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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Nov 27. 2024

목숨값과 맞바꾼 디즈니랜드 티켓값

파리, 프랑스

흔히 파리를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 낭만을 간직한 예술의 도시 등으로 표현한다. 파리가 매력적인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농축된 수많은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파리는 낭만의 도시가 아니었다. 냄새나는 오물과 쥐들의 도시, 정체 모를 다리 밑을 지나갈 땐 더욱 조심해야 한다. 밤의 골목은 처음 보는 공포 영화만큼이나 적막하고, 낮에는 전 세계에서 몰리는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는 곳이 없다. 소매치기는 말할 것도 없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 바로 여기, 파리다.


런던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까? 런던이 이렇게 예쁘고 좋았는데, 낭만의 도시라고 부르는 파리는 또 얼마나 예쁘고 좋을까 기대했다. 저녁 7시 즈음 도착한 파리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두운 밤거리에 비가 내리니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런던이랑 또 다른 분위기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비가 그쳤다. 날씨 앱을 켜보니 파리에 머무는 내내 비 소식이 예보돼 있는데, 유일하게 오늘만 비가 안 온다고 돼 있어서 계획을 수정했다. 내 맘대로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점, 혼자만의 여행은 온전히 내 것이라 좋다.


루브르박물관에 가려 했으나 비가 그친 데다가 평일 티켓이 훨씬 저렴하다는 말에 디즈니랜드로 계획을 변경했다. 사실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파리까지 왔는데 디즈니랜드는 가줘야 하지 않을까. 일하거나 여행계획을 세울 때 나는 분명 J인데 이상하게 여행지에서만큼은 언제나 P처럼 군다.


뭐 어때. 어차피 혼자 여행하는 건데.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행.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디즈니랜드. 역시나 가족단위의 여행객이 많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저마다의 공주님을 찾아 나선다. 어떤 공주님이 제일 인기가 많을까. 디즈니랜드의 공주님은 전 세계에 딱 한 명씩만 존재한다던데, 디즈니스러운 발상이다. 동화 속에 들어왔을 뿐인데 거짓말같이 날씨가 쨍쨍해졌다. 기분을 낼 겸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집어 들고 미니언즈 팝콘통을 구매했다. 평소에 팝콘 따위 먹지 않지만, 여기서는 왠지 목에 달랑달랑 매고 팝콘을 먹어줘야 할 것 같다.


겨울의 디즈니랜드는 오후 7시에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불꽃놀이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내리는 폭우. 비를 피할 겨를도 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목에 걸고 있던 미니언즈 팝콘통은 미처 뚜껑을 닫지도 못한 채 빗물통이 돼버렸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바들바들 떨면서 불꽃놀이를 기다렸고, 나의 기다림을 보상해 주듯 디즈니랜드는 내게 환상적인 불꽃놀이를 보여줬다. 어릴 때 만난 디즈니 세상을 불꽃놀이가 전부 보여줬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7살 어린 꼬마아이다.


불꽃놀이를 다 보고 나오니 꽤 늦은 시각. 비가 많이 내려 전철을 더 이상 운행할 수 없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해당 안내방송은 영어가 아닌 불어로 했기 때문에 모두가 내리고 나만 열차 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모두가 내릴 역이 돼서 내린 줄 알았기 때문에 혼자 남은 전철 안이 무서워질 무렵, 한 남자가 다가온다.


"영어 할 줄 아니?"

"응 영어는 할 줄 알고, 불어는 할 줄 몰라."

"왜 안 내려?"

"나는 00역까지 가야 해서 내리려면 좀 더 가야 돼."

"방금 나온 안내 방송은 비가 많이 와서 운행을 중단한다는 방송이었어. 너 여기서 내려야 돼."

"아 그래? 고마워!"


내가 내린 곳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구글맵을 켰는데, 배터리가 방전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다.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지도로 봐야 하는데 핸드폰이 꺼졌다. 설상가상으로 보조배터리도 말썽이다. 할 줄 아는 불어는 Bonjour(안녕)와 Merci(고마워) 뿐. 이 두 단어로는 집에 갈 수 없다. 일단 밖으로 나와서 전철역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람이 한 명도 지나가지 않는다. 비를 계속 맞고 있으니 몸의 온도가 점점 떨어지고, 캄캄한 이 밤이 너무 무섭다.


'불꽃놀이를 보지 말고 집에 올 걸.'

'나올 때 비가 오지 않더라도 작은 우산 하나 챙길걸.'

'이렇게까지 영어가 안 통할 줄 알았으면, 간단한 불어라도 공부해 둘걸.'

'보조배터리를 잔뜩 충전해 둘걸.'


