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
우리는 내가 스물셋, 남편이 스물다섯이었을 때 연애를 시작했다.
5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도 남편의 첫인상을 생생히 기억한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꽤 호감 상인 얼굴.
게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까지.
그리고 귀엽게 웃던 것을 기억한다.
짝사랑의 향연이던 나의 인생에 삼 년 동안 호감이 가는 남자가 없던 상태여서 나는 설레는 마음에 머릿속으로 “오?”하며 놀랐다.
모솔이라 시작된 적도 없던 연애세포가 죽은 줄만 알았더니, 나름 살아 숨 쉬고 있나 보다 싶어서.
그런데 아뿔싸, 그의 휴대전화 배경을 보니 여성분이 한 명 떡하니 있었다.
연예인이 아닌 걸 보아하니, 여자 친구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아는 오빠로 그는 급 전락했다.
순간적으로 호감을 가진 것도 그 여자 친구에게 좀 미안해져서 거리를 두었다.
게다가 남편의 꽤 예민한 성격의 조각들이 순간순간 보여서 그와 거리를 더 두게 됐다.
“앞으로 이 사람이랑 이뤄질 일이 절대 없겠군.”
나는 속으로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낀 설렘이 반가웠는데, 그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근데, 인생에는 절대라는 게 없더라.
그렇게 거리를 두고 지낸 지 반년이 지날 때쯤, 바보 같은 계기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한번 먹었다. 근데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사람이 괜찮더라. 그때 그는 여자 친구와 이별한 후였다. 근데 그가 평소보다 침울하고 초췌해 보였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전 연애에서 모두 차이고 난 뒤, 자신은 연애 고자인가 싶어서 연애는 포기하고 게임에만 열중하던 시기여서 잠 부족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거라고 한다. 역시 사람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가 이별의 여파 때문에 그런가 싶어서 마음 한구석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위로차 한번 더 밥을 먹었다. 근데 사람이 더 괜찮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왈가닥에 대책 없는 나를 꽤 얌전하고 조신하게만 봤다고 한다. 근데 막상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니 꽤 대화도 잘 통하고, 재밌는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단 둘이는 세 번 만났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썸을 탔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그는 그를 향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드는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 손을 더 길게 잡았다 놓았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그가 고백을 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늦은 시간, 우리는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감 시간을 한 시간 앞둔 카페는 한산하고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늘 흐르던 음악도 꺼져있어서 더더욱.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토록 서로를 향해 너무나도 티가 나도록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 왜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 헷갈려했는지.
뭐가 그리도 간질거리고 불확실했는지.
내가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내게 와서 뭘 마실 거냐 물었고 나는 늦은 시간이라 커피는 됐다고 했다. 어색한 정적 속 우리는 서서 기다렸다 커피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푹신한 소파, 남편은 맞은편에 딱딱한 나무 의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편이 씩 웃는 표정으로 나무 테이블 위로 불쑥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뭐?”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무언가 달라는 시늉을 하며 손바닥만 내밀고 웃으며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강아지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손 줘.”
얼떨결에 나는 내 손을 그의 손위에 포갰다.
그리고 그는 더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부끄러워서 손을 확 빼서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지금 생각해보니, 되게 바보 같은데, 그때는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보리쌀 게임도 아니고.
(콩깍지 때문에) 남편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로 계속 손을 내민 채 말했다.
“다시 손.”
손 집착증이라도 있나?
물론 당장이라도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을 잡고 싶었는데, 문득 우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마음도 모르고 무턱대고 스킨십부터 하는 건 좀 이상한데. 모솔이고 멋모르던 나는 생각했다. 손잡는 게 뭐 대수라고?
아무튼 그때는 나도 잡고 싶기는 했는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확실히 해야 손을 잡든 말든 하지라는 당돌한 생각이 들었다.
성질 급한 나는 바로 물었다.
“우리 무슨 사이인데?”
되게 단도직입적인 말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남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했다.
“우리 사귀자. 그러니까 손.”
아니, 사귈 마음이 없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남편은 그리도 당당했는지. 그리고 내 손에는 왜 그리 집착했는지.
남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정확해졌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면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는 심장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서툴고 어색한 몸짓으로 내 손을 그의 손에 얹었다. 나도 잡고 싶었으니까.
그는 따스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어렸던 우리는 그렇게 서툰 연애를 시작했고, 그때 잡은 손을 여태 잡고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날 잡은 손을 앞으로 놓을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결혼하고 나서 더는 마음 확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설렘이나 간질거림은 사라졌지만 대신 편안함과 그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자리 잡았다. 깊은 사랑과 우정이 뒤섞인 전우애스러운 감정이라고 하면 더 맞으려나?
이제 미친 듯이 쿵쾅 거리는 심장은 가끔씩 남편을 향해 심하게 분노했을 때만 느낄지라도, 머리가 산발이 되고 씻지 않은 채로 서로를 마주하는 나날이 이어질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한다. 내 인생의 일부를 넘어서서,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남편.
남편과 연애하기 전 언젠가 남편이 나와 결혼하게 됐으면 좋겠다는, 이런 멋진 남자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매일 남편을 보며 그 소중함이 조금씩 잊히지만, 그래도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가뭄에 콩 나듯 해도, 이렇게 한 번씩 남편이 내게 얼마나 간절한 사람이었는지 상기시키고 나면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결혼생활에 매일 해만 쨍쨍 비치는 게 아니지만, 투닥거림과 삐그덕 거림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님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사랑해서 다툴 수 있음이 감사하다. 우리가 아직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굳게 붙들고 있다는 증거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