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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26. 2020

[02]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건

스무살이 지나서였다

엄마가 혹여 잊어버릴까 늘 아내의 역할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편달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불행히도 매일같이 골골대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내는 아빠와 달리, 체력이며 사교성을 타고난 엄마는 나와 동생들이 학교를 알아서 갈 무렵부터 집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를 끝없이 찾아냈다. 등산이나 수영, 그림, 퀼트 같은 취미생활은 오케이, 하지만 학원강사라든가 상담교사라든가 어떻게든 끊어진 경력을 이어서 돈을 벌러 나가겠다고 엄마가 의지를 밝힐 때마다 아빠는 늘 선녀를 데려온 나뭇꾼마냥 단호하게 대처했다. 우리 집이 넘치도록 부자라서도 아니고, 아빠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엄마가 하려는 일들은 경력도 돈도 안될 뿐더러,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가서 뭔가를 하려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약속된 의무를 방기한다는 뜻이라며 직업병적 장광설을 펼치는 것이 아주 볼만했다. 이 궤변과 논쟁은 언제나 엄마가 시작을 포기하거나 하던 일을 때려치워야만 끝이 났다. 


이 중 제일 자주 아빠의 신경줄을 긁은 것은, 엄마의 성당활동이었다. 지방으로 이사 온 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성당을 나가 영세를 받게 했는데, 하느님이야 있건 말건 자식들이 신앙생활하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랐던 엄마의 ‘있어보임’에 대한 갈망이 강력한 동기였지만, 실은 이사를 오자마자 매주 토요일 저녁은 할아버지댁에서 먹겠다고 선언한 아빠에게, 싫다는 말 대신 못가는 명분이 되어줄 주기적인 스케줄이 필요했다. 


그 시절 토요일 오후와 저녁은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 식솔들을 데리고 본가에 저녁을 먹으러 가겠다는 아빠와, 토요일 주일학교를 핑계삼아 어떻게든 시댁을 피해보려는 엄마의 총칼없는 전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화가 나서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아빠를 보면서 저럴 거면 왜 매주 가서 고통받나 싶었고, 시댁에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말을 하지 우리를 앞세워 방패막이로 쓰려는 엄마가 못마땅했다. 사춘기의 나는 토요일 저녁에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싶었을 뿐, 엄마아빠와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성당과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특히 종교는 지금까지도 아빠의 일생을 사로잡은 연구 대상이고 목사님이든 스님이든 아빠와 대화하면서 가루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본인이 불교신자라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가 성당을 가는 것도, 고모들이 교회를 가는 것도 전부 아빠의 모두까기 대상들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첫번째 타겟. 게다가 하필 토요일에 모든 미사와 주일학교 일정이 매주 반복되니 조용히 넘어갈 수 없었다. 


둘만 싸우기에는 지루했나보다. 아빠는 종종 예고도 깜박이도 없이, 아무 날 아침 식탁에서 난데없이 넌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냐고 엄마 말고 밥 먹는 나에게 물어봤다. TPO같은 건 없다. 아침에 간신히 눈떠서 학교가기 바쁜데 하느님? 어쩌라고. 실은 본인도 장남노릇 하느라 죽겠다는 건데 속된 말로 효도를 하청만 주기(너네끼리 다녀와라)엔 찝찝하고, 그렇다고 혼자 독박쓰기(나 혼자 왜 주말 날려)는 좀 억울했던 것 같다. 이제야 말하는데 정말 싫었다. 엄마든 아빠든, 나에게 삼자대면 하듯 ‘넌 어떻게 생각해’ 얼굴 빤히 보며 물어볼 때. 우리 집에서 대화가 제일 부족한 관계는 당신들이신데요. 그래도 아침엔 속으로 투덜대며 고개 끄덕이면 별 일이 없었다. 밤에는 성당으로 시작된 싸움에 밥상이 몇 번 날아갔었다. 종교전쟁에서 언제나 종교는 전쟁의 진짜 이유가 아니다. 


결국 집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에 와서도 여전히 엄마의 화두는 ‘아빠는 이상한 사람인데 왜 그럴까’다. 아빠가 이상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새삼스럽기도 하고 지금 옆에 없는 사람은 신경 끄고 편하게 놀고 먹자고 여행을 왔건만, 옆자리에 앉아 혼술하는 사람마냥 이국적인 풍경을 안주삼아 넋두리처럼 본인 인생이 왜 망했는지 조곤조곤 말해준다. 카운터 너머 바텐더처럼 나도 안듣는 듯 듣다가 한 마디 한다. 

"엄마, 나 모르는 얘기 이제 없는 것 같어. 삼십 년째 같은 레파토리 지겹지도 않아? 듣는 나도 지치는데. 그리고 진짜 미안한 얘긴데 엄마는 여행와서도 이렇게까지 아빠 생각하는데, 아빠는 절대 엄마 생각 이렇게 열심히 안할 것 같아."


그렇지만 내게 지금의 엄마가 그렇듯, 엄마 역시 이해되지 않는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끝도 없이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너네 아빤 그 때 왜 그랬을까, 내게 종종 물어보는 데 그저 난감할 뿐. 


- 백일된 아기안고 있는데 화난다고 유모차 들어올렸을 때, 도망갔어야 했을까?


