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그레타 거윅, 2020
어라, 이게 뭐지, 눈물인가.
영화관에서 그레타 거윅의 ‘작은아씨들’을 보다 어둠 속에서 놀란 나. 보고 싶어했던 영화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예고편을 보지도 않았고, 그레타 거윅의 전작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지금 이 장면은 슬픈 장면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왜 눈물이 나는 거지.
처음에 눈물이 방울방울씩 나다가, 몇 번을 울었다. 그래서 누가 또 보러 가자고 하면 또 갈 수 있다. 또 잔잔하게 울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우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뻔히 이야기를 다 아는 리메이크영화를 보며 눈물이 나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뼈(속까지 헤)테로다. 지금 애인도 없고, 결혼도 안했고, 데이트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지경이니 증명할 길이 막막하지만 어쨌든 나는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 특히 여자들끼리 우글우글 있는 것을, 못견뎌하는 쪽에 가깝다. 아무리 친해도 여자가 난데없이 내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순간, 나는 경직되고 이걸 언제 풀어야 하나 고민을 시작한다. 헤테로적인 연애가 불가능하고 여자들은 대체로 나를 좋아하니 정체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생각했을 때도, 여자의 푹신푹신할, 그 지방 가득한 몸을 생각하니 약간 비위가 상하는 느낌이 들기에, 안되겠구나 생각했으니.
연인과 (구)가족들이 없는 내 관계망이라는 건 이제 거진 느슨한 타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내가 그토록 몸서리쳤던 우리집으로부터의 독립,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도망가고 싶어했고, 이제 그들은 충분히 늙었고 우리는 명절이나 각자의 생일 정도에만 만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러니 나는 정말로 내가 열일곱살부터 원했던 어쩌면 완벽한 독립을 드디어 이루었는데, 내 인생에, 내 생활의 루틴 안에 이제 ‘가족’과 그 비스무리한 건 거의 사라지고 있는데. 감정의 빚 같은 건 이제 누구한테도 지고 살지 않는데, 문득 너무 화나고, 너무 슬프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경멸하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지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는 감정들은 그 대상의 카테고리 수준이 여러 가지다. 모르는 사람부터, 아는 사람들, 지인들, 친구들, 아주 친한 친구들, 동생들, 부모님.. 그리고 없는 애인, 혹은 남들 다 가진 남편과 자식들. 이 중에서 내가 직접 말로 전하는 감정들은 관계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의례적인 말이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아껴서 하는 바람에, 이제 진짜 그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가물거린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관계들은 나를 지옥에 빠트려왔다. 너무 좋아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게 되고, 너무 좋아해서 나만 갖고 싶고, 그 좋아하는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고, 그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내가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었다. 그냥 화가 잠깐 나는 게 아니라 극도로 화가 나거나 늘 화가 나있었다. 아니면 죽을 듯이 슬프거나. 레 미제라블.
이 감정의 진폭을 줄이고 싶어서, 감정 빚 져보니 정신이 감당을 못해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내 것만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 때문에, 이 따위 여러 하찮은 이유로, 또 이기적인 이유로 관계를 점차 포기해왔더니, 결국 나 혼자, 공간에서, 면으로, 또 가느다란 선으로, 드디어 점 하나로 남은 기분.
물론 사람들은 나에게 잘해준다. 나에게 다정하게 말해준다. 소셜리. 사회적인 관계망 속에서, 매너를 지키기 위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둘의 상호 효용감을 유지해야 하니까. 기억에 남는 다정한, 좋은 말들, 잘한다, 고맙다, 대단하다, 고생했다 등등 좋은 말들이 많았지만, 정서적으로 쓸모있는 말을 들은 지가 언제일까. 내가 무엇인가를 제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좋아해 준’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좋아한다, 보고싶다는 말을 들은 지가 언제일까.
영화를 보기 전 한 2주 정도 나는 혼자 엄청 바빴다. 집착하듯 책을 읽고, 회사 이메일을 정리하고, 문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업무를 처리하고, 교육을 듣고, 팟캐스트 편집을 하고, 운동을 했다.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헤아릴 시간없이 평온한 2주였기에, 이 무슨 고3같은 스케줄인가, 하며 평화로움에 감탄한 2주였는데, 내가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룰루랄라 심야 영화를 보러 가서 나는, 작은 감정 감정들에 적셔졌다. 별 것도 아닌 그 자매들끼리 서로 바라볼 때, 부잣집 할아버지가 옆집에서 놀러온 소녀가 놀라지 않도록 몰래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 아픈 동생과 바닷가에 소풍가서 책을 읽어줄 때, 몰래 쓴 편지를 넣어둘 때, 엄마가 딸과 얘기할 때, 아빠가 돌아와서 다같이 부둥켜 안을 때……. 나는 안해본 것들, 해본 지 오래 된 것들을,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줄 때, 내가 대신 울었다. 아니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다. 말 대신.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들,
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
나를 오래 알아온 사람들,
내가 사랑했거나 하려고 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뭔가 들었으면 좋았을 말들을
영화 속 엄마에게, 언니에게, 동생에게, 좋아하는 남자에게 들었기 때문일까.
