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죽이의 변명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by 랑끗

결혼하기 전, 나는 화가 많이 나면 입을 닫는 편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로 입을 놀렸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가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힐지 몰랐기 때문에 상대방과 나를 위해 조심을 하면서 생긴 습관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곧장 그 자리를 피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어렸을 적에는 장롱이나 책상 밑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 울거나 혼자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고, 크고 나서는 연락을 받지 않거나 그냥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를 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애하기 최악의 유형이라는 회피형이 바로 나였던 것 같다.

아니, 그래도 내 순간의 감정으로 할 말 못할 말 다 해버리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않나?라는 게 내 변명이다.


반대로 남편은 싸우면 바로바로 대화로 풀어야만 하는 유형이다.

그는 싸움을 하게 된 인물과 대화를 할 수 없으면 답답해했다.

그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대화 단절은 곧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 었기에 싸울 때 나와 싸우고 난 뒤, 내가 입을 닫아버렸을 때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늘 싸울 때마다 그는 내게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댔다.

대부분은 내가 싸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는 질문들이었다.


이걸 싸우기 전에 알았더라면, 싸우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싸움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위에 적힌 사실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혼 초의 부부싸움을 보면 얼마나 복장 터졌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 게이지가 어느 한계치를 넘어서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멈췄고, 남편은 그것에 엄청나게 답답해했다.


"무슨 생각해? 말해 봐."

생각은 무슨 생각. 분노에 가득한 욕이지.


아니, 나는 나름 그를 위한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노력하는데, 남편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자꾸 화가 난 말투로 나를 자극해대니, 나는 되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입술을 꾹 다물고 버티기만 하는 나를 보며 더 화가 난 말투로 계속 말을 걸어댔다. 그러다가 입을 열라고 해서 입을 열면, 꽤나 감정적인 말이 쏟아져 나왔고, 말을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스타일은 또 아닌 남편은 꽤 상처 받았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악순환이 계속됐다.


우리 둘은 그런 서로를 보며 ‘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야?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라는 생각으로 가득해져만 갔다. 그렇게 계속되던 악순환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화가 한번 터진 날 풀렸다.


그날도 우리는 다투고 있었다.


그러다 싸움이 어느 지점에 이르자, 나는 여느 때처럼 입을 다물었고, 남편은 답답해서 환장하려고 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질문 폭격을 해댔다.


그런 그를 (그때는 내가 참아준다고 생각하며) 지켜보다 나는 “왜 내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못 기다려줘?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라며 불쑥 화를 냈고, 그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으니까! 알아야 고치든지, 해결해 보든지 하지.”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응?”

그 순간 자존심을 세우며 전쟁을 하던 것을 멈추고 나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남편 말투는 분명히 화가 가득했는데. 뭔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 뭐라 하지, 엄청난 츤데레라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러자 남편도 표정을 풀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한 건가? 글쎄, 남편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 나는 그저 남편이 기다려주지 못한, 성급한 성미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향한 존중이나 배려심이 없다고 생각도 했다. 대화 없는 시간에 자기가 답답하니까, 내 페이스는 상관없이 자기의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그게 왜 당연해?”

잠시 찾아온 휴전 시간의 질문이 소통의 시작이 되어주었다.


“그럼, 너는 왜 내가 그렇게 물어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화가 나면 감정적으로 말을 막 뱉어버리고, 당신을 상처 줄 거라는 걸 알아서 그러는 거야.”


“응?”

이번에는 남편이 놀랄 차례였다.


우리는 서로 황당한 표정으로 바보가 된 채, 서로를 마주 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싸우게 된지도 희미해졌던 찰나였다.

오해가 생겨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그 싸움이 필요한 것보다 더 치열해진 이유가 서로를 위한 것이었다니.


이렇게 바보 같은 싸움이 어디 있을까?


남편은 내 생각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고 싶어서 말을 걸었던 것이고 나는 남편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닫았던 것이다. 근데 서로를 위한다고 했던 행동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바보 같아.”

우리는 둘 다 이렇게 말하며 싸우던 것도 잊고서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누가 보면 이 엄청난 감정의 업 앤 다운을 보며, 이 사람들은 뭔가 싶어서 소름이 돋았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도 둘만 있을 때 하는 부부싸움이라 관전할 사람이 없다.


나름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로 싸움이 번졌다니,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주지 않아도 될 상처도 주고받았다니.

둘 다 너무 바보 같아서 웃겼다.


이 계기로 인해, 싸움 중에 날아오는 남편의 질문 뒤에 숨겨진 남편의 속마음을 알기에 나도 감정이 격해져도 그것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이성적이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남편도 내가 입을 다물 때 뒤에 숨겨진 의도를 알기에 (아주 조금 더) 기다려 줄줄 알게 됐다.


결국 그 뒤에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어쩌면 답답해 죽으려고 하는 상대방의 모습 뒤에는 내가 모르는 배려가 묻어있는 게 아닐까?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려한답시고 하는 게, 내게 울화병을 불러일으킨다면 탁 터놓고 그것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우리 둘에게만 통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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