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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01. 2020

왜 결혼을 못하느냐면

[연애에에에에세이] 50대가 된 나를 상상.... 하지 말자.

나는 밀레니엄 세대라 우기고 싶지만 실은 걸쳐져 있다. 친구들은 79년생, 70년대생이라고 하면 이제 진짜 옛날사람같은, 바랜 흑백 사진 느낌이라 아련할 지경. 요즘 어떤 모임이든 남자 동기들이 있는 모임을 가서 얘기를 하다가 놀랄 때가 많은데, 그들의 꼰대력, 그리고 이제 스스로 본인들을 다 죽어가는 뒷방세대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에이징커브상 노화의 속도는 각자 살아온 양식에 따라 차이가 나기 시작해서, 어떤 친구들은 초면에 말놓자고 말해놓고도 자꾸만 네, 아닙니다 존댓말을 쓰게 된다. 내가 대리,과장 나부랭이일 때는 부장 팀장들이 웃자란 풀들처럼 높아보였는데, 어느새 다들 차장,부장이고 좀 빠른 친구들은 벌써(!) 이사를 달기 시작한지라 밑에 관리하는 직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친구들과는, 아무리 우리가 사적인 관계라도 곧 대화라는 건 끝난다. 내가 일단 집에 가고 싶다. 말이 안통해. 아빠랑 얘기하는 기분이라고.


한편 여자사람친구들을 본다. 확실히 끼리끼리 모이는 법인지 아직 (미혼)이든 아니든(비혼) 내 주변에는 여자 싱글들이 남자 대비 2배는 넘는 것 같으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각자들 외롭다 찡찡대도 넌 왜 결혼 안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이제는 예비신부보다 예비독거노인에 가까워졌으므로 결혼은 커녕 이대로 50대가 되면 어떡하냐는 푸념이 차라리 대화의 아페리티프이미 유부들과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자의든 타의든. 서로 간에 공통 화제란 건 당연히 없고, 아무리 그들이 남편과 시댁 욕해봐야 속으로 '넌 다 가졌으면서 뭘 욕까지 해' 혹은 '너 진짜 그것도 모르고 저질렀냐' 싶어 대화를 피하게 된다. 어쨌든 싱글친구들, 나의 자랑스런 포리원투 친구들은 언제나 상호의존적 키퍼들인데, 최근 남자동기들과 만날 때와 또다른 점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안정감과 머무름이 있다. 나이는 먹었지만, 다들 본인이 가장 만족스러웠던 그 시기에 멘탈리티가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대개 삼십대 초반 정도에 편안함을 느꼈던 것들, 내 것이 되었다고 판단된 취향들, 어떤 문화의 수용 정도 등을 얘기하다보니 어리숙한 이십대를 졸업할 때쯤 가장 최적화된 생활 패턴과 루틴에 안착했구나. 좋아하는 배우나 드라마들, 만나고 싶은 남자 타입, 그리고 또 죽도록 싫어하는 남자들에 대한 불평. 늘 만나면 디테일은 다르지만 비슷한 화제, 비슷한 불평, 비슷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곧 지루해진다. 내가 말귀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 엄마의 시댁과 남편과 주변 00네 엄마들은 늘 대화 속에서 가루가 되었었는데,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종종 데자뷔가 느껴진다. 도망가고 싶다. 그들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본인이 옳으며 주변과 세상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뉴 이즈 굿.

농담처럼 늘 하는 말이다. 근데 요즘은 절실하게 느낀다. 특히 코로나시대를 맞아 집콕하며 책을 왕창 읽고 세상 달라지는 걸 깨쳐가니 더 그렇다. 이게 재밌구나. 여기에 미래가 있네. 뭔지 잘은 몰라도 인공지능, 4차산업, 달라질 금융세계와 시장, 에너지, 환경, 미래, 의료, 바이오, 노화... 공부할 게 아직도 천지고, 나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겠는 열 다섯이 된 기분이다. 웬지 열일곱살부터 남들 다하는 가족 만들고 결혼하고 행복하게 백만년 잘 살아볼 그런 결심, 아니 호기심조차 생기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 과정의 몇n차쯤 이미 부모 옆에서 너무 많이 봐서일지도 모른다. 나 이 과정의 끝에 뭐가 있는지 이미 봐버린 것 같은데. 결혼의 시작은 못봤지만 종말은 본 것 같은데, 아니 무엇보다 그 결합의 지난함을 이미 다 맛본 기분인데. 물론 이 우주 속에 나도 그저 한 마리 유전자 캐리어에 불과하다는 거 너무나 잘 아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사람들인 거 아는데, 그래도 뭔가 안해본 거, 내가 결과를 모르는 거 해보고 싶은데? 뭔가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을 더 찾아보고 싶은데? 아직 좀더 스스로를 '무한 가능태'로 보고 싶은데.


물론, 좋은 드라마, 에세이, 영화 속에서 멋짐 폭발하는 연애와 사랑과 가족애 뿜뿜하는 내러티브와 감동을 만날 때면, 숨겨왔던 인간적인 욕구는 종종 솟구친다. 나도 잘할 수 있다! 내가 안해서 그렇지, 어떤 남자든 내가 결혼만 해봐라, 나의 생활력과 감성과.... 그리고 내 이쁠 새끼들 낳고 알콩달콩 잘 살 수 있겠.....지?



진짜?



자신이 없다. 종교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미션이 있다면, 남들이 믿어주는 만큼, 또 내가 속한 조직이 성장할 수 있다면 이 한몸 바칠 그런 설레임과 (예비용) 책임감은 늘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가족, 이 거대한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 내 발로 걸어들어가 대부분의 날들을 웃으면서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내가 내 발등 찍을, 어쩌면 시작부터 불공정한(세상에 완전 공정한 거래가 어디있겠냐만은) 그런 사회적 약속을 누군가와 할 자신. 안하면 외로워서 죽을걸? 한편 목소리가 속삭이지만, 지금도 이미 충분히 외로운 데다가, 겪어본 바 누군가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낄 상대적 고독감은, 얼마나 더 지독할지 알기에 혼자 외로운 게 속시끄러운 것보다 낫지 않은가 생각하며 내 마음의 철빗장을 오늘도 하나 더 지르고 내일을 꿈꾸며, 고양이와 함께 잠들기 전, 야심한 밤에 쓰는 소심한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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