아주 작은 스위치를 하나 눌렀을 뿐인데 터져나온 이 감성들 때문에, 눈물이 나는 그 순간에도 사실 나는 행복했다. 문화적으로. 찰나일지라도. 그레타 거윅은 대단했다. 나는 한국 드라마를 본 지가 오래 되었고, 특히 현대물은 다들 좋다고 말하는 시리즈들도 봐내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세련되게 풀지 못하는 연출 지점들은 도저히 몰입이 안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도대체, 이 이백년 전 드라마를 이렇게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나를 공감시키다니. 오글거리는, 유치한, 무게잡는 대사 말고, 몇 마디 없는 말로, 화려하고 쓸쓸한 색감으로, 눈길로, 태도로, 특히 태도로. 마치 이 이야기가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뿌듯하게 울고 나와, 같이 본 동생과 좋았다고 소리지르고 감탄하며 각자 집에 돌아가서, 나는 고작 집에서 나를 위해 울어주는 한 마리 고양이만 발견했을 뿐이다. 나보다 더 외로운 묘르신, 너를 어쩌니.
여전히, 이 영화를 생각하면 조금 슬퍼진다. 특히 여자 감성으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주먹 불끈 쥐었던 소녀는, 이런 가족같지 않은 가족은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지만, 그건 성공한 것 같은데, 그래서 이게 니가 원하던 삶이니? 누가 다정하게 물어보면 나는 으앙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별 일 없는 채로, 정서적으로 누구에게도 쓸모있지 않은 채, 회색 담벼락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기 있는 줄도 모르는 그런 존재로 살아갈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제공할 수 있게 된 많은 효용가치 때문에 사회적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지만, 나는 누군가와 매일 포옹을 나누지 못하고, 하루 두 끼는 밖에서 먹고, 주말 내내 잠옷을 입은 채 책을 읽고, 누구도 내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기 때문에. 나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벌이고 뭔가 꾸역꾸역 하고는 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자꾸만 생각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한가한 쓸쓸함에 젖어있고 싶지 않아서 가열차게 뭔가 해보지만, 이 모든 게 결국 무슨 소용인가 싶은 궁극적인 고독감은, 늘 바닥부터 나를 위축시킨다.
내 하찮은 인생이, 왜 의미있어야 한다고 이토록 발버둥치는 걸까. 이것조차 오만한, 인생에 대한 시건방진 생각인가 싶어서 ‘외로움’이라는 단어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제 생각하기나 쓰기를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접어둔다. 내 마음 속 호리병 안에 이렇게 접어둔 종이학이 몇 마리쯤 될까.
감정에 대해서 자꾸 쓰려고 하는 것은, 나에겐 감정을 표출할 아주 작은 유닛의 사람들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연인이 없고, 남편이 없고, 아이가 없다. 내가 돌봐주고, 내가 감정을 전달할 상대가 필요하다. 문득, 그렇게 이기적으로 내 목적을 위해 아이를 가진 후,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아이를 위해 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그게 인생인가, 그렇게 희로애락을 대가로 얻는 것이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디자인 해놓은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사실 좀더 어렸을 땐 전통적인 가부장제에서, ‘너 때문에 인생 망했어’ 타령과 함께 가사노동/임신/출산/육아를 부담하는 대신, 화려한 결혼식과 프로포즈가 필요한 거 아닌가 생각했었다. 비슷한 맥락인데 욕망을 추구하라, 대신 평생 대가를 치르며 속죄하라,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결론.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감정의 격랑이 싫어서, 또 뻔히 다 아는 것들이라 여기고 갖지 않으려고 무시했던 욕망을 이기는 데 나는 지금까지 성공했다. 싫은 것을 갖지 않는 일에 대하여. 그렇지만, 그 댓가로 내가 얻은 것은 뭘까, 인어의 목소리 같은 것? 공허한 평화랄까. 표출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그것들을, 자웅동체처럼 내 안을 내가 스스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역시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매일 밤 자각한다. 그래서 또 쓴다. 만들어낸다. 재미있어서 라기보다, 안하면 정신이 이상해질것 같아서. 점점 사람들을 만나서 소모하는 에너지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고 있어서. 피로를 이겨낼 체력은, 호기심과 욕망을 쫓는 그 에너지로 버티는 건데 그게 없다. 감정, 그것은 인생을 살아갈 에너지. 그래도 매일 생각한다. 내가 그 지옥을 다시 원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