 하면 즉각 즉각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한다. 미안하지만 딱히 오, 감탄할 만한 대답은 없었다. 거래처 사람과 만나듯 나도 텐션을 끌어올려 리액션을 보이며 최대한 내가 아는 키워드들을 쥐어짜서 장단을 맞춰본다. 하... 밧데리 닳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끝. 정말 끝.
2차를 어디로 갈까요 묻는 그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내일 할 일이 많아서 집에 가야겠다고 정중히 말하고 차라리 여기 1차에서 좀더 있다 가자고 제안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해 궁금한 게 없어. 스무고개는 넘었는데 말이야. 멀리서도 오고, 그에겐 푼돈일지라도 1차를 사준 터라 (무엇보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또 식사를 할 수는 없어서) 인간적으로는 미안했지만 일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늙은이가 되어버린 나라서, 더 이상 낯선 이 남자를 위해 머리를 쓰기가 싫어졌다. 역시, 나는 이제 안된다 안돼. 이렇게 또 한 번 나에게 실망한다.
나중에 주선자에게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니, 좀 거칠게 말해서 그는 우시장에 소를 사러 나온 사람인 것 같았다. 나를 만나기 직전 소개팅에서 여자분이 더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거절했다는데, 그 이유가 몸이 작고 약해서,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놀랐다.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하던 일도 아버지 사업을 도와서 하다가 본인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다 들었는데, 역시 있는 사람에겐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필요한 건가보다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헤어질 때쯤 요즘 결혼을 하고도 자식을 원하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의견을 물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그는 원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뭘 기대하고 구하러 그 자리에 나갔을까. 나는 아직도 어떤 사람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 복잡한 관계에서 취하는 스탠스의 내셔날레,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미래, 혼자가 편할 나이에 왜 누군가와 함께 하려고 하는지, 이런 게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게 되는데, 우린 각자 다른 것을 사러 시장에서 만났고, 그래서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주말, 한참 어린 친한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난 여러 후배들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와, 이렇게 어리구나. 결혼식에 어울리는 얼굴들은, 빛이 나는구나. 내가 주로 만나는 얼굴들, 그리고 거울 속에 매일 비치는 내 얼굴과 완전 다른, 그 광채들. 내 눈은 아직도 이런 얼굴들, 피조물로써 정점에 오른 이런 얼굴들을 보고 반하는데, 내 눈을 달고 있는 내 얼굴은, 이 친구들이 보는 내 얼굴은 완전 다르겠구나. 얼굴 뿐이겠는가, 나는 아직도 왜 내가 이 친구들과 같은 라인에 서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모든 것이 부끄러워져서 나는 신랑신부가 행진을 끝낼 때쯤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 세계에 더 이상 속해 있지 않음은 알게 되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