- 니 동생 유치원 다닐 때 맨날 옷타령하면서 밥도 안먹고 유치원도 안간다고 떼썼잖어. 정상적인 남자면 아이고, 아빠가 이쁜 옷 못사줘서 미안하다, 그런 생각할 것 같은데 너 그 때 아빠가 걔 뺨 때려서 울린 거 기억나?


-  대학교수 좋은 점이 안식년인데 어디라도 갔다 왔으면 오죽 좋아. 다들 애들 학교다닐 때 영어 제대로 배우게 가려고 줄서는 판에 결국 정년퇴직할 때까지 안간 사람은 니네 아빠가 유일하지 않을까?


-  너 교통사고 냈을 때도 아빠가 제일 먼저 뛰어가서 수습해주고 놀란 딸 달래고 해야 되는데, 죄책감 때문에 학교다니기도 힘든 딸한테 술먹고 전화해서 자기 힘들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게 말이 돼?


아빠가 그나마 술을 먹지 않은 맨정신에 했던 이상행동 중 일부일 뿐이고 엄마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인 건 알겠는데 제발 그만 좀 물어봤으면 좋겠다. 떠올리고 싶은 기억도 아닐뿐더러 어차피 본인이 기억한다고 해도 그 때 왜 그랬는지 모를 테니 악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안된다. 제발 엄마 멘탈이라도 파괴되지 않도록 스스로 잘 좀 지켜줘. 그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는 거잖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빠의 스파링 상대는 오로지 엄마였다. 불행히도 원했던 인서울 대학을 다 떨어지고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대학을 집에서 다니게 된 나는, 곧 아빠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일단 집에 있기가 너무 싫었던 점은 디폴트값인데,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은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고 아빠는 내가 그런 인간인지 몰랐기에 대학 입학 첫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엄마는 나에게 ‘군대라 생각하고 제발 정시에 집으로 복귀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당연했다. 고3때까지 내가 아빠와 나눈 대화는 단 한 가지,  ‘돈 좀 주세요’였으니까. 


몇 가지 사건을 겪어보니 우리는 서로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수준이었다. 아빠도 물론 인생1회차 아빠인지라 다 큰 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대학생들을 잘 아는 교수님 아니신가. ‘여대생’에 대한 편집증적 보호본능인지 뭔지, 엄마한테 그래왔듯 갖가지 이유를 들며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무조건 아무 것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전 학년이 다 가는 전체 학과 MT부터 ‘별 거 없다’며 참석을 불허했고, 이것은 내 대학생활 내내 유지된 ‘가택구금’의 시작이었다. 도대체 내 죄목은 무엇입니까. 


나는 입을 다물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유소 알바조차 못하게 하는 ‘온실 속의 잡초’로 갇혀 살며 용돈 타 쓰는 내 처지와 독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신세를 한탄하며 저 인간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서울대학을 간 친구들과 점점 연락이 뜸해지며 나는 ‘와신상담’을 실천하고 있었고, 대학졸업은 몰라도 반드시 ‘출가’는 해야한다 다짐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차피 우리는 아빠가 말한 것처럼 한 지붕 아래에 못살 운명이니까.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니 저 인간, 내가 집에서 빈둥대는 건 아무 말 하지 않으면서, 집 밖에 나가서 뭘 하겠다고 하면 전쟁이라도 난 듯이 놀래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저 인간의 심리를 먼저 파악해야 해. 


우연히 인터넷에서 알코올 중독자 진단 테스트를 해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리스트가 말해주는 바 그는 명백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일단 술을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고 오는 사람이었기에, 아빠가 늦는 날은 현관문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만 나도 나와 내 동생은 바로 불을 끄고 자는 척 했다. 제발 오늘 밤은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며. 목을 쥐어짜며 부르는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골목에 울려 퍼지면 내 안에서도 울리던 그 공포감. 아 제발 엄마가 살아남기를. 아침에 일어나 엉망이 된 집을 청소하는 일이 없기를. 불러봤자 소용없는 경찰서에 숨죽여 전화할 일이 없기를. 폭음, 블랙아웃, 폭언과 폭력. 술마시면 누구나 하는 건 줄 알고 대학교 1학년 때 매주 이런 저런 공짜 술 잔뜩 퍼먹고 필름이 끊기는 내 등 뒤에서 친구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주도를 모른다고 했다. 


학교도 재미가 없고, 흘러가는 내 청춘도 아깝고, 가족도 지긋지긋한데, 도대체 이것들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자꾸만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만은 넘쳐났다. 어차피 원했던 학과에 진학했던 것도 아니고 시골에 있는 학교라 갈 데도 없어서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사회학, 심리학, 가족관계, 가정폭력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책들을 뒤적거렸다. 역시 감옥에서는 책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엄마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봉쇄하려는 아빠의 행동이 유별난 것도 아닌, 흔해빠진 의처증 남편들의 행동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럴 깜냥이 없는 사람인 줄 알면서도 엄마는 아빠가 지옥까지 쫓아올 것 같다며 두려워 했고, 술에 취한 밤이면 아빠는 밤새 엄마에게 주절주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 늘어놓으며 주정인지 투정인지를 해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는 직업을 잘못 골랐다. 형사나 검사를 했어야 해. 듣다 듣다 너무 지겨워서 고개 끄덕이며 너님 말이 다 맞다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고백을 안할 수가 없게 한다. 사람은 밤에 잠을 자야 하니까.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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