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안에 치고 박고, 과연 부부란 무엇일까
부부. 나에겐 아직도 참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 중 하나다. 아귀가 딱 맞는 경첩이나 아니면 한 쌍의 원앙 같은 것이 떠올라야 하는데 엄마와 아빠의 그것을 생각하면 랙 걸린 exe 실행 버튼같다. 계속 돌아가는 표시는 나는데 실제로는 멈춰버린. 곧 [응답없음] 메시지가 보일 것 같은.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걸 처음 본 것은 열살 때였다. 퇴근한 아빠와 엄마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요는 아빠가 아침 출근 전 부탁한 일을 엄마가 깜박한 것.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아빠가 옆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가부좌 튼 채 앉아쏴로 힘껏 던진다. 정확하게 엄마의 관자놀이를 가격하고 떨어진 휴지를 주우며 눈길을 내리깐 채 아빠를 달래듯 내일은 꼭 하겠다고 말하는 엄마는 방구석에서 얌전히 숙제를 하는 척 하고 있던 우리 자매를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단 한 번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꼴을 자식들 앞에 보이는 걸 아빠는 결코 겁내지 않았다. 검도라는 운동을 한 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마 20년이 넘게 새벽마다 검도장을 다녀오는 아빠가 연습용으로 집에 사놓은 죽도가, 우리 집 안방이나 거실에서 부러져 나가는 걸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한 번 때려본 사람은 한번만 때리지 않는다. 두루마리 휴지는 연습용이었을 뿐, 이후 자주, 아빠의 죽도는 제 용도로 사용되기보다 쾅 닫힌 채 잠긴 안방 안에서 높은 비명과 함께 탄력 좋게 울렸다.
타-앙 타-앙.
어린 나는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울려퍼지던 소리만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안방. 그 문은 자주 잠겼다. 아빠가 서재 방에서 죽도를 챙겨 쿵쿵 거실을 가로지른 후 쾅 하고 닫히는 날과, 한밤중에 저 멀리 딸깍 하고 잠기는 날은 빈도가 비슷했다.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침대에 누워 떠들던 우리 자매는 0.1초쯤 멈췄다. 잠긴 방문 너머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쫑긋 세워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웬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하던 얘기를 조금 큰 소리로 마저 하곤 했다.
각자의 부모에 대한 비평은 십대 시절 나름 비중이 큰 주제다. 나 역시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우리 부모 외 다른 부모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하다는 것을 여러 친구들에게 주워 들으며 안도하곤 했었다. 조심스럽게 한 명이 아빠가 엄마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고 털어놓으면 곧 너도 나도 기다렸다는 듯 얘기하며 우리끼리 분개하고 그런 걸 본 적이 없다는 친구가 (간혹) 있으면 한껏 부러워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걸 봤다는 얘기가 흔한 데 반해, 엄마 아빠가 뽀뽀를 한다거나 두 분이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걸 봤다는 얘기는 거의 없었는데, 그럼에도 친구들끼리 가끔 ‘야한 얘기’로 낄낄댈 때 ‘엄마아빠가 하는 걸 처음 알게 되었던 사건’ 같은 건 좋은 주제였다. 징그럽지만 어른들이 뭐하는가 궁금해 죽겠는, 좋았던 시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채집하며 부모가 어떻게 나를 대하는지, 또 서로는 어떻게 대하는지 조금씩 알아갔고, 인류라는 종족의 ‘정상성’의 범위를 넓혀갔다.
야한 얘기는 대부분 재미있다. 특히 재미있고 야한 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엄마가 이 주제를 꺼내기 시작하면 도망가고 싶다. 누군가가 이야기 한 조각을 슥 보여주면, 이야기 보따리상들 간에도 상도가 있으니 나도 내 얘기를 한 두 푼은 꺼내 놔야 하는데, 엄마가 은근슬쩍 나의 경험을 떠보기 시작하면 나는 토끼처럼 요리조리 드리프트를 시전하며 도망가다 어물쩍 딴 얘기로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잘 피해 살아왔는데 서른이 넘으니 엄마는 직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저녁 먹고 귤 까먹다 갑자기 “아이고, 이렇게 배가 빵빵하게 부른 날 하자고 덤비면 속이 어찌나 울렁거리던지” 라든가 “피곤해서 하기 싫다 하면 남편에게는 응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내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놔서 할 수 없이 했다” 라든가. 갑자기 19금 성인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엄마의 하소연을, 귀가 뚫려 있는 데다가 K-장녀 콤플렉스 덩어리인 나는 어떻게든 받아쳐서 이 얘기를 대화라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적절하게 반응하며 해결방법까지 조언해주는 일은 나의 취미생활 중 하나지만 이 천일야화 시리즈는 듣기 민망한 건 둘째치고, 미치도록 재미가 없었다. 관능도, 대화도, 공감도, 추억도 없는 중년 부부의 성생활 이야기는 야하기는 커녕, 들을수록 슬퍼졌다. 과연 그들이 섹스 말고 키스는 얼마나 했을까.
듣다가 지치기도 하고 엄마한테 내 아빠 욕을 듣는 것도 좋은 건 아니다 싶어서 아빠 얘기 딴 아줌마들이랑 하면 안돼? 물어보면 엄마는 단칼에 대답한다.
- 그 인간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너 밖에 없잖아.
할 말이 없다. 사실 엄마 말은 대체로 맞다. 엄마 말을 들어야 자다가 떡이 생긴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어서 할 수 없이 또 듣는다. 게다가 도대체 저런 얘길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겠나 싶어서. 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이것 밖에 없다. 내 부모의 일이지만 그들 사이의 일이지, 나와 그들 관계의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자식으로 어쩌다가 태어나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갚아도 모자랄 뿐이지만, 진실과 화해를 위한 그들의 과거사 정리를 내가 중개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내 부모를 완벽한 타인으로 바라보고,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내가 세상 긍정적인 낙관주의자라 하더라도, 내가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냉정하게,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다.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결혼을 한 후에는 엄마처럼 살게 될까 두려웠다. 검고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듯 답없는 고민을 하느라 남들처럼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건 가질 틈이 없었던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잘 몰라야 저지를 수 있는 그 모험을.
엄마가 맞는 모습을 봐서, 아빠가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서로가 애틋하게 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은데 잘못 걸려 또라이 같은 남자 만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도 아니다. 고부갈등이나 내집마련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차피 부조리하고, 언젠가 내가 어떻게든 붙잡고 결혼이라는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었던 남자도 있었다. 우리에겐 유머가 있으니까. 삶은 함께 견뎌가는 거라는 걸 아니까. 다만, 나는 ‘하루 만에 치고 박을 수도 있는 것이 부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현명한 엄마가 왜 이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지 이해해야만 했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