별의별 생각이 떠오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저 비를 피하면서 착한 사람이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몇 분이나 흘렀을까. 건너편에 사람이 보인다. 커플인지 친구인지 일행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대뜸 묻는다.


"영어 할 줄 알아? 숙소에 가야 하는데 배터리가 방전돼서 지도를 볼 수 없어. 혹시 한 번만 검색해 줄 수 있어?"


비를 쫄딱 맞은 동양인 여자가 불쌍했는지 흔쾌히 검색해 준다. 지도를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위치해 있다. 가는 길을 머릿속에 외워두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호기롭게 숙소로 걸어가 본다.


힘겹게 도착한 숙소. 온기가 나를 감싸 안는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핸드폰을 켰는데 엄마에게 부재중이 잔뜩 와 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디즈니랜드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루브르박물관에서 IS테러가 있었다. 한국에서 해당 뉴스를 접한 엄마는 딸의 일정을 확인했고, 하필 엄마에게 전달한 일정에는 루브르박물관에 간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놀란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딸내미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이른 오전 시간이지만, 걱정할 것 같아 엄마에게 보이스톡을 했다.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바로 받아버리는 엄마. 밤새 딸 걱정으로 한숨도 못 잔 목소리다.


"너 어디야? 너 오늘 루브르박물관 간다고 돼 있던데, 거기서 테러가 있었대. 괜찮아? 안 다쳤어?"

"엄마 나 오늘 루브르 안 가고 디즈니랜드 갔다 왔어.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이제 확인했네. 이제 자려고."

"일정이 바뀌었으면 엄마한테 말을 해야지!!!!!!!!!"


매일 아침 어딜 간다고 카톡으로 남기고, 여행지의 풍경을 영상으로 찍어서 가족에게 보내곤 한다. 디즈니랜드에서는 까먹은 건지, 딱 하루 연락을 못했을 뿐인데 하필 그날 테러라니.


디즈니랜드 티켓값이 내 목숨값이었네.


번외) 파리에서 생긴 일

다음날 문제(?)의 루브르박물관을 갔고, 전날 테러 덕분에 삼엄한 경계로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개선문과 에펠탑, 몽마르뜨 언덕까지 파리를 야무지게 즐기면서 런던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기억만 남던 시간. 낭만의 도시로 부르는 파리가 소매치기의 도시로 변하는 계기가 생겼다.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친구와 함께하는 날, 전철에서 내린 순간 친구의 패딩 주머니 속으로 손이 쑥 들어온다.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상황. 소매치기범은 주머니에서 친구의 핸드폰을 꺼냈고, 친구는 재빠르게 손을 낚아채며 핸드폰을 챙겼다. 지금 뭐하는거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소매치기범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제 갈길을 간다. 소매치기를 당할 뻔 한 사람은 친구인데, 다리에 힘이 풀린 건 나였다.


"뭐야 쟤 왜 그냥 가? 너무 무서워.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쟤네는 저게 직업이야. 털릴 뻔 한 건 난데 왜 네가 힘이 풀려ㅋㅋㅋ 일어나 가자."


유럽에 살면 소매치기에도 익숙해지는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은 친구의 모습이 더 당황스럽다. 이튿날 공항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다시 한번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파리 지하철의 문은 내릴 역에 도착하면 승객이 손으로 직접 문을 열어야 하는 수동개폐 형식이다. 의자는 영화관 의자처럼 내려서 앉아야 하는데 지린내와 짙은 얼룩으로 단 한 번도 앉은 적이 없다. 서서 이동하는 사이 3명의 남자가 내 앞을 방패처럼 막아선다.


"짐이 많네? 좀 들어줄까?"

"아니 괜찮아. 나 혼자 충분해."


뒤에서 자꾸 사람들이 미는 바람에 출-퇴근길 전철처럼 몸이 끼인다. 힘을 주며 버티고 있는데, 3명의 남자가 다시 말을 건다.


"미안해. 뒤에서 자꾸 미네, 괜찮아?"

"응 괜찮아."


참 스윗한 친구들이구나. 생각하며 내리고 보니 앞으로 매고 있던 가방의 모든 지퍼가 다 열려있다. 다행히도 열린 지퍼 주머니에는 휴지와 물티슈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이기에 잃어버린 것은 없지만 괘씸했다.


이 새끼들. 나를 찌부시키면서 가방 문을 열고 털어가려 했구나.


잃어버린 것은 없지만 털릴 뻔한 적이 많았기에 어쩐지 찜찜한 파리. 거리와 전철 역사 안에는 지린내가 진동하고, 쥐가 나돌아 다니는 도시. 테러가 발생해 부모님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도시. 마음대로 전철 운행을 중단해 버리는 도시.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잃어버린 사랑이라도 찾은 걸까. 내게 파리는 냄새나는 소매치기의 도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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