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 Nov 20. 2024

덕후의,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도시

런던, 영국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 해리포터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처음 해리포터를 접한 곳은 집이다. 우리 동네에는 비디오방과 만화방이 학교 주변에 많았고, 비디오방에서 처음 해리포터의 1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대여했다. 대여한 비디오테이프를 집에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집어넣고, 거실 불을 끈 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웅장한 오프닝을 들으며 TV 앞에 앉아있던 순간은 꽤 설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해리의 일생에 슬퍼하기도 하고, 혹시 내게도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가 날아오지 않을까 하교할 때마다 우편함을 뒤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호그와트 승강장으로 연결되는 9와 3/4 승강장이 정말 있을 것 같아서 집 앞에 있던 전철역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만큼 순수했던 시절이다.


1편을 시작으로 나는 해리포터에 푹 빠져버렸다. 2편 '비밀의 방'부터는 개봉일에 맞춰서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늘 n번을 관람했던 해리포터다. 10대를 지나 20대 '죽음의 성물'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사연 있는 여자처럼 영화관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의 10대와 20대에 늘 있었던 해리포터였기에 끝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오래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공허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빠져나왔고, 나는 결심했다. 죽기 전에 해리포터스튜디오에 가보겠노라고.


공교롭게도 해리포터를 떠나보낸 내 마음은 셜록이 달래줬고, 그즈음 나는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퇴근 후 집이 아닌 공연장으로 향할 만큼 공연에 미쳐있었다. 당시 회사에서 또라이 같은 상사를 만난 덕분에 피폐해 있던 내 일상의 도피처는 공연장이었고, 공연 보는 내내 오롯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다음 티켓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갈 명분을 마련하곤 했다. 해리포터를 여러 번 본 짬 때문일까. 정말 취향이 아닌 극을 제외하고는 한 번만 본 극은 없다. 텅장을 보면서도 행복해하며 회전문을 돌았다.


처음 혼자 떠난 유럽 배낭여행의 인아웃 경로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리포터스튜디오가 있고, 셜록홈즈의 집이 있으며, 공연장이 즐비한 웨스트엔드가 있는 런던이 1순위였으니까. 상상 속 런던은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도시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런던은 최고의 도시일 테니.


비행기 티켓을 끊고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해리포터스튜디오였다. 내가 런던에 머무는 기간 동안의 해리포터스튜디오 표는 전부 매진. 좌절했다. 여러 후기들을 찾아보니, 일단 해리포터스튜디오 표부터 구하고 거기에 맞춰서 비행기 티켓을 발권한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실수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으면서 비행기 티켓부터 결제하다니. 성급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의지의 한국인 아닌가. 그때부터 취소표를 구하기 위해 한 시간마다 예약 홈페이지를 드나들었고 출국 열흘 전 예약티켓을 손에 쥐었다.


해리포터스튜디오 티켓을 구했으니 해리포터 연극을 예매할 차례. 완벽하게 해리포터만을 위한 여행이다. 연극 개막 일정을 확인하니 2년 뒤였다. 다음에 다시 가겠노라 다짐하고, 오페라의 유령과 위키드를 예매했다.


런던은 채도가 빠진 색을 가진 도시 같다. 쨍한 느낌은 전혀 없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차분해지고 한편으로는 우울해지는 그런 도시.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우울감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행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일까. 덕후의 도시였기 때문일까. 우울감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 해리포터와 셜록, 그리고 공연을 보기 위해 살아갈 뿐이었다.


해리포터스튜디오에 방문했을 때 울려 퍼지는 BGM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와 10년 이상을 함께 한 해리와 친구들이 지팡이를 들고 마중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평균 2시간 정도 걸린다는 스튜디오에서 나는 반나절을 있었다. 스튜디오 내에 있는 해리의 방을 보면서 '해리가 여기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해그리드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스네이프 교수를 보면서 그의 절절한 짝사랑에 가슴 아프기도 하는 등 해리포터스튜디오에 들어선 그 순간만큼 나는 해리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뉴욕에 브로드웨이가 있다면 런던에는 웨스트엔드가 있다. 웨스트엔드의 밤거리를 거닐면서 우리나라와 다르게 오픈런으로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의 모습이 새로웠다. 전용 극장이기 때문에 공연장 외관부터 입구, 무대 규모 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채도가 빠진 거리에서 반짝이는 불빛, 웨스트엔드를 설명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머무는 기간 내내 비가 내렸기 때문에 추적추적한 분위기 덕분에 마법세계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런던에서 가장 처음 본 공연은 오페라의 유령. 꽤나 앞자리로 예매했음에도 무대 전체가 잘 보였고, 1막이 끝나기 전 공연장에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질 때는 심장이 요동침을 느꼈다.


내가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다니.


뒤이어 위키드를 관람한 후 라이언킹은 데이시트로 예매했다. 데이시트는 매일 오전 공연 당일까지 팔리지 않은 티켓을 각 극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선착순 판매이기 때문에 원하는 공연이 있다면 오픈런은 필수다. 저렴하게 라이언킹 표를 구했고, 뮤지컬의 본고장답게 동물들은 분장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런던에서 공연 세 개를 봤음에도 아직 보지 못한 극에 미련이 남았다.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 등 보고 싶은 공연히 한가득이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나의 10대와 20대에 함께 해 준 해리포터와 셜록, 그리고 나의 도피처였던 연극 뮤지컬. 런던으로 시작한 여행, 시작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