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해야 안다면

자존심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 봤자, 내 손해더라

by 랑끗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냐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이 대화는, 인터넷 상에 우스갯소리로 돌아다니는 연인의 싸움에 흔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연애하기 전, 나는 이 대화를 보며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성평등을 외치고 있는 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남자 친구들을 향해 이런 말을 잘 내뱉는다. 내 주변에 몇몇 친구들도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모솔이었던 내게 연애상담을 하고는 했는데, 이런 부류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서운했는지 그냥 말을 해."

당시에 이해가 전혀 안 갔다. 그냥 둘 사이에 간단한 대화로 끝날 것을 왜 굳이 싸움을 키우고, 또 나한테까지 이런 하찮아 보이는 고민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냥 간단하게 "네가 약속시간에 늦어서 나는 네 마음이 변했다고 느꼈고, 그래서 서운했어. 너 연애 초반에는 안 그랬잖아."라고 솔직하게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며칠간 이어지는 싸움으로 만드는지.


근데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그런 답답하고 새침한(?) 면이 내게도 있음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전에 내 친구들에게 그렇게 무심하게 조언했던 것을 조금 후회하기는 했다. 이게 단순히 대화방식을 넘어선 복잡 미묘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좀 더 콕 집어 말하자면, 자존심 싸움의 문제다.


남편은 여자 형제가 없다. 남중, 남고, 그리고 공대를 다닌 남자.

그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분석적이고,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 면이 연애하던 시절에는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런 배경을 가지고도 안 그런 분들이 있겠지만, 남편은 지극히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하고 행동을 고치는 편이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 되면 조금 어려워한다.


보통 주변으로부터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나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웬걸. 남편과 다투게 되면 꽁해지기도 하는 내 모습이 있는 게 아닌가?


'이걸 일일이 말로 해야 알아?'

남편이 눈치챌 수 있도록 나름 수많은 힌트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왜 갑자기 화를 내?"라고 물으며 순진한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면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했다. 어쩌면 그가 고단수여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 남편은 정말 '일일이 말로 해야'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이 반복되며, 이게 반복이 되면서 '아니, 이렇게 티를 냈는데도 굳이 말로 해야 알아?'라는 불평불만이 가득해졌다. 내가 지나가듯이 한 이야기, 아니면 거의 대놓고 한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을 보아하니, 그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고 생각을 하다 보면, 또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남편이 생각이 짧거나 이유를 일일이 찾기 귀찮아서 둘러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았다. 남편은 정말 모르는 것이라는 걸.



결혼 초반에는 자존심을 세우는 게 가능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리지 않으면, 남편은 답답해하며 무조건 사과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못된 심보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손해가 아니던가? 정말 순진한 남편은 사과한 후, 내가 화가 풀린 줄 알고 싱글벙글하고, 그것을 보며 속을 터질 것 같은 건 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일을 쪼잔하게 일일이 다 들춰서 짚고 넘어갈 수는 없잖은가? 또 그렇게 내 속을 긁는 남편의 행동이 반복되며,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고 쌓인 작은 속상함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훨씬 더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억울해했다.

왜 이렇게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드냐고.

그래서 내가 전에 있던 비슷한 일을 꺼내면 남편은 놀랐다.


그리고 말했다.


"말을 해줘야 알지! 그럼 그때 말해주지 그랬어."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래, 이렇게 말을 아끼며 자존심을 세워봤자 나만 손해다.

그리고 결국 우리 결혼생활에 악영향을 끼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척을 하거나 외면하는 것이기보다는 정말로 내 화의 이유를 모르는 남편을 보며, 나는 하나하나 알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존심 세우며 꾹 참아 봤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건 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 섭섭함에 관한 긴 설명을 남편에게 늘어놓으며 내가 이런 쪼잔한 사람인가, 라는 자괴감도 들고 자존심도 상했다. 작은 불씨였던 화가, 산불로 번지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란, 굉장히 창피하고 유치해 보이는 디테일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내 이게 습관화가 되자 작은 섭섭함이 생겨서 내 마음속에서 이걸 그냥 넘길 수 있나, 아니면 짚고 넘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한 후, 도저히 이 섭섭함이 자연스레 잊히지 못할 것 같을 때 남편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남편은 귀 기울여서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그래야만 우리 결혼 생활에 평화가 더 길게 유지된다는 것을 아니까.


나는 일일이 말하고 세세하게 짚어준다.

A에서 시작된 서운함은 B, C, D를 거치고 E까지 이르렀다,라고.

듣기만 해도 피곤하고, 설명하기에 입이 아프지만 다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 졸렬한 사람인가, 라며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설명했을 때 남편은 그만큼 한번 입력된 것은 지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가끔 까먹을 때도 있고, 다시 한번 상기시켜줘야 하는 때가 있지만 천천히, 잘 맞춰주고 있다.

그리고 공대생답게 나름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적용시키며 혼자 내가 가르쳐 준 것을 응용해서 행동할 때마다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가끔 적용할 때 오류가 나고는 하지만, 한 번씩 그것을 고쳐주면 곧잘 수정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맞추라고 강요만 하기에는 나도 흠이 많은 사람이기는 한데, 남편도 나에게 모두 이야기하니까 쌤쌤인 걸로.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작은 것도 바로바로 이야기하는 습관, 그리고 남편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눈치를 채는 습관을 기르는 중이다. 우리 결혼 생활에 유지되고 있는 아슬아슬한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일일이 다 폭로하고 나면 남편이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며칠 동안 생각하면서 끙끙 앓을 일도 없으니, 오히려 내 마음이 더 시원하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곱씹으며 이를 갈 필요도 없으니, 내 정신건강에도 훨씬 좋고. 우리 남편은 이유도 알 수 없게 냉랭해진 내 눈치를 볼 일도 없으니 모두에게 이득인 부분인 것 같다.


그래, 말을 해줘야 안다면 말을 하면 되는 거겠지.

글로 쓰면 이렇게 간단한 것인데, 이곳에 닿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지.

참 부부 사이라는 게 복잡 미묘한 것이다.


입을 열어 상대방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게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속으로 끙끙 앓을 일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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